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둘러보는 마을은 나의 학교… 내 詩가 세상과 한편 됐으면”
팬데믹 2년간 날마다 섬진강 산책하며
하루 한 편 씩 글… 500여편 중 55편 골라
나비·바람·나무… 뭇생명 온기 섬세히 포착
삶의 무상함·슬픔·후회도 오롯이 담겨
“내가 사는 마을의 말 충실히 따르고 싶어”
해 질 무렵, 섬진강 강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길 앞에서 흰 배추잎나비 네 마리가 모여서 놀고 있었다. 나비들이 노는 곳으로 들어갔다. 나비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계속 그의 주위에서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장난삼아 두 손을 휘휘 휘저었다. 나비들의 날개바람이 그의 손가락 사이 부드러운 살갗에 닿았다. 서늘한 바람결이….
팬데믹 시절, 그는 매일 마을 한 바퀴를 돌면서 일기 외에 한 편의 짧은 글을 썼다. 내용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이 흐르는 대로. 그러고 보니 2년 전 인터뷰에서 “코로나 시절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코로나 이후의 삶이 달라질 것”이라며 매일 마을을 둘러본 뒤 하루 한 편씩 글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부터 오전 5시쯤 현관을 나서 강을 건너가서 마을을 바라보고 다시 돌아온 뒤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하루 한 편씩 글을 씁니다. 강을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사이 일어나는 일들, 마을 사람을 만난 이야기, 동네에 일어난 사소한 일들, 보고 느낀 것들을….
2년 사이에 무려 500여 편의 글이 모였다. 지난해 11월 팬데믹 기간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나비시편을 비롯해 많은 시들을 찾아냈다.
―이번 시집에는 나비와 함께 바람도 많이 등장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하는 일이 굉장히 많은 것 같다. 구름을 데리고 다니기도 하고, 나무를 흔들어주기도 한다. 앞산에 바람이 분다든가, 강물에 바람이 분다든가, 문을 열고 나가면 바람이 휙 지나간다든가, 신비로워 보인다. 나비가 만든 바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바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진짜 끔찍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공기를 흔들어 주기 때문에 바람이겠지만, 공기와 다른 어떤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시집의 문을 연 시는 ‘등이 따뜻해질 때까지’. 별이 빛나는 어느 날 밤, 시인은 밖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는데. 환한 밤에 밖으로 나갔다가 만나게 된 뭇 생명의 소리와 온기, 그것을 다시 한 번 건너다보던 순간의 마음을 예민하게 포착했다.
“창문이 밝아오자 창문을 열고/ 별들을 내다보았다/ 나무들이 곳곳에서 반듯하였다// 강 건너 길을 걸었다/ 어린 쑥들이 마른 풀밭 잔돌 곁에서 돋아났다/ 서리가 녹아 돌도 쑥도 젖었다// 누가 텃밭을 파는지/ 흙을 파고드는 호미 끝에 자갈 닿는/ 소리가 강을 건너왔다// 등이 따뜻할 때까지/ 강가에 앉아 있다가/ 왔다// 무엇인가를 두고 온 것 같아/ 강 건너 그곳을/ 한번/ 건너다보았다”(‘등이 따뜻해질 때까지’ 전문)
시 ‘슬픔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는 별들의 표정을 나는 알아요’에는 매일 마을을 둘러보는 시인의 모습이 얼핏 보인다. 그는 “오래 들여다본 시”라면서 “슬픔으로 기쁨을, 아름다움으로 슬픔을 설명할 수 있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말했다.
“마을은 나의 학교입니다/ 새벽이슬들을 깨우며/ 텃밭 일을 하는 농부들은 나의 선생입니다/ 같이 늙어가도 밭을 곱게 고르는 사람에게서 사람을 배웁니다/ 그들은 농기구에 힘을 주지 않습니다/ 농경은 시대착오 없이 한결 같습니다/…나는 늘 마을을 뒤돌아보았습니다 애잔은 내 시의 처음이었으니까요”(‘슬픔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는 별들의 표정을 나는 알아요’ 중에서)
마을을, 강과 산길에서 우주만유의 경이만 만나는 건 아니다. 삶의 무상과 그에 따르는 슬픔이나 후회 역시 만날 수밖에 없으니. 시 ‘나무에게’와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등은 어떤 무상이나 후회 같은 것을 만나던 순간이 담겼다.
“나무야/ 봄은 오고 있다/ 너를 올려다본다/ 내 나이 일흔여섯이다/ 이제 생각하니/ 나는 작고 못났다/ 그런데다가/ 성질도 못됐다/ 나무야/ 근데 내가 인자/ 어찌하면 좋을까”(‘나무에게’ 전문)
그럼에도 모든 존재와 삶은 온갖 것이 품고 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은 서로에게 의미를 줘야 한다. 지금 할 일을 지금 하면서. 딴 생각하지 말고. ‘꽃이 나를 보고 있다’지 않는가.
“꽃에 물을 주며 생각한다/ 지금 꽃에 물을 주는 일을/ 성실하게 이행하자/ 다음에 할 일을 지금 생각하다보면/ 꽃에 물주는 일을 서두르게 되고/ 꽃에 물주는 일이 허술하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꽃에 물을 주며/ 딴생각하는 내가/ 나를 타이르는 것이다/ 꽃이 나를 보고 있으니까”(‘꽃이 나를 보고 있다’ 전문)
“나의 말인지, 내 옷 같은지 먼저 살펴본다.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 세상하고 맞물려 있는지,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거나 세상으로부터 소외받지 않고, 세상과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내게 맞는 말이 세상에 나가서 세상과 긴장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 내가 되었다 싶을 때, 세상과 들어맞을 때, 그때 시가 되는 것 같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시인은, 오늘도 섬진강 언저리를 부지런히 배회할 것이다. 고요가 내려앉은 이른 아침이나 마음이 차분해지는 해 질 무렵, 달이 마음을 들뜨게 하는 밤에.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야기할 것이다. 달과 바람, 나무, 산앵두꽃, 참새, 나비, 우주 만유를. 그리하여 달이나 산, 바람, 나비를 시 속으로, ‘한편’으로 모셔올 것이다.
“나의 말이 나의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 모두의 말이 되기도 하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내 시가 세상과 ‘한편’이 되기를 나는 원합니다. 나는 늘 내가 사는 작은 마을의 말을 충실하게 따르고 싶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지 않고 날개를 펴는 나비의 날개를 생각합니다.”
산이나 들이나 바람이나 나비에서 시가 나오지만, 시에서 태어난 이들 산이나 들이나 바람이나 나비는 예전의 그들이 아니다. 더 이상 작고 나약하고 무기력한 이들이 아니다. 그렇게 그는 우주 만유와 ‘한편’이 되고, 어느새 우주 만유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비는 시에서 태어났다/ 말로 날개를 단 것들의 괴로움을 알고 있는 그 나비는/ 다시는 시에 앉지 않는다”(‘다시는, 다시는’ 전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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