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차례 남북정상회담, 평화 손잡았지만 냉전 벽 못넘어
③ 한반도 평화 시시포스의 고투
남과 북은 전쟁을 멈추고(정전) 70년이 흐르는 동안 모두 다섯 차례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정상회담은 전쟁과 분단이 불 지핀 갈등과 적대를 화해와 협력으로 감싸 ‘평화번영의 한반도’를 이루려는 애씀의 고갱이다.
그러나 남과 북은 다섯 차례의 정상회담으로도 ‘평화번영의 한반도’로 나아갈 결정적 돌파구를 열지 못했다. 정상이 눈앞에 보일 때쯤이면 어김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어떨 땐 출발점보다 더 뒤로 밀리기도 했다. ‘북핵 문제’ 또는 ‘북-미 적대 관계’라 불리는 덫을 피하지 못했고, 때론 남의 정권교체와 북의 ‘3대 세습’ 등의 여파로 ‘국내 정치적 악용’의 돌팔매에 피를 흘렸다.
하여 지난 다섯 차례 남북정상회담은 시시포스의 고투와 다르지 않다. 헛힘 쓰기는 아니었다. ‘평화번영의 한반도’로 가는 여정을 가로막는 모든 걸림돌은 그 외양이 어떠하든 ‘한반도 임시군사정전체제’라 불리는 한반도 냉전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 시시포스한테 ‘포기’가 없듯이, ‘평화번영의 한반도’로 가는 여정도 멈추지 않는다. 그 여정이 가속 페달을 밟을 때쯤 여섯번째 남북정상회담의 문이 열릴 것이다.
2000년 6월13일. ‘대한민국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가 처음 만난 날이다. 분단 52년, 정전 47년 만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을 떠나며 “남북정상회담은 만난다는 그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평양에 도착해선 “반세기 동안 쌓인 한을 한꺼번에 풀 수는 없을 것”이라며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남북 정상의 첫 마주 앉음은, ‘3년의 전쟁’과 그 후 47년의 갈등·적대의 역사에 견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첫 남북 정상 합의문은 단출하다. 여덟개 문장에, 553자(본문 기준)가 전부다. 하지만 그 의미는 ‘역사적’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심대하다. 김대중·김정일의 ‘6·15 남북공동선언’의 알짬은 2항이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이 어려운 문장의 뜻을 풀면 이렇다. 통일 방안을 두고 이전처럼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며 체제 경쟁과 이데올로기 투쟁을 하지 않겠다, ‘나도 옳고 너도 옳으니 다름보다 같음에 주목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연방제로 즉각 통일하자는 게 아니다. 그건 냉전시대에 하던 얘기”라며 “완전 통일까지는 앞으로 40년, 50년이 걸릴 것”이라고 못박았다. ‘통일은 나 죽은 뒤의 일’이라는 말이다. “당면 목표는 통일보다 냉전 종식과 평화 정착”이라는 김대중의 호소(2000년 3월9일 베를린 선언)에 호응한 것이다.
첫 정상회담은 거저 이뤄지지 않았다. 옛 소련 해체 등으로 고립돼 ‘농성체제’를 유지해온 북의 불신과 두려움을 눅일 ‘행동’이 절실했다. 김대중 취임 첫해인 1998년 북의 ‘대포동 1호’ 발사와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한껏 치솟던 와중에 결행된 금강산관광 사업(1998년 11월18일 첫 출항)이 대표적이다. 김대중과 함께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작업의 선두에 선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말을 빌리자면, “금융위기와 안보위기까지 겹친 이중적 도전”에 맞서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를 마련하고 “남과 북이 모두 경제 회생의 전기”를 열려는 “일종의 모험”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3대 재난’(경제·에너지·식량난)에 시달리던 남과 북 모두의 ‘평화번영’을 도모할 모험이었다는 얘기다.(2008년 7월11일 관광선이 멈출 때까지 193만4662명이 금강산에 다녀왔다.)
그런데 2001년 1월 취임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북을 이란·이라크와 묶어 “악의 축”으로 규정하곤, ‘레짐 체인지’(정권교체)를 부르짖었다. 한반도 평화가 흔들렸다. 김대중과 김정일은 오히려 2002년 하반기 들어 가속 페달을 밟았다. 경의·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착공식(9월18일), 남북 군사직통전화 개통(9월24일), 북 경제시찰단 방남(10월26일~11월3일), 금강산관광지구 지정(10월23일)과 관광지구법 채택(11월13일), 개성공업지구 지정(11월13일)과 개성공업지구법 채택(11월20일) 등이 전광석화처럼 실행됐고, 때맞춰 사상 첫 북-일 정상회담(9월17일)이 평양에서 열렸다. 마침내 한반도 냉전구조가 해체될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2002년 10월 부시 정부는 특사를 평양에 보내 이른바 ‘고농축 우라늄 핵프로그램’(HEUP) 의혹을 제기하며 ‘제네바 기본합의’ 의무의 이행 중단을 선언했고, 북은 그에 반발해 ‘핵무기의 비확산에 관한 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제2차 북핵위기’가 판도라의 상자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하려던 평화 바람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남북 정상의 두번째 만남은 2007년 10월에야 성사됐다.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이라는 한반도 탈냉전 청사진에 합의하고, 미국의 금융제재에 반발한 북의 1차 핵실험(2006년 10월9일)의 여파를 가까스로 수습하고 나서다.
2007년 10월2일 노무현 대통령은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노무현과 김정일은 10월4일 1998자(본문 기준)로 이뤄진 방대한 합의문(“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10·4 정상선언)을 발표했다. 6·15 공동선언의 4배 분량이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운영 구상이 핵심이다. 노무현의 말을 빌리면, “안보군사 지도 위에 평화경제 지도를 크게 덮어서 평화문제, 공동번영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자”는 방안이다. 남북 청년의 피로 물든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갈등·충돌의 바다를 평화·번영의 바다로 바꿔나가자는 다짐이다. 노무현과 김정일은 남·북·미(+중) 정상의 ‘한반도 종전선언’ 추진에도 합의했다.
그러나 10·4 정상선언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살해됐다. 2008년 출범한 남쪽 이명박 정부가 남북정상선언의 승계·이행을 거부하며 대북 강경 기조로 돌아선 영향이 컸다. 관광객이 북한군의 총에 숨진 일로 2008년 7월11일 금강산관광이 중단됐고,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2월10일 개성공단의 기계가 멈췄다. 그렇게 “잃어버린 11년”이 흘렀다.
2018년 평창겨울올림픽을 마중물 삼아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하려는 에너지가 거세게 분출됐다. 2018년에만 남북 정상이 세 차례 만났다. 4월27일 판문점, 5월26일 판문점, 9월18~20일 평양에서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미 정상의 두 차례 회담을 주선했다.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 2019년 2월27~28일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그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9월18일 문재인을 만나 “역사적인 조미 상봉의 불씨를 문 대통령께서 찾아줬습니다, 다시 한번 사의를 표합니다”라고 했다.
문재인과 김정은은 2018년 세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를 맞바꾸려는 ‘남·북·미 3각 정상 공조’에 힘을 쏟았다. “북한 핵 문제는 북-미 적대관계의 산물이라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나라 안팎 원로들의 진단과 다르지 않은 해법이다. 문재인과 김정은은 그를 통해 동북아의 비대칭탈냉전 해소와 남북관계의 비약적 발전, 곧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와 번영)의 터전”(2018년 ‘9월 평양공동선언’ 5조)으로 가꾸겠다는 ‘원대한 꿈’을 펼쳐 보였다.
문재인과 김정은은 2018년 4월27일 판문점에서 만나 군사분계선에 1953년생 반송을 심고 “평화와 번영을 심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표지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곤 “한반도에 더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라며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4·27 판문점선언)을 함께 발표했다. 노무현과 김정일의 ‘약속’을 이어받아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중) 회담 개최” 추진도 다짐했다. 문재인은 2018년 9월19일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김정은과 10만 평양 시민이 바라보는 가운데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는 5천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제안합니다. 우리 함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갑시다.”
그러나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변심’으로 결렬된 뒤 한반도 정세가 빠르게 역진했다. 2019년 6월30일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이 다시 만났지만 정세 흐름이 바뀌진 않았다.
김정은은 2022년 3월24일 “신형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포-17’형 시험발사”로 2018년 4월21일 선언한 “핵실험·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중지” 약속을 4년 만에 파기했다. 설상가상으로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자 남북 정상은 서로를 “남조선 괴뢰들은 명백한 적” “우리 적은 북한”이라 규정하며 남북관계를 적대관계로 후퇴시켰다. 북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1년 남짓한 기간에 문재인 정부 5년간보다 많은 탄도미사일을 쏘아올렸다. 2022년 10월14일엔 남과 북이 ‘9·19 군사분야 합의’를 동시에 위반했다.
‘전쟁 위험’의 먹구름이 다시 한반도의 하늘을 검게 물들이고 있다. 질문이 절실하다. 어떻게 해야 이 악무한에서 벗어날 수 있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라는 이름의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지도를 김대중과 함께 설계한 임동원(전 통일부 장관)은 이렇게 호소한다. “이제 더는 미루지 말고 남-북, 한-미, 북-미가 이미 합의했고, 중국도 동의한 ‘4자 평화회담’을 열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을 시작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한반도의 4대 핵심과제(북-미 관계 정상화, 비핵화, 평화체제, 남북관계 개선·발전)를 포괄적·단계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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