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월대는 없었다: 가짜역사와 시민 편의

박종인 선임기자 2023. 5. 30.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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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3월 독일인 헤르만 산더가 촬영한 광화문 월대.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월대’는 궁궐의 정전과 같은 중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이다. 조선 왕실은 월대에서 수많은 행사를 했다. 중국 사신 관련 행사를 했고 의례적인 제사도 월대에서 벌였다. 문화재청은 몇 년째 광화문 앞에도 조선시대 내내 월대가 있었다며 ‘광화문 월대’를 복원하겠다고 준비 중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월대’를 검색하면 月臺는 622회, 越臺는 3회 나온다. 모두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건물 앞에 있는 월대다. 광화문 앞에서도 행사가 많았다. 과거도 봤고 잡희(雜戲)도 벌였다. 실록은 행사가 벌어진 곳을 ‘광화문 밖에서(光化門外·광화문외)’라고 기록했다. 월대가 있었다면 ‘월대에서’라고 기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30일 문화재청이 발표한 광화문 월대 추가 발굴조사 결과에서도 광화문 앞에서 천막 설치용 쇠고리가 발굴됐다. 광화문 밖 행사에 왕이 참석해 차양 아래에서 관람했다는 뜻이다. 몇 년째 광화문 앞에도 조선시대 내내 월대가 있었다고 주장해온 문화재청은 이를 끝으로 오는 10월까지 이 월대를 복원할 계획이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보도자료에서 뉘앙스를 바꿨다. 문화재청은 이 쇠고리를 “고종 이전 시기 ‘광화문 앞 공간’을 활용한 물적 증거”라고 했다. ‘월대’라는 단어를 ‘공간’으로 바꿨다. 고종 이전 월대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교란과 파괴가 심하며 민가의 흔적 등도 확인된다”며 “고종연간 월대와 같은 형식의 건축물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다.

세월 탓도 있겠지만, 이는 ‘세종실록’에 예견된 결과다. 1431년 음력 3월 29일 예조판서가 “중국 사신들 출입문인 광화문을 누추하게 놔둘 수 없고 관리들이 말을 내릴 자리가 필요하다”며 광화문 월대 건축을 건의했다. 세종은 “농사철이니 민력(民力·백성)을 동원하지 말라”고 불허했다. 딱 열흘 전 세종은 이 ‘농사철’을 ‘춘분부터 추분까지’로 규정했다. 1431년 춘분과 추분은 대략 음력 2월 8일과 8월 17일이다. 광화문은 민력 동원 금지기간 중인 4월 18일 완성됐다. 이후 어떤 사료, 고문헌과 고지도, 고서화에도 광화문 월대는 1건도 보이지 않는다.

문화재청은 지금까지 ‘월대 건축 금지령’부터 ‘광화문 완성’까지 어느 시점에 월대도 만들었다고 ‘추정’해왔다. 하지만 추정을 뒷받침할 흔적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없는 것이다. 월대는 없었다. ‘공간’만 있었다. 세종이 내린 월대 건축 금지령은 고종이 월대를 지은 1866년까지 400년 넘게 지켜졌다.

1866년 음력 3월 3일 완공된 고종대 월대는 1923년 전차 선로 가설로 사라졌다. 57년 존재했다. 게다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919년 죽을 때까지 경복궁을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광화문 월대가 ‘경복궁에 사는 왕의 권위를 위해’ 존재했던 기간은 완공부터 아관파천까지 30년뿐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백성과 공화국 시민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세종이 월대 건축을 금지한 이유를 다시 보라. 농사에 바쁜 백성을 토목사업에 투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백성 편의가 구조물 건설에 우선한다는 말이다. 문화재청은 왜 시민 편의를 무시하고 있지도 않은 역사를 복원하려 하는가. 한 시간만 월대 공사현장 앞 구불구불 휘어놓은 도로를 관찰해보라. 복잡하기 짝이 없는 차선과 뒤엉킨 채 무한정 대기 중인 차량들을 보라. 이게 57년 동안 백성 위에 군림했던 구조물 복원 대가다. 그리고 후대에 그대로 기록될 역사다.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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