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이라는 탈을 쓰고 살해·폭행…피해자는 속수무책 “교제폭력 법 제정 시급” [사사건건]
30일 경찰청에 따르면 교제폭력으로 검거된 사람은 2016년 8367명에서 지난해 1만2841명으로 늘었다. 연인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이유로 개인사로 치부됐던 교제폭력이 가정폭력·스토킹범죄 등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범죄로 부상한 것이다. 특히 지난 26일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서 발생한 연인 보복살인 사건은 교제폭력 사건의 ‘피해자 보호 사각지대’를 드러냈다. 경찰은 피해자의 폭행 신고로 살인범 김모(33)씨를 23분간 조사하고도 피해자에 대해 적절한 보호 조치를 하지 않았고, 이는 김씨의 보복 살인으로 이어졌다. 경찰은 ‘폭행이 경미했고, 김씨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피해자의 진술을 근거로 단순 연인 간 다툼으로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경기 안산시 단원구에서도 지난 28일 30대 남성 A씨가 교제하던 여성을 살해한 뒤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A씨는 28일 이른 새벽 교제하던 30대 여성 B씨를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다. 그는 B씨를 살해 직후 자신의 누나에게 “사람을 죽였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낸 뒤 흉기로 자해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이 A씨의 누나로부터 신고를 접수하고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 B씨는 거실에 숨져있었으며, A씨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번 연휴 연이은 교제폭력 사건은 현행법상 연인 간 반복되는 범죄 행위에 대해 적절한 피해자 보호 장치가 없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는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다룬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과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과 대조된다. 스토킹처벌법은 피해자 보호를 위해 경찰이 스토킹 가해자를 법원의 영장을 받아 구속하거나, 법원의 잠정 조치를 통해 유치장에 가둘 수 있도록 한다.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격리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 있는 셈이다. 가정폭력처벌법에도 가해자를 가정 구성원의 주거에서 퇴거시키거나 피해자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가 마련돼 있고, 피해 발생 이후 추가 피해 예방을 위한 사후 모니터링 체계도 촘촘하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들을 계기로 연인 사이에 발생하는 폭력 등의 범죄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주은 경찰청 여성청소년안전기획관은 “경찰 여성청소년과에서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폭력 범죄 중 유일하게 교제폭력만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가정폭력처럼 접근금지 명령이나 가해자 분리 조치가 가능하도록 교제폭력 규제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나아가 조 기획관은 “교제폭력은 반의사불벌죄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며 “‘반의사불벌죄’ 적용이 특히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범죄의 예방, 재발방지, 피해자 보호에 있어 어떤 효과를 창출하는지에 대한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피해자가 실제로 처벌을 원치 않는다기 보다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알고 있는 가해자의 이어질 보복이 두려워 처벌불원하는 경우도 있어서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교제폭력을 일반 폭행죄로 처벌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 있다”면서 “가해자에게 피해자 정보가 너무 많이 노출돼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어 “학교, 직장, 동료, 가족에 대한 광범위한 피해가 예상되기 때문에 가정폭력특례법의 가족 구성원의 범위 안에 동거 등의 개념을 추가하는 원포인트 개정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교제폭력 법안들은 20대 국회에 이어 21대 국회에도 상당수 발의돼있지만 논의가 진척되지 않고 있다. 대표적으로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021년 1월11일 대표발의한 가정폭력처벌법 일부개정안은 가족 구성원의 정의에 ‘서로 사귀었거나 사귀고 있는 교제 관계에 있는 자’를 추가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교제폭력’을 정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입법 공백이 지속되고 있다.
승 선임연구위원은 “가정폭력특례법은 결혼 가정뿐 아니라 사실혼과 이혼도 포함한다”며 “가정을 이루고 있고 또 이루었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다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동거하는 사람도 포함한다고 해서 입법 취지에 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입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교제폭력의 범위를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즉 처벌 대상이 명확해야한다는 죄형법주의(명확성의 원칙)에 반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며 “하지만 가해자를 ‘보호처분’하고 피해자를 폭넓게 보호한다면 형벌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죄형법주의와 무관하며, 무엇보다 피해자 보호가 제일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김나현 기자 lapiz@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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