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보이를 목사로 키워준 ‘부모 같은 미군’… 그의 마지막 함께한 성조기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입력 2023. 5. 30. 03:05 수정 2023. 11. 3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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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75년 기획] [나의 현대사 보물] [7] 김장환 목사
김장환 목사가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미국 유학 보내준 칼 파워스 상사의 관을 덮었던 성조기를 가슴에 안고 있다. 뒤에 보이는 사진은 미국 유학 시절 파워스 상사와 함께 촬영한 모습. 김 목사는 상주처럼 파워스 상사의 장례를 치러드렸고, 그의 관을 감쌌던 성조기를 간직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올해는 대한민국 수립 75주년이다. 이 기간 신생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 세계사에 유례없는 성장을 이룩했다. 그 치열했던 시간을 담은 현대사의 보물(寶物)을 발굴한다. 평범해 보이는 물건에도 개인의 기억과 현대사의 한 장면이 깃들어 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연극배우 손숙, 영화인 신영균, 만화가 이현세, 시인 신달자에 이어 김장환 목사의 ‘보물’ 이야기를 들어본다.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89) 목사의 일생은 한국 현대사의 고난·영광과 겹쳐있다. 경기 화성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김 목사가 한 미군 상사의 무조건적 헌신으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된 사연, 세계적 부흥사였던 빌리 그래함(1918~2018) 목사의 전도 대회 설교 통역을 맡아 세계적 목회자로 주목받고 훗날 세계침례교연맹(BWA) 총회장까지 된 사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대한민국의 역사와 닮은꼴이다.

#미국 유학 보내준 미군 상사의 관을 덮었던 성조기

최근 서울 상수동 극동방송 사옥에서 만난 김 목사는 삼각형으로 접힌 성조기를 가슴에 품고 나타났다. 2013년 칼 파워스(1928~2013) 상사의 장례식 때 관을 감쌌던 성조기였다.

북한에서 극동방송을 청취한 주민이 “찬송가를 받아쓸 수 있게 한 자씩 천천히 불러달라”고 보내온 편지. /극동방송

“(별세) 소식을 듣자마자 큰애(김요셉 목사)를 데리고 날아갔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장례와 하관식까지 다 치러드렸지요. 파워스는 참전 용사이기 때문에 군인들이 와서 장례를 치렀는데 하관한 후에 관에 씌웠던 성조기를 삼각형으로 접더니 ‘이건 당신이 받으라’며 제게 줬어요. 파워스는 장가를 안 갔고, 가족들도 다 돌아가셨거든요.” 파워스에겐 김장환이 상주(喪主)이고 유족 대표였다.

“유 원트 투 고 아메리카(You want to go America)?” 1951년 초 경북 경산의 미군 부대. 허드렛일을 거드는 ‘하우스 보이’ 김장환을 눈여겨보던 칼 파워스 상사가 물었다. “그 정도는 내가 알아들었지. 그렇지만 그냥 하는 인사인 줄 알고 ‘오케이’ 했지.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진짜인 거라. 그땐 겁이 나가지고 ‘안 간다’ 그랬어요.”

파워스는 진지했다. 소년의 어머니를 찾아가 허락도 받았다. 뱃삯은 물론 학비, 기숙사비에 모든 서류까지 초스피드로 유학 준비를 한 덕분에 그해 11월 김장환은 미국행 화물선을 탔다. 그리고 명문 기숙사 고교와 신학대, 대학원까지 8년 동안 파워스의 도움으로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될 수 있었다.

파워스는 여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전한 것도 사립대에 진학할 학비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김장환 소년 뒷바라지에 헌신하느라 자신의 꿈은 포기하고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교사로 지냈다. “자기도 가난했지만 그는 여기저기서 모금해 내 학비를 지원했어요. 그런 경우는 주변에서도 못 봤어요. 그는 기독교 신자도 아니었어요.” 파워스는 김장환이 전국 고교 웅변 대회에서 받아온 최고상인 ‘아이젠하워상(賞)’ 트로피와 부상(副賞) TV를 평생 가보(家寶)이자 자랑거리로 여겼다.

목사가 된 김장환은 파워스를 두 차례 한국으로 초청해 처음 만났던 경산 사과밭 등을 답사했다. 파워스는 김 목사를 통해 신앙을 받아들였고 1979년 이스라엘 요단강에서 김 목사의 집례로 침례를 받았다. 김 목사는 2010년 파워스의 ‘P’와 자신의 ‘K’를 딴 ‘극동PK장학재단’을 설립해 국내외 대학·대학원생 1470여 명에게 장학금 38억원을 지원하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보물이었다.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를 촬영한 대형 사진 앞에 선 김장환 목사. 단상 오른쪽이 설교를 통역하는 김 목사이다. 닷새간 열린 전도대회에는 연인원 320만명이 모였고 한국 개신교계는 하나로 단합했다. 한국 개신교계는 6월 3일 서울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한다. 이 대회에서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가 설교하고 김장환 목사가 대회사를 맡는다. /김지호 기자

#100만 인파 모인 50년 전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 사진

“그때 여의도 5·16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 믿으러 온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가난과 북한의 위협에서 탈피하고픈 마음으로 모인 사람이 많았어요. 세계 최강 미국에서도 제일 유명한 목사가 온다니 ‘한번 구경이나 하자’는 마음도 많았고요. 결과적으로는 기독교 신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계기가 됐지만요. 하나님의 축복이었지요.”

극동방송 사옥 곳곳엔 대형 사진이 걸려있다.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래함 목사 전도 대회’ 모습이다. 한국 개신교계는 1907년 평양대부흥과 함께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를 대부흥의 변곡점으로 본다.

‘북한의 위협’은 과장이 아니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무렵 닉슨 행정부는 1971년 주한 미군 1개 사단을 철수한 데 이어 추가 철수도 계획하고 있었다. 그래함 목사 초청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캐딜락 2대를 의전용으로 그래함 목사에게 내줄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북한은 뜨거운 열기 속에 전도 대회가 진행되자 “미국 무당 불러다 굿판, 푸닥거리했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1973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모습(왼쪽)과 열정적으로 설교를 통역하는 김장환 목사(오른쪽 사진). 김 목사는 "첫날 저녁 날씨가 쌀쌀해서 빌리 그래함 목사는 코트를 걸쳤는데, 나는 설교에 코트를 걸칠 수 없어서 그냥 양복만 입고 통역했다"고 말했다. /극동방송 제공

교통·통신도 원활하지 않던 때였지만 소문은 방방곡곡으로 퍼졌고 ‘구경 열기’는 뜨거웠다. 첫날부터 50만명이 몰려 아현동부터 서울대교(현 마포대교)까지 인파로 채워지면서 ‘기적’은 예고됐다. 매일 10만명씩 참가자가 늘어 마지막 6월 3일 예배에는 117만명이 5·16 광장을 가득 메웠다. 지방에서 8시간씩 기차 타고 올라와 광장 귀퉁이에서 술을 마시며 설교를 듣다가 마지막에 “예수 믿을 사람?”이란 물음에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는 사람도 많다.

개신교 신자를 어림잡아 400만으로 계산하던 시절, 닷새 간의 전도 대회에 연인원 320만명이 모였다. 개신교 신자는 이 전도 대회 이후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해 1980년대를 거치며 1000만 신자 시대를 열었다. 전도 대회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 못지않게 유명해진 사람이 통역을 맡은 김장환 목사이다. 그래함 목사의 한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열정적 제스처와 함께 한국어로 옮긴 김 목사의 통역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었다. 2000년 김 목사가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침례교연맹 총회장이 되는 첫걸음은 이때 시작됐다.

한국 개신교계로서도 처음 치러보는 100만명 집회는 ‘모험’이었지만 광복 이후 교단이 나뉘고 분열하던 한국 개신교계가 전도 대회를 계기로 하나로 단합했다.

개신교계는 오는 6월 3일 서울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 50주년 기념 대회’를 개최한다. 김 목사는 “기념 대회를 통해 한국 교회가 다시 단합하고 부흥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 극동방송 역사관에 전시된 중국 동포 청취자가 보내온 손수건 편지. '생명줄 던저(던져) 구원해 줍소서(주옵소서)'라고 수놓은 손수건을 확대-재현해 전시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북한의 극동방송 청취자가 보내온 편지

김 목사의 ‘현재 진행형 보물’은 북한의 청취자들이 보내오는 편지다.

“하나님의 은혜지요. 우리는 누가 듣는지도 모르고 그저 방송만 하고 있었을 뿐인데, 북한에서 우리 방송을 듣고 신앙을 갖는 사람까지 나온다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극동방송을 청취한 중국과 북한의 동포들이 보내온 편지와 헌금. 왼쪽 상단의 노트 표지에는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쑤인 미제 침략자들을 소멸하라!'로 적혀있다. /극동방송 제공

김 목사는 현직 극동방송 이사장이다. 1973년 아세아방송을 시작으로 1977년 극동방송까지 맡아 공산권 선교 방송을 쉼 없이 이어가고 있다. 제주와 서울 극동방송에 설치된 송출 장비는 북한, 중국, 러시아와 일본, 유럽 일부 국가에서도 청취할 수 있다. 1990년대 한중 수교 이후로는 중국 동포와 북한 청취자들의 감사 편지가 줄을 잇고 있다. 서울과 제주 극동방송 역사관엔 청취자 편지 수백 통이 전시돼 있다.

김 목사의 가슴을 울린 특별한 편지는 “성경과 찬송가를 천천히 한 글자씩 읽어달라”는 사연. 성경과 찬송가 책이 없는 북한에서 청취자들이 심야에 숨죽여 방송을 들으며 성경 구절을 받아 적어 자신들만의 ‘필사 성경’을 만든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성경과 찬송가집을 만들어 방송을 들으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고맙다고 사연을 보내와요.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지요.” 손수건에 실로 ‘생명줄 던저(던져) 구원 줍소서(주옵소서)’라고 수놓은 글귀, 송신 장비 교체를 위해 ‘헌금’을 중국 화폐로 모아서 보내온 편지도 있다. 김장환 목사는 “남북 통일이 되면 바로 북한 10개 도시에 안테나 세우고 복음 방송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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