의적이라 자칭하고 신이라 불린 사나이 [프리스타일]

문상현 기자 2023. 5. 31.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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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 회사 주가가 동시에 폭락했다.

짧은 시간에 한탕 벌여 치고 빠지는, 잘 알려진 주가조작 수법과는 달랐다.

그러나 주가조작이 대규모 폭락 사태로 번지는 일까지는 막을 기회가 있었다.

금융위는 4월 초 8개 회사 주가 오름세에 주가조작단이 개입돼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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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덕연 대표가 5월11일 오전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 출석하고 있다.ⓒ연합뉴스

8개 회사 주가가 동시에 폭락했다. 프랑스계 증권사 한 곳에서 대량 매도 주문을 쏟아냈다. 4월24일 시작된 폭락 사태는 4월27일까지 이어졌다. 8개 회사 하락 폭은 최소 42%에서 최대 76%. 시가총액 8조2000억원이 증발했다. ‘SG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다.

사태의 배후로 H투자자문사 대표 라덕연씨가 지목됐다. 그는 주식투자를 대신 해주겠다며 돈을 끌어모았다(투자 일임). 투자금 규모를 키운 뒤에는 관리하던 투자자들 주식을 서로 사고팔았다. 새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 주식을 비싸게 사면서 주가를 끌어올리기도 했다. 투자수익률이 30%가 넘으면 정산해주고 수수료를 받았다. 수익률은 투자자들의 동의를 받지 않은 ‘빚투(빚내서 투자:차액결제거래, CFD)'로 극대화했다.

라씨는 투자자 사이 합법적인 거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투자금 모집-운용-회수 과정을 단순화하면 결국 신규 투자자가 기존 투자자의 '엑시트' 물량을 받아주는 구조다. 실제 소수 부유층을 상대로만 투자금을 모집했던 그가 시간이 흐르면서 영업 대상을 ‘VIP 지인’으로까지 확대한 정황이 드러났다. 전형적인 ‘폰지 사기(다단계 금융 사기)’ 형태다.

라씨는 장기간에 걸쳐 판을 키웠다. 짧은 시간에 한탕 벌여 치고 빠지는, 잘 알려진 주가조작 수법과는 달랐다. 약 3년간 거래량이 적은 종목들의 주가를 하루에 1%가량씩 오르도록 시세를 조종했다. 거래 흔적은 진하게 남겼다. 그는 투자자 명의로 휴대전화 200여 개를 개통하고, 증권사 계좌를 개설해 자신의 회사인 H투자자문사를 통해 직접 관리했다. 한 곳에서 대량 거래를 하면 의심을 살 수 있어, 투자자의 휴대전화를 들고 투자자 집과 사무실 근처 등 전국 곳곳에서 주식거래를 했다.

보통 주가조작과 같은 이상 거래는 3중 차단벽에서 걸러진다. 한국거래소-금융감독원-금융위원회 구조다. 오랫동안 조금씩 올리는 주가조작 방식은 차단벽 밖에서 몸집을 키웠다. 그러나 주가조작이 대규모 폭락 사태로 번지는 일까지는 막을 기회가 있었다. 금융위는 4월 초 8개 회사 주가 오름세에 주가조작단이 개입돼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주가 폭락은 그로부터 열흘가량 뒤에 시작됐다. 금융위가 제보를 받은 뒤 대응이 부족했는지, 금융위·금감원·검찰이 협력해 추적하는 움직임이 밖으로 새어 나가 대규모 지분매각이 이뤄졌는지 등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앞으로 수사를 통해 진상이 가려질 전망이다.

일부 투자자들의 말에 따르면, 라 대표는 투자금을 모으면서 스스로를 ‘의적’이라고 했다.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최대주주가 주가를 누르는, ‘승계 이슈’가 있는 회사 주식을 사는 건데 이 경우 대주주는 손해를 보고 투자자는 돈을 버니 정의롭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에게 돈을 맡긴 모든 투자자들이 그 말을 듣고 믿은 건지 중견기업 회장, 의사, 연예인들이 돈을 벌고 있다는 사례를 믿은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부 투자자들은 그를 맹목적으로 신뢰했고 그를 ‘신’이라 부르기도 했다.

문상현 기자 m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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