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덕칼럼] 파로호(破虜湖) 비석

손현덕 기자(ubsohn@mk.co.kr) 2023. 5. 30.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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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를 무찔렀다고
이승만 대통령이 내린 휘호
전기 소중한지 모르는
후손을 꾸짖는 듯하다

화천댐을 찾은 5월의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다. 인근 1178m 고지의 백암산에선 금강산 능선이 보였다. 그 앞쪽으로 임남댐 수문과 호수까지 또렷했다.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북한강은 그렇게 남북의 경계를 뚫고 서해까지 흐른다. 임남댐을 열어 수공(水攻)을 펼칠 것이란 위협에 만든 게 평화의 댐이다. 발전 기능이 없는 평화의 댐을 빼고 우리나라 북한강 수계엔 모두 6개의 댐이 있다. 화천에서부터 팔당까지. 최북단에 있는 화천은 유일한 댐수로식 발전소다. 댐 밑에서 발전을 하는 게 아니라 댐 전방 강 옆으로 수로를 내고 그 아래서 발전을 하는 원리다. 수로의 길이는 약 5㎞, 관의 직경은 6m.

화천발전소의 운명이 기구하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 하루 3000명의 인력을 동원해 완공했다. 위치는 38선 이북이지만 휴전선 남쪽이다. 해방 후에는 북한 소유, 전쟁 후엔 남한 소유다. 전쟁 중 남과 북으로 주인이 바뀐 게 각각 세 차례. 그러니까 이곳에서 5번의 격전이 이뤄졌다.

그만큼 절실했다. 전기 때문이었다. 식량은 사오거나 빌릴 수 있으나 전기는 그럴 수 없었다. 75년 전인 1948년 5월 14일. 북한은 남한으로 내려 보내는 전력을 끊는다. 화천발전소였다. 수도 서울이 암흑의 밤을 보냈다. 화천발전소의 용량이 대한민국 전력의 30% 가까이 차지했던 시절, 남한에 화천은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한창인 1951년 4월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에게 화천발전소만은 꼭 탈환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곳에서 어마어마한 전투가 벌어진 이유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으로 시작되는 가곡 '비목'의 탄생지도 바로 여기다.

댐은 겉보기엔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같지만 그 안으로 복도가 있다. 그걸 '검사랑(Inspection Gallery)'이라고 한다. 댐의 각종 시설의 이상 유무를 검사하기 위해 댐 안으로 사람 다니는 통로를 낸 것인데 총길이 440m, 높이 2.5m, 폭 2m다. 당시 댐을 점령하고 있던 중공군들은 한때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그들은 남한이 댐을 결코 폭파시킬 일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중공군이 화천서 수공을 펼칠 것이란 첩보가 입수된다. 댐을 파괴할 순 없고 결국 댐 상단에 있는 수문을 부숴 수위를 낮추는 작전을 세웠다.

암호명 K-841. 댐 뒤로 항공기를 띄워 어뢰를 발사해 물 표면을 따라가다 댐 수문을 격파하는 작전. 육지에서 항공어뢰를 발사한 세계 전쟁사 초유의 일이다.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한국전쟁 중 단 한번의 어뢰 발사이며 배가 아닌 항공기에서 발사한 유일한 어뢰이기도 하다. 성공했다.

1951년 5월 29일 새벽. 유엔군과 우리 국군 6사단은 화천발전소를 최종적으로 탈환한다. 중공군 2만4000명 사살, 포로만 8000명이었다. 한국전쟁사에 길이 남는 빛나는 승리였다. 그게 바로 파로호 전투다. 댐을 세우면 그 뒤로 저수지가 생기게 마련인데 그걸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破虜湖)라 명명했다.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 전쟁이 끝난 1953년 휘호를 내려주고 그 휘호를 새긴 비석(사진)을 세웠다. 화천댐 바로 옆에 세워진 가로 63㎝, 높이 1.6m 크기의 파로호 비석은 미 극동군 사령부가 정보 수집을 위해 조직했던 비정규 첩보조직인 KLO의 전승비와 함께 70년 전 격전의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풍화(風化)작용 탓인가. 대대손손 자랑스러워해야 할 파로호 비석의 모습이 흉하다. 하얀 몸체가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 전기 소중함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나대고 괴담이나 퍼뜨려대는 후손들의 무지몽매를 꾸짖는 듯하다. 어떻게 찾은 발전소인데. 어떻게 얻은 전기인데.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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