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살의 세계’를 꼭꼭 숨기지 않아도 괜찮단다, 마지막 어린이들아[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초등학교 6학년, 어른들의 말을 따르기만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날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어찌할 수 없는 지점이 있음을 깨달아가며 직접 부딪혀 나가는 ‘가장 나이 많은 어린이’들이
청소년기라는 새로운 날로 잘 넘어갈 수 있도록 밀어주자, 손가락 하나 정도로 ‘살짝’만
“오늘이 마지막이네.”
강은이 말에 혜윤이가 “그러게”라고 대꾸했다. 내일 졸업식을 하면 학교와는 이별이다. 그런데 우리 학교가 이렇게 작았나. 이제 한 바퀴를 도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아, 마지막 어린이도 끝이구나.”
강은이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지막 어린이?”
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나 6학년 될 때 오빠가 그랬거든. 6학년이 마지막 어린이라고.”
- <열세 살의 걷기 클럽> 178~179면
<열세 살의 걷기 클럽>(김혜정, 사계절, 2023) 에필로그에서 말하듯 6학년은 ‘마지막 어린이’의 날들이다. 동화에서는 종종 열세 살 어린이가 주인공인 이야기들을 만난다. 어린이라고 불리는 마지막 시간을 들여다보고 청소년이라는 새 날들로 잘 넘어갈 수 있도록 등을 ‘살짝’ 밀어주는 이야기들. 두 손을 쭉 뻗어 손바닥을 있는 힘껏 꺾어 등에 딱 붙인 채 온 힘을 다해 미는 게 아니다. 여기서는 ‘살짝’이 중요하다. 걷기 클럽에서 처음 둘레길 등산을 했던 날 강은이가 윤서에게 그랬듯 손가락 하나 정도만 살짝.
그때 강은이가 갑자기 몸을 돌려 내 쪽으로 내려왔다. 강은이는 내 뒤에 서더니 손가락으로 내 등을 밀었다. 뭐 하는 거냐고 물을 힘도 없어서 그냥 두었는데 이상하게 조금씩 움직일 만해졌다.
“오, 왠지 효과 있는데?”
“이게 바로 손가락 하나의 힘이지. 별거 아닌 거 같아도 도움이 된다니까.”
강은이는 계속 내 등을 밀어주었다.
“손가락 하나로도 사람을 살릴 수 있어. 고작 손가락 하나가 아니라니까.”
“그런데 반대 상황도 가능하겠다.”
“반대 상황?”
“절벽에서도 손가락 하나로 밀면 떨어질 거 아냐.”
- <열세 살의 걷기 클럽> 104~105면
사람을 살리는 손가락 하나의 힘에 기운을 얻다가 문득 반대 상황을 상상해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격려와 위로뿐 아니라 상처와 폭력을 주고받는 일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걷기 클럽의 열세 살 어린이들 역시 저마다 가족과 친구 관계에서 그런 일을 겪고 있다. 더군다나 열세 살 어린이의 세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윤서는 가정폭력으로 온몸에 멍이 든 채민을 모른 척할 수 없어 어른에게 알렸는데 아동학대 피해 사실이 밝혀지자 채민은 엄마와 살 수 없게 되었다며 윤서를 원망한다. 강은이는 느린 친구를 괴롭히는 무리에게 맞서 싸우다 서로 몸싸움까지 하면서 자신의 폭력 장면만 담긴 영상 증거와 거짓 증언에 학교폭력 가해자로 몰려 전학 권고를 받는다. 윤서와 강은이 모두 친구를 위해 용기 내어 옳은 일을 했지만 돌아온 건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네가 다 망쳤어”라는 친구의 원망, 그리고 전학 와서도 따라다니는 학교폭력 가해자 꼬리표다.
명쾌한 권선징악의 세계는 어쩌면 열 살 이하 유년기 동생들에게만 주어지고, 열세 살에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것 같다. 어른의 말에 따르기만 하면 모두 해결되는 세계는 이미 지나갔다. 당위보다 자율로 결정해야 할 일이 늘어나고, 거기에는 미처 예상치 못했지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 따라온다. 열세 살의 세계는 도덕 규칙을 지키던 데서 나아가 윤리를 고민하는 세계이며, 힘겨운 윤리적 선택에도 칭찬이나 상, 이익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가는 세계이다.
어찌 보면 험난하달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무사히 시작할 수 있던 건 걷기 클럽 친구들이 서로를 지켜주어서다. 강은이는 자신의 진실을 믿는 친구들 덕분에 당당해질 수 있었다. 고민을 털어놓으며 얻은 조언과 용기로 윤서는 채민에게 편지를 쓰고, 채민에게 자신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답장을 받는다. 열세 살 채민의 세계 또한 엄마가 없으면 자기 인생이 끝날 거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이제 아빠와 새 가족 사이에서 불안하지 않을 정도로 변화했기에 가능했을 거다.
열세 살의 세계를 가장 뚜렷이 보여주었다고 기억하는 첫 작품 하나가 <잃어버린 겨울 방학>(이소완, 봄볕, 2023)이다. ‘할머니의 모자’ ‘만우절 연극’ ‘잃어버린 겨울 방학’ 세 편의 동화가 실린 이 동화집은 2003년 출간되고 절판됐다가 20년 만인 올해 재출간됐다. 유명 작가의 초기작이거나 하는 경우가 아닌데도 오직 작품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우리 창작 동화가 재출간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만큼 많은 독자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나의 20년 전 기억을 소환해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열세 살의 세계다.
‘잃어버린 겨울 방학’은 주인공 영수의 6학년 겨울 방학 이야기다. <열세 살의 걷기 클럽>이 6학년 봄부터 시작해 졸업식 전날까지 ‘마지막 어린이’로 지내는 일 년의 이야기라면 ‘잃어버린 겨울 방학’은 마지막의 마지막 이야기라고 할까. 이 작품은 이제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경계의 마지막 순간을 담는다. 제목과 책 표지의 쓸쓸함에서 짐작되듯 영수가 잃어버리는 건 겨울 방학만이 아니다. 6학년 겨울 방학은 어린이라고 불리는 시기가 영영 닫히는 시간이다. 영수가 아동기와 이별하며 상실한 건 또 무얼까.
아빠와 크게 싸운 다음날 엄마가 며칠 외갓집에 다녀오겠단 쪽지를 남기고 떠나자 영수는 학원을 관두고 방학 내내 만화방에 드나든다. 시간이 흘러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고, 동네 친구는 영수 엄마가 집을 나갔다 하고, 아빠에게 물어도 아빠는 아무 대답이 없다. 결국 영수는 기차, 시외버스 그리고 또 한 번 버스를 갈아타고서야 도착하는 청송 외갓집으로 혼자 나선다. 먼 길을 찾아갔지만 엄마는 영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다음날 새벽 절에 함께 들르고는 서둘러 영수 혼자 서울로 돌아가라고 보낸다. 언제 돌아가겠다는 답도 없이 엄마는 영수에게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딱 한 번만 엄마를 이해해 달라고 부탁한다. 엄마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먼 길을 찾아왔지만 엄마, 아빠 사이에서 영수가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다.
열세 살의 세계는 이렇듯 어쩔 수 없는 삶의 지점이 있음을 알고 받아들이는 세계이기도 하다. 영수와, 열세 살들이 문득 몹시 안쓰러워진다. 유년기 동생들처럼 명확하고 온전한 세계에서 좀 더 머무르게 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러한 어른의 마음으로 제공하는 안전은 안주가 되고 성장을 방해할 뿐이라는 걸 알기에 이내 안쓰러운 마음을 거둔다. 무엇보다 열세 살의 성장은 어찌할 수 없는 삶의 지점들이 결코 무기력과 절망으로 끝나지 않음을 느끼며 다시 한 발짝 내디디는 데서 가능하다고 믿기에 가만히 지켜봐주기로 한다. ‘잃어버린 겨울 방학’의 마지막 문단이자 책 전체의 마지막 장면 역시 열세 살을 그렇게 비춘다.
버스가 출발하자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엄마는 더더욱 미웠다. 하지만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울음도 버스가 청송에서 멀어지자 점점 가라앉았다. 가끔 어깨를 들썩이며 목구멍에서 꺽꺽 하는 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이제 눈물이 펑펑 쏟아지지는 않았다. 창밖으로 풍경이 어지럽게 지나가고 있었다. 겨울 햇살이 버스 유리창을 통해 따뜻하게 들어왔다. 그 햇살을 받으며 영수는 퉁퉁 부은 눈을 감았다.
- <잃어버린 겨울 방학> 182면
6학년 여름 방학 이야기인 <5번 레인>(은소홀, 문학동네, 2020)에서도 또 하나의 열세 살 이야기를 만난다. 이 책에서 열세 살 나루가 어쩔 수 없는 세계와 부딪히는 지점은 <열세 살의 걷기 클럽> <잃어버린 겨울 방학>의 가족 관계, 친구 관계와 좀 달리 자신의 꿈과 능력에 관해서다.
한강초 수영부 에이스인 나루는 유년부 대회에서부터 메달을 따며 두각을 보였고 전국소년체전에서도 메달권을 기대할 정도로 수영을 잘하는 선수다. 그런데 라이벌 초희가 등장하고서는 예선 기록 1위 선수에게 주어지는 4번 레인이 아닌 5번 레인으로 밀려나고 만다. 1등만을 목표로 해온 나루에겐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라’는 교장 선생님의 대회 격려사도,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그런 거 다 끝까지 안 해 본 사람들이 하는 말”(175면)이라는 체조 선수 출신 엄마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결과가 상관이 없으면 최선을 다할 필요도 없을 텐데”(72면)라고 반문하고, 인내의 끝에 열매가 없다 해도 운동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한다.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은 수영 선수 나루에게서 보다 선명히 드러났을 뿐 우리 사회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끊임없이 주입하는 기준이자, 철학이기도 하다. 공부를 잘해서 어떤 직업을 갖거나 돈을 많이 벌기만 하면 너의 온 미래가 꽃길일 거라 믿게 하고는 학대 수준의 학업을 하도록 꽁꽁 묶어둔다. 1등이 꽃길을 보장한다고 말하는 세상에서는 ‘꽃길만 걸으라’는 말이 가시밭길도 있는 삶을 무사히 건너라는 축원보다는 가시밭길을 외면하고 회피하려는 의미에 가깝게 들린다. 우리 삶이 꽃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게 열세 살의 세계인데도 1등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떠밀며 작은 돌부리조차 미리 치워주려 한다. 시행착오와 실패, 그 이후 뒤따를 진정한 성장과 성취의 경험까지 빼앗아간다.
심리학 연구자인 박진영은 청소년 독자를 위한 심리 에세이 <나는 나를 돌봅니다>(우리학교, 2019)에서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극심한 경쟁 때문에 청년 세대의 완벽주의 경향이 증가하고 있으며 완벽주의나 ‘강박적인 열정’은 자존감이나 행복감을 해칠뿐더러 성취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 연구 결과를 근거로 말한다. 과제를 두고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분명 어려움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도중에 어려움을 만나도 쉽게 좌절하지 않고 목표 달성까지 끈기 있는 모습을 보이는 편”(137면)이라고도 한다. 어찌할 수 없는 지점이 있음을 알아가며 직접 부딪히는 열세 살의 세계가 필요한 이유, 열세 살의 세계를 애써 감추거나 숨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 열세 살의 자유와 자율을 더 어린 연령의 어린이에게도 허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겠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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