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송곳처럼 날카롭다”…‘일무’, 이게 바로 K-칼군무 [고승희의 리와인드] 

2023. 5. 29. 15:3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진화하는 전통’ 서울시무용단 ‘일무’
정구호 연출, 김성훈ㆍ김재덕 안무 협업 
의상부터 안무까지 완벽한 미니멀리즘
‘화합’의 메시지 담은 고난도 칼군무 
서울시무용단 ‘일무’ 1막 1장 ‘전혜희문지무는 이 공연의 방향성을 단번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무대의 압도적인 미장센과 오차 없는 군무가 ‘일무’의 정신을 담고 있다. [연합]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무대, 칠흑같이 검은 벽, 음표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이 이어진다. 그 위로 무대보다 더 빛나는 백색의 의복을 갖춘 무용수들이 등장해 임금의 문덕(1막 1장 ‘전혜희문지무’)을 칭송한다. 압도적인 미장센과 오차 없는 오와 열. 시시각각 동선을 바꾸면서도 칼 같이 맞아 떨어지는 질서가 숨막히는 위압감을 준다. ‘일무’의 정신을 고스란히 드러낸 무대. 안무가 김성훈 김재덕은 이 신을 ‘일무’의 명장면으로 꼽았다.

“시작이 전체의 절반을 이야기해주잖아요. 어떤 공연의 형태를 한 번에 보여주는 장면이에요. 거기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강렬하죠.” (김성훈)

‘일무’의 두 안무가와 54명의 무용수들은 첫 장면으로 그 답을 증명했다. K-팝 그룹의 상징인 ‘칼군무’의 원조가 있다면, 바로 여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제례악의 의식 무용 ‘일무’. ‘질서의 미학’을 통해 하나 되는 조화를 만들어낸 명무의 탄생 순간이었다.

서울시무용단은 지난 25~28일까지 사흘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일무’ 공연을 올리며 관객과 만났다. 지난해 5월 초연 당시 유료 관객 5000명을 넘어선 이 작품은 등장과 함께 ‘센세이션’이었다. 일 년 만에 돌아온 무대는 의상, 안무 등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줬다. 조금 더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다. 두 안무가 김성훈 김재덕과 서울시무용단, 이들을 이끌며 ‘일무’의 중심을 잡은 정혜진 서울시무용단 단장, 한국 무용계의 새 흐름을 만든 정구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연출)가 빚어낸 70분은 ‘한국무용의 진화’ 자체였다.

서울시무용단 ‘일무’ [세종문화회관 제공]
의상부터 안무까지 완벽한 조화…‘미니멀리즘’의 완성

올해의 ‘일무’는 구성에서부터 변화가 생겼다. 총 3막이었던 공연은 4막으로 늘었다. 1막 일무연구, 2막 궁중무연구, 3막 죽무, 4막 신일무의 구성이다. 2막에선 ‘가인전목단’은 빠지고 ‘춘앵무’만 남겼다. ‘죽무’는 새롭게 추가된 안무다. 각각의 막은 전통무용과 전통을 재해석해 보여주는 창작 안무로 구성했다. 전통의 움직임에 ‘현대적인 어법’을 더해 두 안무가들이 “미학적으로 멋지다고 생각한 안무”(김재덕)로 완성했다.

‘일무’ 공연은 각각의 요소들이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무대 연출과 조명, 의상, 안무, 음악, 영상 등 이 공연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극한의 미니멀리즘’이다.

무대에서 가장 먼저 압도되는 것은 미장센이다. 정구호 연출의 무대, 의상(소품), 조명, 영상 등은 놀랍도록 스타일리시하다. 이미 국립무용단의 ‘묵향’, ‘향연’, ‘산조’ 등을 통해 한국무용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든 주인공이지만, 소위 말하는 ‘정구호 스타일’은 국내 무용계에서 지난 몇 년 사이 너무 많이 소비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구호 연출은 이번에도 새로운 미학을 보여줬다.

서울시무용단 ‘일무’ [세종문화회관 제공]

군더더기 없이 최소화한 무대는 지극히 현대적이면서도 정갈한 ‘여백의 미학’을 강조한 한국 문화의 뿌리와도 닿아있다. 의상의 색상 역시 과감하지만, 고유의 전통의상을 기반으로 한 현대화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막 ‘전폐희문지무’과 ‘정대업지무’의 의상을 각각 흰색과 주황색으로 바꾼 것도 탁월했다. 주황색 의상을 입고 추는 정대업지무는 화려한 색감과 함께 ‘진보한 전통’을 보여줬다. 전통을 버리지 않았으면서도 지극히 현대적이었고, 무대 곳곳에서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정구호 연출이 추구하는 ‘전통의 재창조’와 진화를 담아낸 무대다.

미니멀한 무대에 완벽히 어우러진 것은 안무와 음악이다. 압도적인 미장센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무대의 미학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기존의 악기 소리로 새로운 소리를 만들며 전통적이면서 현대적인, 소위 ‘하이브리드한 음악’을 완성했다. 미니멀하고 모호한 사운드 위에 완성한 안무는 군더더기 없는 ‘고난도 동작’으로 ‘일무’의 미학을 완성했다.

서울시무용단 ‘일무’ 중 3막 죽무 [세종문화회관 제공]
‘화합’의 메시지 담은 고난도 칼군무…날카롭고 강렬하다

무용수들에겐 흐트러짐 없이 ‘질서’를 맞춰가는 과정 자체가 일무의 정신을 체화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번 작업이 더 어려운 것은 무려 24명의 객원 무용수를 새로 선발해 호흡을 맞췄기 때문이다. 무대에 서는 무용수들은 총 54명이다. 재연임에도 불구하고 초연과 같은 상태로 합을 이뤄낸 셈이다.

안무의 구성상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을 한 호흡 안에서 보여주는 과정은 무용수에게 고도의 집중력과 기량을 요구한다. 호흡, 에너지, 움직임 등 완전히 다른 전통무용과 현대무용의 세계를 쉴새없이 오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몸의 움직임부터 시선과 발의 각도, 어깨의 높이까지 맞춰냈다. 4막 신일무에서 양팔을 들어올린 무용수들의 어깨와 팔높이가 완벽한 수평을 만들어내는 장면, 커다란 소매를 휘저으면서도 옷의 펄럭임까지 계산해 맞춘 장면은 짜릿하기까지 하다. 수시로 대형을 바꾸며 도포자락이 떨어지는 소리조차 음악이 된 1막의 정대업, 근육을 사용한 엄청난 스피드로 합을 이루는 3막의 죽무도 압권이었다.

안무가 김성훈은 “완벽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맺어지는 결실이 있다”며 “단원들에게 머리카락 하나까지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요구했다”고 말했다. ‘일무’의 가장 큰 메시지가 “사람들간의 교류가 멈췄던 팬데믹을 지나 화합의 시대를 보여주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군무의 완성을 위해 무용수들은 반복된 연습으로 수개월을 보냈다. 서울시무용단 박수정 단원은 “앞 사람, 옆 사람, 뒷 사람과 하나가 되기 위해선 나를 내려놓는 인내가 필요하다”며 “완벽의 지점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하나가 되는 에너지와 기운을 담았다”고 했다.

서울시무용단 ‘일무’ 중 4막 신일무 [세종문화회관 제공]

때로는 단순하고 정갈하나, 방심하는 순간 “얼음 송곳처럼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에너제틱한”(김성훈) 춤사위가 객석을 덮친다. ‘신일무’로 접어들면 보다 적극적인 어법으로 현대화한 동작들이 등장한다. 동시대를 감각하는 안무가들을 통해 태어난 춤사위는 미니멀한 음악, 무대와 삼위일체를 이루며 ‘요즘 전통’을 만든다. K-팝 안무부터 스트리트 댄스의 동작까지 엿보인다. 복잡다단한 동작들은 엄청난 속도로 이어진다. 무대 위 무용수들의 팔은 빨리감기를 한 것처럼 물결을 만든다. 그러면서도 한 치의 오차가 없다. 관객과 ‘밀당’하듯 강약의 힘 조절과 쥐었다 놓듯 템포를 조절하며 비트에 몸을 맡긴다. 공연이 끝으로 향해갈 때 무용수들을 하나 둘 숫자를 늘린다. 54명의 무용수들이 무대를 가득 메우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에너지가 쌓여 목적지에 다다르면, 그것 자체로 강렬한 감동을 만들어낸다. 전통과 현대의 충돌과 융합이 빚어낸 한국춤의 품격을 마주하는 무대다.

서울시무용단의 ‘일무’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여러 창작자들이 어우러진 협업이 이룬 성과다. 그러면서 ‘창작무용의 요람’으로 불린 서울시무용단의 저력을 입증한 작품이다.

그간 서울시무용단과 ‘일무’, ‘폴링워터-감괘’, ‘놋’, ‘삼총사’, ‘기기묘묘’ 등 다수의 작품으로 꾸준한 작업을 이어온 김성훈 안무가는 “서울시무용단과 우리가 만나 또 하나의 스타일이 나온 것”이라며 “서울시무용단이 가진 색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간 작품”이라고 말했다. 두 안무가는 정혜진 서울시무용단 단장이 작품의 코어 역할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세 사람은 안무의 큰 틀부터 디테일까지 맞춰가며 모두의 색이 어우러지는 작품을 완성했다. 숨소리까지 맞춘 칼군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무용수들의 치열한 열정이 있기에 가능했다. 박수정 단원은 “기본적으로 (서울시무용단은) 춤에 굶주려 있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이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여 ‘일무’의 주제의식에 가닿았다. 김재덕은 “모두의 화학적 융합이 잘 된 시간”이었다고 돌아봤다.

서울 공연을 마친 ‘일무’는 이제 미국으로 향한다. 링컨센터가 주최하는 여름 축제 ‘서머 포 더 시티’에서 열리는 한국 문화예술 특집 페스티벌 ‘코리안 아츠 위크’ 프로그램 중 하나로 참여, 오는 7월 첫 해외 무대에 선다.

shee@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