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홀로 해방은 없다

한겨레21 2023. 5. 30.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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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행동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사회… 자책 말고 연합하면 그만큼 해방된다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는 사람들. 박승화 기자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모임에 참석한 시민이 들고 있던 팻말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문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말은 언제부터인가 피해자들의 시위 현장에서 가장 많이 보는 낯익은 문구가 됐다. 이 문구는 이태원 참사를 이야기할 때도 등장했고, 성폭력이나 학교폭력을 폭로하는 자리에도 등장했다. 어떤 사건이건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자리에 가장 중심이 되는 말이었다. 왜 피해자의 모든 ‘호소’는 이 말에서 시작해야 할까?

성장하지 않는 사회가 되면 사람들은 사회를 ‘제로섬게임’(참가자들의 이득과 손실을 모두 합하면 0이 되는 게임)이 일어나는 공간으로 인식한다. 세상에 자원은 한정됐고 내가 차지하지 못하면 남이 차지하고 남이 차지하면 내 몫을 빼앗긴다고 생각한다. 가장 예민한 자원은 세금이다. 이번 전세사기 사건에 대한 국가의 공식 입장과 일부 여론은 사적 피해에 정부가 세금으로 직접 구제하는 선례를 남길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의 선택에 왜 소중한 세금을?

세금은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다. 세금을 거론하며 피해 구제에 반대하는 말을 보면 도덕 담론임을 알 수 있다. 세금 문제가 첨예해지면 도덕의 정의도 바뀐다. 공동체의 자원을 낭비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비난받아야 하는 잘못이 된다. 이를 잘 파악해 활용한 사례가 후천성면역결핍증(HIV/AIDS) 감염인에 대한 보수 개신교인들의 비난이다. 과거에 보수 개신교인들은 HIV/AIDS 감염인 다수가 남성 동성애자라는 점에서 그들을 자신이 믿는 신의 질서에 반하는 자들이라는 관점에서 ‘죄인’이라고 불렀다.

사회가 다원화함에 따라 이런 보수적 비난이 잘 먹히지 않자, 비난의 초점은 그들을 위해 세금이 쓰인다는 것으로 옮겨갔다. 개인이 좋아서 한 ‘위험한’ 행동으로 질병에 걸렸는데 왜 국가의 자원을 투여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신 앞에 죄지은 것이 아니라, 동료 시민에게 민폐를 끼치는 죄를 짓는 것이 된다. 그들에 대한 비난은 행위의 도덕성에 관한 판단이 아니라 행위에 ‘책임’지는 문제에서 생긴다.

한마디로 개인의 사적 행위로 벌어진 일에는 사적으로 책임지라는 것이다. 공적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것이 ‘공적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공동체에 자원을 낭비하게 하는 민폐 행위이고,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감당하지 않는 나약하고 비겁한 행위로 여겨진다. 특히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 나약한 자들은 자신의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고 이들에 의해 사회는 타락하고 민주주의는 부패한다. 사람을 더 나약하고 의존적으로 만드는 안이하고 타락한 제도를 도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는 바로 이런 사회의 흐름에 절박하게 대응하는 말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홀로 감당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도덕이자 명령인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기당한 것도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집을 계약하고 살기로 ‘선택’한 개인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문제다.

그렇기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것처럼 매 순간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내 대처 능력을 초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아무리 자세하게 알아보고 꼼꼼하게 점검하더라도 모든 선택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다. 이 빈틈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어리석음’이다. 만일 그 빈틈으로 이번 전세사기 같은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이 발생한다면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는 개인에게는 ‘불운의 치욕’만이 남는다. 개인에게는 경제적 파산과 함께 ‘어리석은 자’라는 치욕스러운 도덕적 파산이 함께 내려지는 것이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 대책위원회와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3일 국회 앞에서 법안소위를 통과한 특별법안에 피해자 인정범위 확대와 최우선변제금도 받지 못하는 피해자들에 대한 보증금 회수 방안 포함 마련을 담은 `제대로 된 특별법 처리 촉구\' 서명을 국회에 전달하려다 경찰에 제지 당하자 앉아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누칼협’ 무사유 드러내는 상투어

‘누칼협’(‘누가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나’의 줄임말)이란 말은 개인이 어떤 행위에 전적으로 책임지고 어떤 행위에 대해서는 공동체에 도움을 요청해도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누가 칼 들고 위협한 게 아니라면 개인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생명을 담보로 한 협박이 아니라면 그 행위자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모든 선택에는 위험이 따르고, 행위자는 그 위험을 알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우만의 말처럼 우리는 날마다 삶의 도전에 대처하는 능력을 시험당한다.

이 시험에서 탈락하는 자들로부터 지켜야 하는 것이 ‘자유’다. 이 ‘능력 없는’ 자들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며 공동체에 손 벌리면서 그것이 자신의 ‘권리’라고 주장한다. 자유를 ‘포기한’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공동체를 타락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이 시대는 이 능력 없는 자들로부터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의 적은 자유주의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나약한 자들이다.

‘누칼협’이란 말의 효능감은 여기에 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말하는 자는 자신을 저 나약한 자들의 반대편, 즉 행동에 전적으로 책임지며 자유를 지키는 ‘강인한’ 사람의 위치에 둔다. 실제로 그러한가는 중요하지 않다. 위치의 힘은 강력하다. 위치가 말하고 그 말하는 위치가 바로 ‘나’라는 기분을 들게 한다. 자신이 자유인이라고 강력하게 느끼는 효능감이 있는 곳이 이 위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하는 순간부터 화자의 무사유, 즉 자기 생각 없음을 드러내는 상투어가 돼버림에도 말이다.

이 ‘무사유’에 맞서는 말이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이다. 이 말은 책임을 비겁하게 사회에 미루라는 것이 아니다. 나약하게 공적 자원에 의지하라는 말도 아니다. 극단적 선택을 막으려는 절박한 호소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유=선택+책임’이란 이름으로 가해지는 시대의 죽음-명령을 직시하고 맞서 죽음이 아니라 삶을 선택하라는 자유의 명령, 삶-명령이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사유하라고 명령한다. 그 잘못을 고쳐 반복되는 죽음을 막으라는 삶-명령이다.

삶-명령은 인간이 선택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한다. 삶이다. 우리는 죽음을 명령하는 사회에서 삶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기에 무엇이 죽음-명령인지를 사유하고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 몫까지 살아라”는 말은 삶-명령이 아니라 죽음-명령이다. 저 말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몫’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몫’으로 살아야 하므로 ‘나’는 죽어야 한다. 그렇기에 저 말은 ‘살아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죽음-명령이다.

‘홀로 자유’가 아니라 ‘연합해 해방되기’

삶-명령은 그저 목숨을 부지하라는 말이 아니라 언제나 ‘나’로 살라는 강력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나’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유해야 한다. 남을 나약한 자라고 비난하는 위치에 ‘나’를 두고 그 위치의 효능감에 젖어 내가 자유인이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다르다. ‘나’가 된다는 것, ‘나’의 독립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지 사유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놀랍게도 인간은 연합하는 것을 통해서만 해방된-자유로운 존재가 된다고 말한다. 연합에서 떨어져나가 ‘홀로’ 되는 것이 해방-자유가 아니다. 인간은 타인과 연합함으로써, 다양하게 연합하는 것을 통해 해방하는 힘을 획득하며 자신이 연합하는 존재들로부터도 해방된다. 자유의 이름으로 동시대에 포획당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자유다. 연합을 구축해 새 흐름을 만들어내는 힘, 그 힘이 모두를 자유롭게 한다.

위기가 올수록 더 적극적으로 연합을 구축해야 하는 이유는 연합을 통해서만 위기를 돌파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새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연합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라투르를 소개하는 서울대 사회학과 김홍중 교수의 말을 따른다면 “독립한 만큼 연결되어 있고 연결된 만큼 독자적이다”. 역시 그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관계성의 최대치에서 독립성의 최대치가 발현된다. ‘나’라는 존재는 거기에 있다. 연합에서 뚝 떨어져나와 홀로 감당하는 저 자유주의적 죽음-명령의 비장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연결과 연합을 통해 이야기의 흐름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 그만큼이 내 독립성이 된다. 사태의 흐름이 바뀌는 이 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이야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대로 흘러가는 이야기의 흐름에 변화가 가해져 태어난다. 비슷하지만 같지 않고 흐름이 바뀌기에 생동감이 넘치는 독자적인 것으로서 ‘나’의 삶이 된다. 이것이 ‘나’로 살아가라는 삶-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는 명령한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는 우리에게 명령한다. 자책하는 것을 그만두고 삶을 선택하라고. 그리고 삶을 선택했다면 죽음-명령에 맞서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라고 말한다. 흐름을 바꾸기 위해 연합한 만큼 새로운 이야기를 쓰게 되고, 그 이야기만큼 나는 ‘나’가 되는 것이며, ‘우리’는 이 시대로부터 서로를 해방해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서로 팻말을 들자.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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