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시인과 농부

경기일보 2023. 5. 31. 03:01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때 불의의 외도로 피폐했던 시절, 시달리는 마음을 다스리려 이곳에 오간 적이 있다. 나의 고해를 엿들은 주인장이 배웅하며 대추차 한 팩을 건네준 기억이 새롭다. 켜켜이 쌓인 방명록, 저마다의 사연이 포스트잇에 빼곡 매달렸다.

가끔 시 낭송회와 그림 전시도 하지만 입구에 “어서 오세요, 벗어 놓으세요, 당신의 슬픔을 여기서는 침묵하셔도 좋습니다”라는 문구가 의미를 정당화하는 데 위배되지 않는 쉼터다. 휴일에 어반스케치 팀과 함께 왔다. 주인장은 여전히 청색 원피스에 중절모를 썼다. 요요마의 첼로 엘가가 도입부부터 현을 떨며 LP판을 타고 흐른다. 세르지오 토피의 펜화 재킷에 담긴 Toppi’s Ladies가 이어서 흘러나온다. 재즈의 우아한 우수가 메디슨 카운티 다리의 끈적한 분위기를 소환한다.

질그릇에 삶은 감자를 담고 잔 얼음에 뽀얀 식혜도 놓였다. 정물을 그리며 모두 감자를 먹는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 스친다. 도기 찻잔에 가득 담긴 수제 대추차도 그윽하다. 음식을 매개로 한 담소는 무엇보다 생기가 있다.

삶의 구성이 의식주라면 누군가와 함께 차 한 잔을 나눈다는 것은 가장 구체적인 인생의 향기가 아닐 수 없다. 수십억이 살아가는 이 세상, 그중에 당신 앞의 단 한 사람. 지금이 무엇보다 소중한 이유다.

경기일보 webmaster@kyeonggi.com

Copyright © 경기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