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시론] 신사임당상, 변화가 필요하지 않은가
며칠 전 신사임당 상 수상 소식이 고인인 큰언니에 관한 기억을 소환하게 한다.
35년생, 터울이 워낙 커 엄마 같은 큰 언니. 다섯 자매 중 맏딸이던 큰언니는 시가 쪽으로는 십남매 맏며느리였다. 그것도 결코 살림이 넉넉지 않은. 교사였던 형부와 시부모를 모시며 살았던 큰언니의 녹록지 않았을 인생살이는 지금 생각해도 숨이 막힐 정도인데 생계를 돕느라 편물 기술을 춘천에서 제일 먼저 익히고 보급하는 한편, 새마을 도 지부장으로 사회활동도 열심히 했다. 모든 일에 적극적이라 한지공예니 손뜨개니 서예니 끊임없이 뭔가 만들었고, 새벽기도에 하루도 안 빠지고 필기하며 듣는 언니를 보면 목사님이 졸리다가도 정신이 번쩍 든다고 하실 정도였다. 아홉 시동생을 다 결혼시키고 1남 2녀도 잘 커서 이름 대면 다 알아주는 대학들에 갔었다.
그 큰언니가 참 기뻐하신 일이 신사임당상 수상이었다. 이제껏 열심히 살아온 삶의 보상이라고 생각됐을까. 가문의 영광이었건만 나는 갖은 어려움을 극복한 언니의 삶이 ‘넉넉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결혼 후에도 친정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환경 아래 주체적 삶을 살고 뛰어난 예술혼을 마음껏 펼친, 조선 제일의 유학자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과는 좀 결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신사임당상은 1975년 제정됐다. 강원도 조례에 ‘50세 이상의 여성으로서 강원도에서 출생했거나 추천일 현재 도에서 5년 이상 거주한 사람, 문화예술 전문분야 또는 그 밖의 영역에서 여성의 자질 향상 및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한 여성, 봉사활동 또는 전문분야에서 주민화합과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한 여성,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모범시민으로 양육한 여성’을 자격요건으로 하고 있다.
이 네가지 항목을 ‘or’가 아니라 ‘and’로 선발하다 보니 내게는 ‘조선시대 여성으로서 자아실현을 추구하고 뛰어난 역량을 갖춘 예술가’로서의 신사임당 이미지보다는 ‘가정과 사회, 모든 일에 능하면서 자식까지 잘 키운 전천후 여성’으로 오버랩 된다. 조건 중 ‘자녀를 모범 시민으로 양육’만 해도 그렇다. 모범 시민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얼핏 본 TV에 며느리를 찾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출연자가 신사임당 수상자였는데 ‘신사임당상을 받으려면 어때야 하는가’를 묻는 말에 ‘자녀교육도, 남편 내조도 잘해야 하고 (남편이) 공무원이면 사무관, 선생이면 교장 정도 이상, 아들은 전문직, 본인도 사회활동을 해야 하고…’라는 설명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저렇게 명확하게 조건이 제시될 수 있을까 하고.
시대가 바뀌었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늘고 결혼 연령도 늦춰지고 있다. 2021년 통계로 결혼한 여성 중 30대가 61.7%, 남성은 30~40대가 70%를 넘는다. 출산율은 2022년 3분기 기준 0.98%이다.
이런 시대에 자녀가 ‘모범 시민’임은 몇 세 이후라야 확인될까? 역대 신사임당상 수상자(24~49회) 평균연령은 72세다. 현재의 결혼·출산율을 볼 때 더 늦춰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강원 여성상의 모델로 제시하고 그 정신을 함양시키고자 하는 신사임당 상’이 새롭게 조명돼 역할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신사임당이 불세출의 훌륭한 여성이다 보니 신사임당상은 서울에서 먼저 제정됐다. 소비자전국연합회가 1969년부터 시상하고 최근에는 9개 분야 예능대회도 부대행사로 열고 있다.
신사임당상은 제정 반세기가 된, 강원도의 대표 여성상으로 ‘자랑스런 강원여성상’보다 훨씬 비중 있게 다뤄진다.
그러나, 유구한 역사라고 해 무조건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24∼49회 수상자를 보면 강릉이 32%를 차지하고, 한명도 배출하지 못한 지역도 18개 시·군 중 11곳이다. 예술분야도 소비자전국연합회의 신사임당 수상자들보다 국한돼 있다. 24~49회까지 서예 부문이 무려 80%이다. 현재 조건으로는 뛰어난 예술성을 갖추고 강원의 위상을 높여도 결혼하지 않았거나 아이가 없으면 원천적으로 받을 기회가 없다. 시대에 맞게 조건을 확대하거나 아예 일부 지역 수상으로 좁히고 강원여성의 도전정신과 역량을 선양할 다른 상을 개발하면 좋겠다.
충청남도의 대표적 여성상으로는 유관순상이 있다. 유관순 열사의 정신과 삶을 시대에 맞도록 구현한 자,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고 사회정의를 실천한 자가 대상이다. 제주특별자치도에는 김만덕상이 있다. 조선시대 막대한 전 재산을 기부해 기근에 시달린 제주민을 살려낸 여성 기업인 김만덕을 기린다. 경북 영양의 ‘장계향 선양상’도 있다. 한글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을 선양하고 그가 활동하던 순례길을 ‘외씨버선길’로 복원해 관광으로도 연결하고 있다.
모두 현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고 보인다. 신사임당상도 현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맞게 재해석되고 탈바꿈돼야 하겠다.
■ 이경순=△전 유봉여중·고등학교 교사 △전 소비자교육중앙회 강원도지부장 △더불어이주민+ 초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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