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못 믿어도 그의 말은 믿을 수 있다”는 앵커맨의 3가지 비결 [송의달 LIVE]

송의달 에디터 2023. 5. 30.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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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방송 저널리즘의 제왕, 월터 크롱카이트 탐구 [미디어 프리즘]

6세부터 언론의 매력에 빠져 신문·통신, 라디오를 거쳐 TV방송에서 재능을 활짝 꽃피운 언론인이 있습니다. 미국 현역 대통령 2명의 운명을 바꾼 그는 웬만한 정치인들 보다 높은 인기와 신뢰, 사랑을 받았습니다.

월터 크롱카이트가 1981년 3월 6일 저녁 고별 방송 직전 자신의 사무실에서 전화통화하고 있다. 그의 의자 뒤편에 그가 받은 에미상 트로피와 미키 마우스 만화가 보인다. 크롱카이트는 생전에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사람'으로 꼽혔다./AP

심지어 “대통령은 못 믿어도 그의 말은 믿을 수 있다”는 찬사(讚辭)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타 대우’를 사양했고 구식(舊式) 언론인이길 고집하며 이에 만족했습니다. 그러면서 ‘방송계의 퓰리처상(賞)’인 피바디상(The Peabody Awards)을 네 차례 받았습니다.

◇방송계의 퓰리처상 4번 수상...13년간 시청률 1위

1916년 미국 미주리주에서 태어나 2009년 92세로 세상을 뜬 월터 크롱카이트(Cronkite) 얘기입니다. 1962년부터 CBS방송 저녁 뉴스 앵커를 맡은 그는 1968년부터 1981년까지 13년 연속 전국 시청률 1위를 질주하며 TV저널리즘 전성 시대를 열었습니다.

예리하면서도 친절해 보이는 눈매에 잘 다듬은 콧수염을 길러 ‘월터 아저씨(Uncle Walter)’로 불린 크롱카이트에 대해 ABC뉴스의 메인 앵커 찰스 깁슨(Charles Gib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월터 크롱카이트가 태어난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 조셉에 있는 '미주리 웨스턴 주립' 대학은 2013년 11월 4일 월터 크롱카이트 기념홀을 개관했다. 크롱카이트의 97번째 생일이었다. 사진은 기념홀에서 열린 강연회 모습/Cronkite Memorial Hall

“그는 방송 저널리즘의 황금 기준(gold standard)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의 객관성(objectivity)과 공정성(even-handedness), 뉴스 판단은 항상 위대한 모범이었다.”

그는 무엇이 남달랐길래 지금도 세계 방송 저널리즘의 제왕(帝王)이자 표상(表象)이 되고 있는 걸까요?

월터 크롱카이트의 흉상(胸像)/Wikipedia

◇①높은 전문 직업주의

범인(凡人)과는 차원이 다른 높은 전문 직업주의(professionalism)가 첫 번째입니다. 1968년 11월 리처드 닉슨과 휴버트 험프리 간의 대통령 선거 표(票) 차이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근소해 개표 실황 방송이 15시간 넘게 이어졌습니다.

중계하던 CBS팀과 기자들은 지쳐서 대부분 사무실을 빠져나갔지만 크롱카이트는 17시간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카메라 앞에서 뉴스를 연속 진행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철의 바지(Iron Pants)를 입은 사람’으로 불렸습니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당시, 크롱카이트는 18시간 중계하다가 6시간 잠을 잔 뒤 앵커석에서 다시 9시간 동안 더 일하는 초인적 의지(意志)와 체력을 보였습니다. 용광로 같은 열정과 끈기, 전문적인 직업정신의 발현입니다.

1969년 7월 20일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미국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 버즈 올드린이 미국 국기인 성조기(星條旗)에 경례하고 있다./NASA.

1963년 11월 22일 오후 2시쯤 존 F. 케네디 대통령 피격 특종(特種)은 언제나 자기 데스크에 앉아 점심 식사를 하던 크롱카이트에게 찾아온 행운이었습니다. 그는 30분쯤후 케네디의 사망 소식을 눈물로 전하면서 수 백만명의 시청자와 동료 방송인들에게 ‘크롱카이트 신화(神話)’를 예고했습니다.

이어 1968년 2월 27일 크롱카이트는 베트남 전쟁 현장에서 ‘베트남으로부터의 리포트 :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왜?(Report from Vietnam : Who, What, When, Where, Why?)’라는 특집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이 보도 이후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내 지지 여론은 차갑게 식었고 곧이어 린든 존슨 대통령은 재선 출마 포기를 선언했습니다. 존슨은 “크롱카이트를 잃는 것은 미국의 중산층을 모두 잃은 것(If I’ve lost Cronkite, I’ve lost Middle America)”이라고 했습니다.

이 보도를 계기로 크롱카이트가 앵커를 맡은 CBS 저녁 뉴스(Evening News)는 그전까지 부동(不動)의 1위이던 NBC의 ‘헌틀리-브링클리 리포트(Huntley-Brinkley Report)’를 제치고 그해 시청률 1위에 올라섰습니다.

1967년까지 미국 방송 뉴스 사상 최고 시청율을 기록했던 NBC 방송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 '헌틀리-브링클리 리포트' 모습. 쳇 헌틀리(왼쪽)과 데이비드 브링클리 두 명의 남자 앵커가 진행했다./NBC

◇존슨, 닉슨 등 대통령 두 명 퇴진시켜

1972년 10월 27일과 31일에는 워터게이트 사건 특별 보도를 각각 14분, 8분씩 내보냈습니다. 총 30분의 저녁 뉴스 시간 가운데 뉴스 보도시간은 광고 7분을 뺀 23분이었고, 모든 뉴스는 ‘2분’의 시간 제한을 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파격’이었습니다.

더욱이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백악관의 개입을 보여주는 증거나 영상자료가 전무(全無)한 상황에서 이 보도는 도박에 가까운 결단이었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하야(下野)를 촉발하는 결정적인 도화선(導火線)으로 작용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단독 보도해온 워싱턴포스트의 벤 브래들리 편집인은 “하늘의 축복(a kind of blessing)”이라며 크롱카이트의 뉴스를 반겼습니다.

1962년 저녁 뉴스 앵커를 맡으면서 보도본부장(managing editor)을 겸한 그는 방송 뉴스의 편집과 취재 관련 전권(全權)을 휘두른 최초의 방송인이었습니다. 크롱카이트는 보통 오전 10시 사무실에 도착해 미국 동부시간 오후 6시30분 시작되는 생방송 직전까지 책임 PD, 3명의 원고 담당자들과 방송 아이템과 원고를 완벽하게 다듬고 준비했습니다.

◇종군기자로 단련...精選된 문장에 최선

그는 뉴스 전달시 1분당 단어가 124개를 넘지 않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켰습니다. 일반적인 미국인의 말하는 속도가 분당 165단어, 말이 빠른 사람은 200단어 안팎인 사실을 감안하면 매우 적은 편입니다. 124단어로 최대 200단어 분량의 내용을 전하기 위해 그는 압축되고 정선(精選)된 문장·표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크롱카이트는 평범한 앵커가 아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전장(戰場)에서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담금질된 기자 출신이었습니다. 26세이던 1942년 UP통신 종군기자로 런던에 파견된 그는 독일군의 공습과 북아프리카 침공 현장 취재는 물론 미 공군 B-­17폭격기의 공습 작전에 동승했고 50구경 기관총을 쏘았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미군 폭격기 앞에서 월터 크롱카이트(맨 오른쪽)가 서 있다. CBS 프로듀서(PD)로 있는 월터 크롱카이트 4세가 할아버지인 월터 크롱카이트의 2차 세계대전 종군기자 활동 상황과 편지 등을 묶어 2013년 발간한 책의 표지이다./Amazon

그는 폴란드 낙하산 투하 작전에선 병사들과 함께 비행기에서 뛰어 내렸고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선두에서 뛰었습니다. 종전 후 뉘른베르크 전범(戰犯) 재판 등을 취재하고 1946년부터 2년간 모스크바 지국장으로 일하면서 크롱카이트는 객관적인 사실 보도의 중요성과 가치를 더 깊이 각인(刻印)했습니다.

◇②삶 전체가 뼛속 언론인

크롱카이트는 1996년 낸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는 소년 시절부터 책과 잡지, 신문 읽기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그는 여섯 살때인 1923년 워렌 하딩 미국 대통령의 급사(急死) 소식을 1면 전체에 보도한 ‘캔사스 시티 타임스’ 신문을 이웃 마을로 배달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9세부터는 매주 토요일 ‘캔사스 시티 스타’ 신문사에 가서 일요일판 신문을 받아와 행상(行商)으로 팔았습니다. 11세에 텍사스주 휴스턴으로 이사 간 그는 청소년기를 학교 신문기자로 보냈습니다. 고교 시절 그는 프레드 버니(Fred Birney)라는 신문기자 출신의 순회교사의 영향으로 언론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정했습니다.

월터 크롱카이트가 80세이던 1996년에 내놓은 자신의 개인 회고록/Amazon

“나는 버니가 지정해준 모든 책은 물론이고 고교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는 저널리즘과 언론인에 관한 모든 책들을 걸신(乞神)들린 듯 읽었다.”

고교 교내 신문의 스포츠 부문 편집장을 맡았던 그는 텍사스주(州) 고교생 기사 작성 대회에서 우승했고 ‘휴스턴 포스트’의 배달 사원 겸 객원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나는 신문제작자들과 독자들 사이에 신성한 협약이 존재하며, 언론인들은 정확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습니다.

텍사스대학에 입학한 크롱카이트는 학보(學報)사 기자가 돼 전공 공부 보다 저널리즘의 바다에 더 깊이 빠졌습니다. 2학년을 마치고 중퇴한 그는 1935년 지역신문 기자를 거쳐 캔사스시티 소재 KCMO 라디오방송에서 미식축구 중계방송 아나운서 겸 스포츠 기자가 됐습니다.

◇중·고·대 학보 기자...신문·통신사 거쳐

20대 초반부터 숨가쁜 사회 생활을 한 크롱카이트는 한때 과로와 수면 부족으로 늑막염을 앓았지만, 언론인의 삶을 만끽하며 행복해 했습니다. UP통신사 기자와 미국 중서부주(州)들의 라디오 방송사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 그는 34세이던 1950년 CBS에 스카웃됐습니다.

월터 크롱카이트(왼쪽)가 1963년 9월 CBS Evening News를 기존 15분에서 30분으로 늘린 직후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인터뷰하고 있다. 이 인터뷰는 두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됐다.
1981년 3월 3일 월터 크롱카이트(오른쪽)가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리셉션 룸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인터뷰하기에 앞서 악수하려 하고 있다./Wikipedia

여기서 크롱카이트는 1952년 민주당과 공화당 대통령 선거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 대회 보도로 ‘뉴스의 중심 진행자’를 뜻하는 ‘앵커맨(anchorman)’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에 ‘You Are There’ ‘The Morning Show’ ‘Man of the Week’ 같은 시사·다큐멘터리 프로를 진행하면서 그는 차분함과 뛰어난 언어 구사력으로 호평받았습니다.

1981년 3월 6일 크롱카이트의 마지막 고별 방송은 약 3600만명이 시청해 미국 방송뉴스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는 같은 방송사 후임 앵커인 댄 래더(Dan Rather)의 2005년 고별 방송 시청자가 1000만명을 밑돈 것과 대비됩니다.

◇정년 퇴임 고별 방송 3600만명 시청

활자(活字) 저널리즘에서 출발한 그가 방송(放送)에서도 성공한 데는 종군기자 시절 혹독할 정도로 단련한 기본기(基本技)와 승부욕·열정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언론인 출신의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은 저서 <The Powers That Be>에서 크롱카이트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는 훌륭하고 용감하며 어떤 면에선 무모한 기자였다. 2차 세계대전 중 최고의 종군기자 중 한 명이었고, 방송인이 돼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면밀하게 준비했다. 그는 TV가 요구하는 특별한 자질, 즉 ‘시청자 감각’을 갖고 있었다.”

월터 크롱카이트의 생애와 업적을 소개하는 글/Cronkite Memorial Hall

크롱카이트는 1970년대에 수 백만달러의 연봉(年俸)을 받았습니다. ‘타임(TIME)’ 표지 인물로 등장했고 ‘플레이보이(Playboy)’지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은 그는 1974년 TV시리즈 ‘메리 타일러 무어쇼(The Mary Tyler Moore Show)’에 출연한 방송계의 ‘스타’였습니다.

◇③언론인으로서 자부심

1972년 여론조사기업인 올리버 퀘일&컴퍼니(Oliver Quayle & Company)가 실시한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물(the most trusted man in America)’ 조사에서 크롱카이트는 73%를 얻어 모든 정치인·학자 등을 제치고 1위로 꼽혔습니다. 그해 미국에선 ‘월터 크롱카이트 팬 클럽(Fan Club)’이 결성됐습니다.

그의 높은 지명도를 노려 공화·민주당은 그에게 연방 상원의원, 주지사 또는 부통령 후보로 출마해 달라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그때마다 크롱카이트의 대답은 ‘노(No)’였습니다. 그는 이유를 두 가지 꼽았습니다.

1966년 10월 14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 표지인물로 실린 월터 크롱카이트/TIME

하나는 자신의 정치 입문이 그가 평생 몸담은 ‘기자(記者)’라는 직업을 욕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내가 정치를 하기위해 기자를 했다고 생각하는 게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기자’라는 직업이 정치적 성공을 위한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고 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언론계 후배들에게 누(累)가 될 수 있어서였습니다. 그가 정계로 진출하면, 시청자들은 방송에 종사하는 후배 기자들을 그런 색안경을 쓰고 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언론인에 대한 신뢰도 추락과 저널리즘의 독립성 훼손이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이재경 이화여대 저널리즘 교육원장은 “전문직 문화와 기자 제도가 많이 다르지만, 크롱카이트의 확고한 언론 철학은 한국의 정계와 언론인 관계를 되돌아보게 한다”고 했습니다.

◇정계 진출 거절하고 ‘방송인 인생 2막’

크롱카이트는 그 대신 1981년 65세에 은퇴한 뒤에도 20년 넘게 방송인으로서 ‘인생 2막’을 살았습니다. 신디케이트 컬럼니스트와 CBS이사회 이사(理事), CBS·CNN·NPR의 특별기자로서 현장 취재와 프로그램 제작, 방송사 경영에 참여했습니다.

미국 미주리 웨스턴 주립대학 컴퍼스 내 '월터 크롱카이트 기념홀'에 있는 동판(銅板)/Cronkite Memorial Hall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월터 크롱카이트의 우주(Walter Cronkite’s Universe)’라는 과학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1983년에는 영국 총선 현장 취재를 했습니다. 1998년 제작해 26개국에 번역판매된 ‘실리콘 밸리: 100년의 르네상스’를 포함해 60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습니다. 1985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공영방송 PBS의 ‘비엔나 신년 콘서트’ 진행도 맡았습니다.

크롱카이트는 “뉴스 전달자, 앵커맨이며 뉴스 편집권자이지만 해설가나 분석가는 아니다”라면서도 기계적, 형식적 중립이란 객관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알 필요가 있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저널리즘”이라고 믿었습니다.

1968년 2월 베트남 전쟁 특별 보도와 1972년 10월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로 두 명의 대통령을 불명예 퇴진시킨 것은 그의 이러한 신념의 힘입니다. 크롱카이트는 언론인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로 “첫째도 정확성, 둘째도 정확성, 셋째도 정확성”이라고 했습니다.

◇“정확성이 생명”...책임·헌신의 삶

월터 크롱카이트는 1950년부터 CBS에 몸담았다. 사진은 그의 사망후 CBS가 제작한 크롱카이트 추모 특집 기획 포스터/CBS 

여기에 언론인이란 직업에 대해 높은 자부심과 철저한 전문직주의는 그만의 불멸(不滅)의 트레이드 마크(trade mark)입니다.

그는 매번 저녁뉴스 맨 마지막에 “And that’s the way it is(’세상은 그런 겁니다’라는 뜻)”와 그날 날짜, 자기 이름을 순서대로 얘기하면서 마쳤습니다. 이는 평생 ‘사실의 객관적인 기록자’로 산 그의 책임감과 헌신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정치적 편파·편향 방송 논란이 끊이지 않는 우리 사회는 언제쯤 월터 크롱카이트처럼, 온 국민이 믿고 사랑하며 롤 모델(role model)이 되는 방송인을 가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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