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보다 싼 ‘전세대출 이자’…악성 임대인 ‘갭투기장’ 변질 [심층기획-전세시장 대혼란 닥친다]

조희연 2023. 5. 31.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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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진앙지는 당국·은행권
정부·은행권 전세시장 ‘띄우기’
불량 임대인 검증 제도엔 소홀
2016년부터 전세자금대출 활성화로
수요 커지고 전셋값 올라 갭투자 확대
일각선 “투자자가 대우받는 세상 왔다”
깡통전세 피해 세입자들 잇따라 발생
“중개사에 임대인 정보 확인 권한 부여
은행선 집주인 현금흐름 등 심사해야”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다세대주택에 3년여 전 보증금 1억원짜리 전셋집을 계약한 심혜영(가명·35)씨는 이사 온 지 한 달도 안 돼 날벼락 같은 일을 겪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보증보험 가입 문의를 했더니 “임대인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 안 된다”는 답을 들은 것이다. 자초지종을 묻는 심씨에게 임대인 진모(51)씨는 적반하장으로 “보증금을 돌려줄 능력이 없다”고 나왔다.

대출금 7000만원을 포함한 보증금 1억원이 그렇게 한순간 사라졌다. 다음 세입자에게 ‘폭탄 돌리기’를 하고 보증금을 받아 나가든지, 보증금은 포기하고 집에 눌러앉든지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후자를 택한 심씨는 3년5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문제의 집에 거주하며 울분을 참고 있다. 대출금을 갚으려 하루 3∼4시간 자며 건물 청소 등을 하지만 1년6개월을 몰아붙여도 2000만원밖에 모이지 않았다. 전세 사기에 대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30대 초중반의 시기를 정신적·육체적으로 낭비한 심씨는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빠지곤 한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 빌라 밀집 지역의 모습. 연합뉴스
그에게 가장 힘든 건 ‘사기 피해자인 내가 왜 대출금을 갚아야 하나’라는 억울함이다. 30일 세계일보 취재진과 만난 심씨는 “신용불량자가 임대 시장에 뛰어들어 임차인과 계약을 맺고, 임차인의 전세대출금을 가져가는 동안 정부와 은행은 무엇을 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임대인 진씨는 체납 세금만 45억원에 달하는 신용불량자로, 그가 소유한 주택 400여채에 가압류가 들어간 상태다. 진씨가 경매로 나온 집을 1억원에 사서 동일한 금액으로 전세를 내주는 ‘무자본 갭투자’를 한 뒤 보증금 반환 부담은 고스란히 세입자에게 떠넘기는 식으로 전세 사기 규모를 키워갔다는 사실을 심씨는 뒤늦게 알게 됐다.

심씨가 겪은 악몽은 ‘신용불량자 임대인이 마음만 먹으면 임차인을 속일 수 있는’ 현실을 또 한 번 드러낸다. 그 진원으로는 전세자금대출과 전세보증보험 활성화로 전세·부동산 시장을 띄우기만 하고, 임대인 검증에는 소홀했던 당국이 꼽힌다. 이로 인해 전세 시장이 악성 임대인의 갭투기장으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임대인 처벌과 임차인 구제를 넘어 정부가 근본적으로 ‘깡통전세’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세자금대출의 등장, 갭투자장의 시작

30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자료에 따르면 전세 계약 건수는 2016년 이후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전국 주택 및 아파트 전세 건수는 2014년 65만1114건에서 2015년 53만7486건으로 크게 하락했었다. 이후 2016년 61만6396건으로 다시 오르더니 2018년 75만6114건, 2019년 83만4035건으로 증가세를 이어갔다. 지난해에는 85만2717건을 기록했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2016년부터 전세자금대출이 활성화돼 ‘전세의 판도’가 바뀌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정부는 2015년 전세자금대출 한도를 5억원까지 증액했는데, 전세 수요가 커지고 전셋값이 오르면서 갭투자가 속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은행에 따르면 은행권 전세대출 잔액은 2016년 36조원에서 2017년 48조6000억원으로 오르고 지난해 10월 기준 171조9000억원까지 폭증했다.
50대 건설업자 문모씨는 “2016년 이후로 빌라시장이 실수요장에서 갭투자장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문씨는 “빌라는 원래 아파트에 들어갈 돈이 없는 사람들이 매매로 들어가서 살던 집이었는데, 전세자금대출이 나온 뒤로는 빌라에도 전세자금대출로 들어갔다”고 덧붙였다. 빌라에 전세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늘어나고 매입하려는 사람은 없던 탓에 전셋값이 매매가 수준으로 오르는 ‘깡통전세’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2007년부터 부동산 컨설턴트로 일해온 권영국(51)씨도 “이전까지 갭투자하려는 사람들을 쳐다도 안 봤었다”며 “실거주자가 없어지면서 투자자들이 대우받는 세상이 왔다”고 말했다. 갭투자를 성사시키려면 집을 사려는 임대인뿐 아니라 전세 세입자도 함께 구해야 하기 때문에 부동산 컨설턴트에게 갭투자는 ‘귀찮은’ 거래였다. 하지만 실거주자가 사라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권씨는 “일주일이면 분양 완료되던 집들이 4개월이 지나도 완료가 안 됐다”면서 “건물을 지은 건축주도 이전에는 투자자들에게 최소한 3000만∼5000만원을 요구했었는데, 나중에는 이자가 너무 나가니까 2000만원만 줘도 집을 줬다”고 전했다.

◆보증보험에 기댄 은행·세입자

공인중개사가 임대인의 신용을 파악해 거래의 위험성을 고지해 주면 다행이겠지만, 현행 제도상 공인중개사도 임대인의 자산을 파악할 방법은 없다. 결국 세입자와 은행은 보증보험 제도만 믿고 거래해 온 셈이다. 공인중개사 김미경(46)씨는 “사실 전세는 위험한 제도이고 ‘보증금을 못 받으면 경매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보증보험이 다 보장해 준다’고 하니까 세입자들은 전세가 이자도 싸고 안전하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가 지날수록 전세대출과 보증보험에 기댄 허술한 전세의 역풍이 닥치기 시작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전세보증금 보증사고는 2016년 27건(34억원)에서 2017년 33건(74억원)으로 소폭 상승했고, 2017년 보증 한도가 전세가율 100%까지 오른 뒤로는 2018년 372건(792억원)으로 10배 급증했다. 이후 상승세를 지속하며 2022년에는 5443건(1조1726억원)까지 올랐다. 임대인이 돌려주지 않은 이 돈은 결국 임차인, 혹은 보증보험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깡통전세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전세자금대출 이자는 임차인이 내지만 대출금은 사실 임대인이 내야 한다”며 “사실상 임차인을 통해 임대인에게 대출해 주는 구조인데, 임대인의 반환 의사·능력이나 전세보증금 수준은 심사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은행이 전세대출 심사 시 임차인뿐 아니라 임대인의 현금흐름이나 포트폴리오도 심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공인중개사에게 임대인의 정보를 확인할 권한과 의무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공인중개사뿐 아니라 임차인의 권리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임대인의 자산 정보가 최우선적으로 공개돼야 하는 사람은 임차인”이라며 “공인중개사가 임대인과 함께 전세사기를 저지르기도 하기 때문에 공인중개사와 임차인이 모두 임대인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전했다.
정부는 지난 2월부터 전세사기 의심 공인중개사에 대한 특별점검을 벌여 108건의 위반행위를 적발해 이 중 53건을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고 이날 밝혔다. 이번 조사는 ‘빌라왕’ 등 악성 임대인의 주택을 2차례 이상 중개한 수도권 공인중개사 242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전세사기 의심거래 점검대상을 추가하고 점검지역을 수도권에서 전국으로 확대해 2차 특별점검을 시행 중”이라며 “불법행위에 연루된 공인중개사에 대해서는 관련 법에 따라 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희연·윤준호·박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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