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직필] 혁신과 평등, 진보의 좁은 길
실업 및 나쁜 일자리 문제와 겹친 불평등의 심화는 공동체를 해체시킨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같은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유행처럼 ‘포용적 성장’을 지향하는 흐름이 출현했던 배경이다. 그러나 그 ‘포용’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는 별로 안 보인다. 유행이 지났는지 포용적 성장이 지체되는 원인도 진단되지 않는다. 오늘날 불평등 문제가 경제성장의 동력인 혁신 과정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경제학자들 사이에 합의된 의견 자체도 많지 않다.
경제학자들이 혁신과 평등의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된 하나의 계기는 저임금 노동자의 처지를 악화시키는 ‘숙련 편향적 기술진보’를 둘러싼 논의가 진전됐다는 것이다. 그 논의에서 기술진보는 불평등을 초래하는 ‘필요악’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가난을 면하려면 평등은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전통적 인식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지만 이후 만만치 않은 반론과 마주해야 했다.
예를 들어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연구는 현실의 불평등을 기술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동의 교섭력 약화가 불평등의 더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임금주도 성장론’도 유력한 반론이었다.
다만 조지프 슘페터의 영향을 받은 내생적 성장이론의 진전된 연구들을 참고하면 혁신이 최상위 부자들한테 부를 집중시키는 효과만큼은 꽤 뚜렷하다. 그에 비하면 혁신 때문에 소득 분포가 전체적으로 불평등해진다는 증거는 미약한 편이다. 오히려 혁신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사회적 엘리베이터’를 제공해 사회적 지위의 변동성을 높인다는 연구도 보고된 바 있다. 그러나 혁신이 미숙련 노동에 있어 연공서열을 강화하고, 동일 노동에 대한 기업 간 임금 격차를 키울 수 있다는 결과는 해석이 간단치 않다. 혁신의 지속성도 고려하면서 평등을 추구하는 전망은 여전히 좁은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 진보적인 정치권력이 국내 자본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에 따라 혁신과 평등의 경제성과에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음도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 사이의 관계, 특히 근저에 깔린 권력 지형을 전환하는 과제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보적인 정부는 주류 질서를 뒷받침하는 이론과 접근법으로 그와 같은 전환 과제에 임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기성의 것들과는 다른 대안적 정치경제학 개념 틀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경제학자 마리아나 마추카토와 윌리엄 라조닉의 대안적 설명에 따르면 혁신은 경영자나 주주들의 의지에 기초한 선택이기보다는 기업과 정부, 시민사회가 함께 가치를 창조하는 집합적 과정이다. 혁신은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조직적 학습을 거치며 실현된다. 그 과정에서 납세자를 대표해 정부가 자본 집약적이고 위험이 큰 기술 영역에서 기업이 회피하려는 위험을 감수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정부는 혁신의 성공을 위해 새로운 시장을 형성해내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혁신이 이처럼 집합적인 노력의 결실이라는 사실로부터 가치 창조의 방향성과 가치 분배에 있어 지켜져야 할 원칙이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그것은 공공의 목적을 해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이어야 한다. 가치 창조에 기여한 노동자들을 배제하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자본의 궁극적인 이해관계는 혁신 자체가 아니라 얼마나 더 많은 가치를 사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가에 있다. 단기 실적을 중시하며 자사주 매입이나 고액 배당으로 내부 자금을 소진해 혁신의 동력을 약화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부자 감세, 재벌 감세 등으로 그들의 몫을 늘려준다고 혁신의 성공이 보장될 리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혁신 이론의 선구자 슘페터 자신부터 왜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견했겠는가. 혁신 성과를 홀로 차지한 자본의 기득권이 새로운 혁신을 막을 것으로 봤던 것 아닌가.
인공지능이든, 양자기술이든, 수소경제든 기술 변화의 방향과 혁신 성과의 분배는 어떤 운명적인 과정이 아니며 한 사회의 집단적 선택의 결과다. 불평등 역시 사회계급 간 세력 불균형을 반영할 뿐으로 변경 불가능하지 않다. 로베르토 웅거의 대담한 구상에도 불구하고 ‘지식경제’의 확산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거꾸로 문제의 새로운 공간이 열릴 뿐이다. 그 지식경제의 공간에서 시민들과 정치권력이 어떤 결정을 하는가에 따라 혁신도 평등도 그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바로 그 결정의 길이 머지않은 미래 한국의 진보 정권이 걸을 좁은 길이다.
나원준 경북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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