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시렁] 우린 시속 1km로 산에 올라 마음 가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윤성중 2023. 5. 31.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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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모인 산악회, '등산시렁' 산악회에서 사생대회가 열렸다. 이 그림은 방소영 회원이 아이패드로 그렸다.

(아마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산악회, 등산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 만든 마운틴 클럽! '등산시렁 산악회' 멤버들이 다시 뭉쳤다(등산시 렁 산악회 결성과 첫 활동에 관한 소식은 월간산 2022년 10월호 [등 산시렁] 코너에 실렸다). 작년 가을, 등산 싫어하는 방소영, 최민아를 꼬득여 함께 서울 안산에 올랐다. 둘은 이때의 기억이 싫지 않았던 모 양인지 내가 없어도 이후 한 달에 2회 정도 등산 중이었다. 간간이 그 소식들을 듣고 있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멤버들과 함께 산 에서 그림을 그리면 어떨까? 나 혼자서만 산에서 그림 그리는 재미를 누리는 건 좀 안타까운데? 그들에게 허락 받은 다음, 책에 그들이 그린 그림을 싣는다면 이번 달 등산시렁 원고 작업 시간도 줄일 수 있다! 사 생대회를 열자! 기가 막힌 아이디어에 나는 "짝"하고 박수를 쳤다. 멤버들이 있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던졌다.

"안녕하세요, 회원님들. 별 일 없으셨죠?" 이렇게 '툭' 건드리자 단톡방은 순식간에 '수다방'이 됐다. "안녕하신가용."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안부를 주고 받다가 산행 이야기가 나왔다. 방소영씨가 제안했다. "윤 대장님, 상반기에 한 번, 서울 외 산에 함께 가요. 곰배령 꽃구 경이나 계족산 맨발산행 같은 거 하죠!" 이어서 내가 답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번에 등산시렁 사생대회를 개최해 보려고 하는데, 어떤가요?" 단톡방은 또 난리가 났다. 서로 좋다고 답했다. 날짜가 잡혔고, 대 상지도 정해졌다. 거침없었다.

약 2주 뒤 우리는 서울 아차산에서 만났다. 방소영, 최민아씨가 나 왔다. 둘은 한강 둔치로 소풍 가는 것 같은 옷차림이었다. 두 사람은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오늘 이렇게 입고 가도 되겠죠? 저, 등산화도 아니고 그냥 운동화예요." 최민아씨는 등산용 배낭이 아니라 보자기처럼 생긴 천가방을 손에 들고 있었다. 제대로 된 등산복을 입고 나타난 사람은 나뿐이었다. 격식을 파괴하는 등산시렁 산악회! 어색해진 나는 웃으면서 답했다. "안녕하세요! 물론이죠. 오늘은 산행이 주목적이 아니라 그림을 그 리는 게 아주 중요해요. 가다가 아무 데나 앉아서 그림이나 그리죠!" 둘은 밝게 웃었다.

우리는 아차산역 2번 출구에서 아차산 방향으로 걸어갔다. 거리 가 꽤 길었는데,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반가운 사람들과의 수다 는 시공간을 왜곡한다'는 가설을 증명해 줄 과학자 어디 없을까? 우리는 순간이동한 것처럼 산 입구에 도착했다. 천천히 오르막을 올랐다. 곧바로 우리 주변을 연둣빛 숲이 둘러쌌다. 나는 기분 좋게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얼마 뒤 옆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최민아 씨가 힘들어했다. 내가 말했다. "아, 제가 너무 빨랐군요. 천천히 갈게요." 최민아씨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가던 대로 가세요." 옆에서 방소영씨가 말했다. "성중씨는 우리와 같이 가면 답답하겠어요. 속도가 이렇게 느리니."

나는 절대 아니라고 답했다. "전혀 답답하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이렇게 느긋하게 가니 기분 굉장히 좋아요!" 이날 산행 속도는 시속 1km쯤 됐다. 내 입장에선 아주 느린 등산 이었는데, 조급한 마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이전 산행에 관한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꺼내어보니 죄다 형체가 일그러졌을 뿐 아니라 색깔도 온통 회색이다. 이날 산행 이미지는 노란 꽃 이미지가 선명하다. '천천히'는 확실하고 정확하며 선명하다. 천천히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경우가 얼마 없고 기분 좋게 하는 요소로 가득하다.

등산시렁 산악회 최민아 회원의 그림. 마카와 수채물감을 섞어서 그렸다.

얼마 안 가 '고구려정'이 나왔다. 널찍한 바위지대 위에 솟아오른 정자에 올라가서 잠깐 바람을 맞았다. 미세먼지가 잔뜩 끼어 볼 만한 풍경은 아니었다. 이쯤에서 그림을 그리자고 누군가 할 만했는데,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자에서 내려와 운동시설이 있는 '산스장' 벤치에 앉았다. "자, 이거 드실래요?" 방소영씨가 자신이 메고 온 작은 배낭에서 먹을 거리를 계속 꺼냈다. 그녀가 배낭 무게를 줄이려고 한다는 걸 깨닫고 나도 배낭을 열어 먹을 걸 꺼내어 방어했다. "자, 저도 이거 싸왔어요. 이거 드세요." 우리는 깔깔대며 웃었다. 얼마 동안 떠들다가 우리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은 아차산 정상으로 가는 방향, 오른쪽은 아차산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방소영씨가 자신의휴대폰을 내밀었다. "여기, 이거 아차산 숲속 도서관이라고 하는 덴데, 여기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죠?" 그녀가 보여준 도서관 사진이 근사했다. 도서관은 아차산성 쪽과 이어진 하산로 근처에 있었다.

아! 우리는 산 꼭대기로 가는 것이 아니었지! 나는 날아가는 대포알도 아니면서, 왜 자꾸 '목표지점'으로 떨어질 생각을 했던가? 나는 이때까지 꼭 아차산 정상에 가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와! 여기 좋네요. 우리 여기로 가서 그림 그리죠!" 모두 좋다고 했다. 우리는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내려갔다.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가 나오면 무조건 앉았다. 새소리를 듣고 초록빛 잎이 막 나오기 시작한 나무들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나무들이 바람에 흔 들리면서 "끼이익, 끼이익" 소리냈다. 스마트폰 날씨 앱에는 미세먼지경보 표시가 그려져 있었지만 숲에는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이윽고 도서관에 도착했다. 도서관은 작았다. 우리는 도서관 뒤편으로 돌아가 농구장이 있는 공터 오두막으로 갔다. 방소영씨는 그림 그릴 때 쓰는 '마카(일종의 굵은 사인펜)'를 꺼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이패드'에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최민아씨는 붓과 팔레트, 스케치북을 내었다. 나는 작은 수첩과 샤프를 준비했다. 그림 도구들 옆에 김밥과 샌드위치, 방울토마토, 구운 밤 등이 담긴 도시락을 펼쳤다. 꽃잎이 흩날렸다. 햇빛이 쏟아졌다. 분위기가 좋았다. 지나가 던 등산객들이 우리를 흘끔대면서 봤다. 우리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 했다.

등산시렁 산악회 '윤성중'이 그린 그림. 이상하다.

스윽, 슥. 나는 초록색 마카를 들고 거기에 쓰인 일본말을 더듬더듬 읽었다. "미도…리?" 그러자 최민아씨가 말했다. "오, 일본어 읽을 줄 아세요? 그건 미도리! 초록이라는 뜻이에요." 나는 신기해서 그녀에게 말했다. "와, 일본어 어떻게 알죠? 저는 지금 히라가나를 떼고 이제 막 가타카나를 외우는 중이에요." 그녀는 일본에서 3년 동안 생활했고,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중퇴했다고 했다. 나는 놀랐다. 그것은 한때 나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걸 꿈꾸고 있다.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해 산악부에 가입하기. 나는 눈을 반짝거리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와!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다니는 게 제 꿈이었는데, 어쩌다가 그 좋은 학교를 그만뒀죠?" "하하하. 그러셨군요. 비자 문제로 돌아왔는데요, 학교 생활이 좀 공허하다고 느꼈어요. 좋은 학교 들어가면 좋은 디자이너가 될 줄 알았어요. 실제로 저 말고 주변 사람들은 다 그렇게 달려나가는 것 같았어요. 저만 뒤쳐지는 기분이었죠. 학교 졸업하고 인간 노릇하면서 살려면 변하고 성장해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때 저에겐 그걸 밀고 나갈 에너지가 없었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걸 몽땅 꺼내놓은 다음 그걸 고르고 다듬어야 할 시기였는데, 저한테는 꺼내 놓을 뭔가가 하나도 없었어요."

"아, 어떤 상황이었을지 살짝 이해가 가지만 안타까워요.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가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민아씨를 무사시노 선배라고 부르고 싶네요!"

"하하하하! 그렇게 부르세요, 그럼."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 나는 내가 그린 그림에게서 위로받을 때가 있다. '와, 이거 정말 내가 그린 거야? 내가 이렇게 잘 그렸다고?'라면서. 어쩔 땐 그런 그림들이 꼭 내가 낳은 자식 같을 때가 있다. 그것을 스마트폰에 저장했다가 몇 번이고 꺼내어 바라본 적 있다.

방소영, 최민아씨는 그래픽디자이너다. 둘은 대학교에서 미술을 배웠다. 인생의 많은 시간을 그림 그리기와 함께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할까? 물어봤다.

"두 분은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나요?" 방소영씨는 웃기만 했다. 최민아씨는 이렇게 답했다. "좋아했었던 건 확실한데 지금도 좋아하는지는 의문이에요. 오랜 시간 해와서 그런지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겨서.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지금도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해요!"

등산시렁 산악회 사생대회 현장.

이것은 나에게 "산을 좋아하나요?"라고 묻는 것과 같은 걸까? 어쨌든 두 사람이 이날 그린 그림은 내가 그린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일명 '잘' 그렸다. 나는 도저히 그들의 솜씨를 따라갈 수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내 그림을 보고 잘 그렸다고 칭찬했다. 기분 좋았다. 하지만 그들이 못 그렸다고 했어도 나는 기분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저 괴상망측함을 좋아하니까! 그들이 그린 그림이 나처럼 자신을 치유하는 용도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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