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칼럼] 신당 창당을 고민하는 젊은 벗에게

한겨레 2023. 5. 3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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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칼럼]대한민국 정치의 역동성은 그릇된 관행과 타성을 그리 오래 용인하지 않습니다. 과거 선례만 주워섬기는 전문가의 근시안으론 결코 예측하지 못할 일이 수시로 벌어집니다. 세상을 바꾸는 건 행동하는 민초들이고 지식인은 그걸 평론할 뿐입니다. 국민을 믿으세요.
지난달 15일 정의당 주도의 정치그룹 ‘정치유니온 세번째 권력’의 출범식에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와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나란히 함께해 눈길을 끌었다. 연합뉴스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전 지금 지리산에 와 있습니다. 산은 보라고 있는 것이지, 오르라고 있는 게 아니라고 우겨대면서 산채전에 소주 한잔하는 게, 제 최고의 낙이거든요. 십리길 벚꽃은 때를 놓쳐 보지 못했지만, 연등에 비친 벚나무 이파리들이 꽃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어요. 밤이 깊을수록 계곡 물소리가 선연하고 산바람이 서늘해서, 가져온 모든 옷을 순서 없이 껴입었습니다. 오랜 불면의 습관이 여기만 오면 슬그머니 누그러져서 새끼 고양이처럼 새근새근 잠이 들곤 했는데, 오늘은 좀처럼 잠이 오질 않습니다. 엊그제 제게 주셨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려서일까.

“당에서 공천받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까요? 박차고 나가서 신당 준비를 해야 할까요?” 물으셨을 때 즉답을 못 하고 어물어물 말끝을 흐리는 제게 “괜찮아요. 이미 답을 주신 것 같은데요” 하면서 미소 짓던 그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요. 무능하고 부도덕한 정당에 뼈 묻을 각오로 들어간다고 해서 과연 정치를 바꿔낼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신당 창당 말곤 방법이 없는데 가진 것 없이 패기와 의지만으로 세상을 바꿀 새로운 세력을 형성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당연합니다.

지난 6개월간 청년을 위한 정치학교에서 우린 매주 강도 높은 6시간짜리 토론 수업으로 만나고 헤어지기 아쉬워 새벽까지 머리를 맞대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눠왔지만, 결국 피할 수 없었던 이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군요. 지난주 우리 정치학교 수료식 날 수강생들이 발표한 실천선언문의 첫번째 항은 “지금까지의 청년정치를 거부합니다. 나이가 어린 것만으로 새로움을 강조하거나 기득권의 선거용 들러리로 스스로를 세우지 않겠습니다”였지요. 설레는 마음으로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 선언을 실행하려 할 때 청년들 각자가 감당해야 할 고난의 무게를 생각하면 저도 마음이 무겁네요. 그래서 적습니다. 안갯속에서 새 길을 찾을 때 혹여 참고될까 싶어.

첫째, “무당층이 많으니 신당 창당의 호기”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을 전적으로 믿지는 마세요.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지지도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30%를 맴돌고 무당층 역시 그에 맞먹는 상황입니다만 과거에도 이런 경우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때나 2008년 노무현 정부 말기에는 무당층이 50%를 넘기도 했어요. 무당층 비율만 보고 창당을 한다고 진정한 세력교체를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양당이 다 싫으니 신당을 찍으라는 건, 상대 당이 싫으면 나를 지지하라는 지금의 양당 논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본질적 차이 없이 혐오에 기대 얻는 반사이익만으론 새로운 정치를 열 수 없습니다. 차악의 논리가 아니라 국민이 바라는 공적 윤리와 정책능력으로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양당체제에 비판적인 무당층이 아무리 많아도 선거가 임박하면 결국 양당 지지표로 흡수되는 법이니 딴 맘 먹지 말라”고 호언하는 사람들 말도 믿지 마세요. 과거의 무당층과 현재의 무당층은 다를 수 있습니다. 탄핵촛불을 통해서 유례없는 정권교체를 끌어낸 국민입니다. 대한민국 정치의 역동성은 그릇된 관행과 타성을 그리 오래 용인하지 않습니다. 과거 선례만 주워섬기는 전문가의 근시안으론 결코 예측하지 못할 일이 수시로 벌어집니다. 세상을 바꾸는 건 행동하는 민초들이고 지식인은 그걸 평론할 뿐입니다. 국민을 믿으세요.

셋째, 노선이 다르다고 적대하지 마세요.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누군가는 남아서 고치는 걸, 누군가는 새 깃발을 드는 걸 택할 겁니다.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이들을 존중하세요. 우리 정치학교에는 국민의힘, 민주당, 정의당, 녹색당 청년들이 있고 안티페미니스트와 열혈페미니스트도 있었잖아요. 불평등과 기후위기, 전쟁의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진정성에서 한마음이라면 사안별로 이견이 있어도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서로를 고양할 수 있다는 걸 느끼셨을 겁니다. 민주적인 다당제 연정을 할 수 있으려면 주체들 스스로 존중하고 경청하고 정직하게 경쟁할 수 있어야 해요. 적대와 배제가 아닌 선의의 경쟁으로 정의로운 권력을 추구하세요.

그날 저와 헤어질 때 그런 말을 하셨지요. “저도 알아요. 결국 제가 결단할 문제라는 걸.” 그 착잡하고 결연한 표정을 잊지 못할 거예요. 이런 서글픈 정치 현실을 물려준 기성세대의 한사람으로 안타깝고 마음 쓰립니다. 지치지 말고, 다치지 말고, 뜻한 바대로 밀어붙이세요. 저도 미약하지만 험한 길 그 발밑을 비추는 작은 연등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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