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건축] 김옥균과 건축선 그리고 공공성

이승재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건축공학부 교수 2023. 5. 31.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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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건축공학부 교수

우리나라 건축법 제46조는 건축선에 관한 법이다. 건축선은 대지가 도로와 접해 있을 때 건축물을 건축할 수 있는 경계선을 말한다. 도로와 건축물 사이 일정한 여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건축선 규제가 없다면 도로와 인접하게 지은 건축물 출입구는 도로를 침범해 통행에 큰 지장을 준다. 대문과 담장은 건축선을 넘을 수 없다는 법이다. 이와 함께 건축선은 도로와 건축물이 만들어 내는 가로 경관의 정리정돈과 보행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정리정돈이 잘된 가로와 도로와 도로가 만나는 부분이 직각이 아니라 꼭지가 잘려 나간 모퉁이가 돼 시야 확보가 가능한 것도 건축선의 역할이다. 건축선은 유럽 등에서 널리 사용된 도시와 건축계획의 매우 고전적인 제도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 건축가 히포다무스가 밀레투스 도시계획에서 처음으로 격자형 가로망에 건축선의 개념을 도입했다. 로마는 직교하는 두 개의 가로를 중심으로 도시가 계획되고 이것은 미국의 도로망인 에비뉴와 스트리트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바둑판과 같은 그리드를 통해 도시를 계획하고 건축선에 맞추어진 건축물은 도시의 아름다운 건축적 질서를 창조해 낸다. 우리가 잘 정비된 도시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럼 국내에 건축선의 개념이 적용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국내 역사에서 건축과 관련한 법령은 조선시대 경국대전에서 신분에 따라 건축물 토지 면적을 제한했고, 세종실록에서도 신분에 맞춰 건축물의 규모를 제한한 법령이 있었다. 양반집은 99칸에 한정된 것은 사대부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국내 최초로 건축선 규제를 이야기한 사람은 바로 김옥균이다. 1882년 고종 19년에 치도약론(治道略論)이라는 정책서를 통해 한성의 나아갈 방향을 새로이 제시했다. 3가지의 핵심 내용은 첫 번째가 도로와 하수도의 건설, 두 번째가 건축선 규제, 세 번째가 분뇨 처리다. 우선 도로를 건설해 농업 운반의 일손을 줄여 공업의 기술로 돌리고, 하수관을 제작해 도랑에 묻는 하수망을 제안했다. 다음은 화재 예방과 차마(車馬)의 통행을 위해 거리나 마을에 볏짚을 엮어 만든 임시 가옥을 금지하는 등 건축선 규제를 철저히 할 것을 주문했다. 미리 도로의 선에 맞춰 가옥의 기초를 세우고, 일정한 도로 폭과 일정한 가옥의 높이를 유지해 미관을 고려하는 방침을 정했다. 수도관 매설, 가로등 설치 등도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정화조에 해당하는 옹기를 민가에 비치해 인분을 처리하고 이를 한 곳에 모를 저장소를 마련하는 분뇨 처리 체계를 내놓았다. 여기에 모아둔 비료를 농부에게 판매해 농업진흥과 연계하는 방책도 제시했다. 김옥균이 근대 도시의 기본 중의 기본적인 체계를 제안한 것이다.

우리 지역이 낳은 시대의 풍운아 김옥균은 1881년 공주에서 태어나 22세에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다. 오늘의 기재부 차관에 해당하는 호조참판으로 차관 도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문물을 시찰했다. 일본의 1만 엔 지폐에 실려 있는 당시 일본 최고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김옥균을 만나자마자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한다. 김옥균의 첫인상이 용감하고 명쾌하며 품은 뜻이 개인의 입신양명이 아닌 조국 조선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을 보고 감동해 자가에 머물게 하고 그를 사후까지 끝까지 도와준, 요즘 말로 사상과 국경을 뛰어넘은 우정의 끝판왕이었다. 후쿠자와의 소개로 김옥균은 당시 일본 정계의 유수한 인물들을 만나게 되고 일본의 근대문물을 속속 들여다봤다. 김옥균은 현실보다는 이상을 마음에 두고 사람을 가리지 않았기에 늘 그의 주변은 사람들로 넘쳐났고, 그의 천재성과 개방적인 생각, 솔직함은 만인을 매료시킬 수 있는 무기였다. 김옥균은 영국의 왕정을 답습한 일본보다 시민혁명을 통한 프랑스식 근대 시민국가를 꿈꿨으며 이것이 삼일천하로 끝난 1884년 갑신정변의 이유였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갑신정변이 성공했다면 치도약론으로 시작된 조선의 근대화는 일제 강점기로 이어졌던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꿨을 수도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 했다. 그럼 도시와 건축은 어떤 관계일까. 건축에서 보는 아름다운 건축과 도시에서 보는 아름다운 건축은 어떤 차이일까. 전자가 패션모델과 같이 자신만의 빼어난 아름다움이라면 후자는 전체로서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이며 그것이 건축의 공공성(公共性)이다. 건축과 도시가 만나는 최전선, 그리고 공공성이 시작되는 그 선이 바로 건축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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