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저널리즘] 데이트폭력·교제폭력 용어 대신 연인폭력은 어떨까
한겨레 등 데이트폭력 대신 교제폭력 용어 변경…데이트·교제 사실상 같은 뜻
데이트폭력, 20년 전엔 연인 간에도 폭력 가능하다는 취지로 나온 단어
관계 아닌 가해자 드러내는 '연인폭력', UN·WHO서도 '파트너 폭력' 사용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한겨레가 '데이트폭력'이란 용어 대신 '교제폭력'으로 쓰겠다고 밝혔다. 최근 다수 매체에서 '교제폭력'으로 사용하고 있는 가운데 한겨레가 이를 공식적으로 알린 조치다.
한겨레는 지난 29일 <'데이트폭력' 대신 '교제폭력'이라 쓰겠습니다>란 기사에서 최근 한 여성이 남자친구에게 입은 폭력을 신고하자 조사 받고 10분 만에 살해당한 이른바 '시흥동 살인사건'을 전하면서 '데이트폭력'으로 표기해왔는데 앞으로 '교제폭력'으로 쓰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데이트'와 '교제', 사전적 뜻만 보면 별반 다르지 않은 말로 보인다”면서도 “우리 사회에서 교제라는 말은 '사귄다'는 중립적 어감이 강한 반면, 데이트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낭만적 행위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 뒤 “때문에 사귀던 남녀 간에 벌어진 폭력 사건에 '데이트폭력'이란 표현을 쓰게 되면 사태의 심각성이 축소될 수 있다”고 했다.
한겨레는 여성가족부가 지난해부터 데이트폭력에 더해 교제폭력도 쓰고, 전국언론노동조합 성평등위원회가 지난 3월 발간한 자료에서 데이트폭력 대신 교제폭력을 사용하고 있다고 사례를 들었다. 최근 대다수 매체에서 '교제폭력(교제살인)'으로 표기하고 있고, 일부 매체는 '교제폭력'과 '데이트폭력'을 혼용하고 있다.
연인 사이의 폭력이나 살인을 뜻하는 교제폭력·교제살인은 지난 2020년 11월 오마이뉴스가 '교제살인' 관련 기획기사를 보도하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는 당시 기사 머리 '편집자말'에서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서로 사귀다가 상대를 죽인 사건”이라며 “우리는 '데이트'라는 서정적 단어를 지우고, 이 죽음을 '교제살인'이라 부르기로 했다”고 알렸다.
현재 언론의 평가와 달리 '데이트폭력'은 연인 사이의 폭력이 사적영역의 일이 아니라 공론장에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용한 말이다. 지난 2001년 한국성폭력상담소는 '데이트 폭력 상담실' 홈페이지를 만들고 데이트 폭력을 온라인으로 상담하기 시작했다. 상담소는 데이트 폭력을 '데이트 중 일어난 육체적·언어적 폭력'으로 정의하면서 데이트하는 사이에서도 폭력이 가능하고 관련 고민을 상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2005년 8월 오마이뉴스 기사 <가정 폭력만 있냐? '데이트 폭력'도 있다!>에는 여전히 연인 사이에서 폭력에 둔감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한국여성상담센터 관계자는 기사에서 “데이트 폭력을 폭력이라고 인지하기가 쉽지 않은데 연애 관계에서 성폭력을 성욕 표현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예”라며 “(사귀는) 둘 사이의 다툼이 무엇이 문제냐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처음 의도와 달리 데이트폭력이란 말이 20여년간 사용되면서 그동안 사회적 의미가 다소 달라졌다. 데이트라는 말이 낭만적인 뜻을 담고 있어 폭력의 심각성을 희석하고 데이트폭력이 사적인 영역에서 '사랑싸움' 정도로 인식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진 것이다. 그렇지만 데이트라는 영어를 교제(交際)라는 한자어로 바꾸면 괜찮을까?
'데이트폭력'이란 단어에 대해 문제가 제기된 지점은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다. 데이트하는 관계에서 벌어진 폭력이 사적인 문제로 축소돼 제3자의 개입을 차단하거나 그 관계를 사랑에 기반한 긍정적 이미지로 취급하는 게 문제라면 대체 단어는 이런 문제점을 없애는 방식으로 결정해야 한다.
코로나19가 초창기 '우한폐렴'으로 불렸는데 중국 우한 지역에 책임을 묻는 명명이라는 지적이 나오자 이름을 바꿨고, 세월호 참사도 초반에 '진도 여객선 침몰 사고'로 불리다 사건 현장이 아닌 참사 책임주체를 강조하기 위해 사건명을 바꿨다. 또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는 사건에선 '나영이 사건'이 아닌 가해자를 드러내 '조두순 사건'으로 부르자는 사회적 합의도 있다.
그렇다면 데이트폭력에 대한 명칭 변경에서도 '관계'보다는 '당사자'인 가해자를 부각하는 게 낫기 때문에 '연인폭력', '연인살인'으로 부르는 게 타당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또 연인폭력, 연인살인을 그냥 '폭력' '살인'으로 표현하기에는 연인 간 벌어진 폭력·살인 사건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다른 '폭력' '살인' 사건과는 구분되는 명명이 필요하다.
참고로 유엔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는 '파트너 폭력(Partner Violence)'이고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친밀한 파트너 폭력(Intimate Partner Violence)'다. 여기서 파트너에 가장 가까운 한국 말도 '연인'이다. 결국 이름에서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의 문제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의 문제다.
※ 참고 문헌
장슬기, 그런 말은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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