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5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이영관 기자 2023. 5. 2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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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4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하는 한국 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월례 독회를 열고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이달 독회 추천작은 2권. 정영선 장편 ‘아무것도 아닌 빛’(강 출판사)과 손보미 소설집 ‘사랑의 꿈’(문학동네)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빛
정영선 소설가
사랑의 꿈
손보미 소설가 / 김봉곤씨 제공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과리·문학평론가

정과리 문학평론가/ 이태경 기자

◊정영선 ‘아무것도 아닌 빛’

정영선의 ‘아무것도 아닌 빛’(강 출판사)은 세목들의 핍진한 묘사로 돋보인다. 빨치산 활동으로 인해 장기수로 복역하고 상시적 감시 속에 살아가는 인물들, 히로시마 피폭에서 생존한 인물, 일본인과 한국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 ‘박탈자’로 살아온 사람 등의 사연들을, 번갈아 소개하고 또한 교차적으로 엮으면서, 전달하고 있는 이 작품은 그런데, 인물들이 겪은 사건들의 적확한 복각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 인물들이 갖는 기억과 감정들과 추리들이 끊임없이 대조되고 복원되고 수정되어 가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주밀하게 좇고 있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심리적 리얼리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속에서 인물들의 마음은 현실에 대한 반영으로서의 상태라기보다 스스로 격렬하게 굽이치는 심리 상황이 된다. 이 심리적 리얼리즘은 그 배경에 놓여 있는 사실의 모호한 리얼리티와 어긋나면서, 독자에게, 그 어긋남에 대한 관찰로부터, 사실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 기억의 추이에 대한 음미, 그리고 그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유발할 차후 행동들에 대한 궁금증들을 북돋고, 이 작품의 전개를 흥미진진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이런 부지런한 마음의 흐름은 꽤 굵고도 팽팽한 긴장의 리듬을 형성하니, 그 위에 올라탄 독자에게 이 작품을 단숨에 읽게 하는 유인력으로 작용한다. 이 점이 이 작품의 최고의 장점이라 할 것이다.

반면, 인물들의 사회적 처지가 사실상 동일하고, 또한 그들의 현실 판단도 모두 엇비슷해서 이미 정해진 주제에 작품의 풍경이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는 것은 이 작품의 약점이라 할 것이다. 누누이 말하는 것이지만, 좋은 작품은 선과 악을 일도양단 식으로 가르는 게 아니라, 선과 악의 스펙트럼의 편이들을 복합적으로 생산하면서, 선한 삶들에 깊이와 넓이를 부여하고, 악들에도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제공한다. 그때 선함에 대한 의지는 악과의 정당한 대결을 개시할 수가 있다. 악을 무조건 악으로 규정하고 비난을 퍼붓는다고 해서 악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로지 악의 극복은 악 그 자신의 합리적 논리의 궤멸과 자기 수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아주 단편화되어 있긴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한 인물 유형에 대한 새로운 버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주목에 값한다. ‘고문자’가 그것이다. 이 작품의 고문자 ‘점박’은, 이창동의 영화 ‘박하사탕’이 도출해낸 생계형이지만 그에 대한 의식이 결여된 ‘생각 없는 고문자’도 아니고, 임철우의 ‘붉은 산, 흰 새’가 고발하는, 따뜻하고 온화한 가장 아버지라는 또 하나의 존재가 덧붙어 있는, ‘분열증자로서의 고문자’도 아니라, ‘참회’의 모습이 그 자체로서 자기 합리화로 기능하여 일상 속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변신한 고문자’이다. 이 고문자의 수는 얼마나 될까, 이 고문자들이 세상 안으로 스며들어 왔을 때, 그 사회적 여파는 무엇일까, 는 우리가 계속해서 탐구해야 할 주제이다.

◊손보미 ‘사랑의 꿈’

손보미는 ‘언어 위악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특이한 문체적 표현들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무난하고 자연스러운 대화의 흐름 속에 문득 특정한 패턴을 형성하는 규격화된 언어들이 튀어나와, 전반적인 말의 흐름과 긴장을 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병든 닭 같아, 너.”

“안녕, 나는 영예은이라고 해. 앞으로 잘 도와줄게.”

이런 말은 일상 대화에서 흔히 쓰는 어법이 아니다. 이는 특정한 대화 상황에서 한 당사자의 말들이 내포하고 있는 심경을 의식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작가에 의해서 구성된 말이다. 이때 발화자의 ‘심경’은 폭력적이며, 발화자의 언어는 점잖다. 첫 번째 문장에서는,

“야! 이 병든 닭아”

라는 고함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게 심경이다. 이를 그대로 텍스트 표면 위로 노출하면 이 말은 매우 자연스러운 말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격한 감정으로 충만한 것이다. 작가가 보기에 발화자는 작중 인물로서 그렇게 거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타인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표출된 문장이 바로 “병든 닭 같아, 너”라는 심드렁한 어조에 실린 얄궂은 비난조의 말이다. 그러니까 ‘언어 위악주의’라고 필자가 지칭한 어법은 언어의 위선성을 도드라지게 느끼는 효과를 낳기 위해 도입된 기술(記述)상의 일탈이라고 볼 수 있다.

언어를 미묘하게 왜곡하는 이 ‘언어 위악주의’는 얼마간 명백한 ‘지향성(intentionality)’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김승옥 소설에서의 ‘위악성’이 4·19의 좌절 이후, 변질된 ‘시민사회’의 다양한 왜곡을 반영했다면, 손보미의 고의적인 언어 왜곡은 현대인들의 자연 언어에 감추어진 고정관념들과 대화의 형식이 형식적으로 공표하고 있는 ‘평화’(대화는 말 그대로 대화자들 간의 화목을 기본 전제로 한다. 말다툼조차도 이 전제가 없으면 대화는 발생하지 않는다)의 위장 속에 감추어진 공격성을 ‘폭로’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언어의 유별난 사용은 이번 소설집, ‘사랑의 꿈’(문학동네)에서 담론 수준(문장을 넘어서 텍스트)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듯하다. 가령 이런 구절을 보자.

외삼촌은 말수가 많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도 별로 없어서 일터가 아니면 집에 머물렀다. 외숙모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는 법도 잘 없었다. 엄마는 수다쟁이는 아니었지만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아빠를 쫓아다니며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졌는데―특히 내가 외삼촌 집으로 오기 한두 달 전에―내 기억에 아빠가 속시원하게 대답한 적은 없었다. 그 기억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한동안 나는 남자 어른들은 말하는 걸 싫어하는 부류인 게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을 정도였다. 엄마는 말로 내뱉을 수 없는 생각이라면 머리와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게 양심이라는 거야!” 외숙모는 수다쟁이였지만 외삼촌의 과묵함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찾아냈는데, 외숙모가 엄마처럼 질문을 던지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숙모는 진정한 수다쟁이였다.

외삼촌 부부와 부모 사이의 다름이 묘사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인용부의 첫 부분은 엉뚱하게도 외삼촌과 엄마를 대비시킨다. 외삼촌은 말이 없고 엄마는 말이 많다. 언뜻 보아 대비 항목들의 관계가 이상하다 싶은데, 뒷부분에 가면 이 대비는 결국 엄마 대 외숙모의 그것으로 귀결된다. 엄마와 외숙모는 둘 다 말이 많다. 그런데 엄마는 수다쟁이가 못 되고, “진정한 수다쟁이”는 외숙모다. 이 규정이 무슨 뜻인지 알려면 외삼촌과 아빠가 공통적으로 과묵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엄마의 말은 주로 질문인데, 이것은 아빠를 괴롭히고 동시에 아빠에게 매달리는 엄마의 심리적 상태를 가리킨다. 반면 외숙모의 수다는 외삼촌과 무관하며, 따라서 이는 외숙모의 독립성을 가리키는 표지이다. 결국 이 대비를 읽게 되면 해당 소설의 주제가 ‘여성의 존재 형상’이며, 그 문제에 대한 탐구의 첫 돌로서 엄마와 외숙모의 대비가 제시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인용부 첫 대목의 외삼촌과 엄마 사이의 엉뚱한 대비는 소설 주제에 대한 이해에 순기능적인가, 역기능적인가? 이해를 위해 필요한 성찰적 과정(통상적인 감정이입적 독서를 넘어서는)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고의로 비튼 장면인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대목들이 한둘이 아니다. 필자는 지금 이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내릴 여유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어휘들의 사용에 민감한 이 작가가, 언어유희의 즐거움을 누리는 동안에, 동일계 내에서의 물질적·정신적 현상들 일체에 어김없이 적용되는 열역학 제 2법칙, 즉 ‘혼잡도 증가’의 법칙에 양보하지를 않기를 바란다.

※ 이 책은 ‘연작 소설집’이라고 지칭되어 있는데, 용어상의 정리가 필요할 듯하다. 연작(連作) 소설은 서양의 roman-cycle, roman cyclique, suites romanesques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서양 문학에서 이 어휘들은, 장편소설들 사이에 사건상의 연결을 이루는 일련의 작품들을 묶어서 지칭할 때 쓰인다. (roman-cycle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프랑스의 비평가 알베르 티보데(Albert Thibaudet)이다). 단편소설이 우세한 한국에서는 사건 연관성이 있는 단편들을 모아 하나의 일관된 드라마를 구성하면서 장편 분량에 다다랐을 때, 그것을 ‘연작 소설집’ 혹은 ‘연작 장편’이라고 불러왔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가 대표적이다. 반면 사건 연관성이 없는 대신 유사한 주제를 공분모로 저마다 다른 사건들을 다룬 단편들을 모은 것은 통상 옴니버스(Omnibus)라 불러 왔다. 손보미의 이 책은 연작소설이라기보다 ‘옴니버스 소설’이라고 부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구효서·소설가

구효서 소설가/김지호 기자

◊정영선 ‘아무것도 아닌 빛’

“엘리베이터를 내려 아파트 밖으로 나가는데 아래층 노인과 마주쳤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길이라며 손에 든 게 뭐냐고 물었다. 꿀이지. 향자는 망설이지 않고 답을 했다. 8단지 사람이 달라고 해서……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하고 현관으로 나가는데 노인이 불렀다. 돌아보기도 전에 머리가 원래 저렇게 셌나, 완전 하얗네, 했다. 향자는 노인의 말을 못 들은 척 그대로 걸어 나갔다. 땅이 조금 젖어 있었다.(188쪽)”

향자가 손에 든 것은 꿀이 아니라 아들의 유해다. 아들은 파혼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끝내 죽었다. 파혼의 원인은 처가의 반대. 반대의 이유는 아버지 동진의 원자병. 이야기는 태평양전쟁 시기의 일본과 히로시마로 소급해야 한다. 그러나 “땅이 조금 젖어 있었다”로 문단이 끝난다.

향자의 눈은 과거로도 미래로도 가지 않는다. 아들의 유해를 들고 내디딘 땅이 조금 젖어 있다는 데 머문다. 소설 전체가 이 짧은 한 문장을 닮았다. 독자의 기대와 예측이 앞서 갈 때 소설은 뒤처지다가 슬쩍 다른 길로 접어든다. 향자는 강 가까운 곳에 다다라 아들의 유해를 뿌린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저 고운 가루는 아들의 어느 부분일까. 피부염이 번지던 허벅지일까, 관절 수술을 받았던 어깨일까. 손에서 흘러내린 뼛가루들이 바위 주변과 물가에 선 나뭇가지에 잠시 머물다가 물살에 밀려 떠내려갔다.(189쪽)”

불행의 기원인 동진의 강제징용과 원폭에 대한 시대적 원한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손 안에 쥔 뼛가루를 내려다보며 향자는 상념에 잠길 뿐이다.

“이건 아들의 어디일까. 머리일까 발가락일까.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도 아는 게 없었다. 아들이 평생 안고 살았을 불안과 외로움은 진짜 몰랐던 것 같았다.(189쪽)”

알 수 없으므로 쉬이 분노하고 슬퍼할 수조차 없는 걸까. 향자와 소설의 분량을 나란히 나눠가진 재석은 신불산 빨치산 출신으로 삼십여 년을 옥살이한 인물이다. 그러나 민족 자주의 신념 하나로 살아온 이 90 노인의 삶을 비추는 작가의 앵글은 향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독하리만큼 차분하고 느린 ‘다다미 숏’이다. 물론 배신(했다고 확신이 드는)한 한때의 동지 박동배의 병상을 칼을 들고 습격하나 그 또한 예상된 실패로 끝나면서 복잡한 여운을 남긴다.

아들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도 아는 게 없었다는 향자의 토로가 있었듯이, 어쩌면 재석의 우울도 70여 년간 지탱해온 자신의 이념적 확신을 차마 스스로 의심하거나 부인할 수 없었던 심정상의 모순에서 기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젊은 날에 세워 평생을 간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신념은 그가 선택한 것이면서 그에게 주어진 것이기도 했으니까. 이처럼 착종된 선택과 부여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그의 몸 안에서 평생 분리되지 못했을뿐더러, 모진 고문과 회유를 이기지 못해 전향할(뻔한) 세계가 양심을 지켜 끝내 구금을 택하는 길보다 낫다고 이 체제는 재석을 설득하지 못했다.

알 수 없었던 게 어찌 아들뿐이었을까. 박동배뿐이었을까. 그 모든 이를 둘러싼 세월과 그것의 흐름, 그리고 그 흐름에 휩쓸린 향자와 재석도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소설은 어쩌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섣불리 안다고 하는 것에 대해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을 것이다. 통시와 공시, 지식과 정보의 굳건한 앎의 좌표축을 세우고 누군가를 그 좌표 안에 위치시키는, 그리하여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혹은 사회적 좌표 값을 수학적으로 도출하는 방식의 문제점.

‘아무것도 아닌 빛’은 외려 좌표축을 허물거나 이동시키거나 늘림으로써, 고정된 좌표축에 가려졌던 인물의 면모를 새살처럼 드러낸다. 굳이 말하자면 모름의 좌표축이라 할 만한 이 추적 장치는 태평양전쟁과 한국 분단사를 다루되 더 깊게는 인간의 허무와 불안, 외로움의 저변을 희미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빛으로 비춘다.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빛이어야 빛인 것이다.

통일된 소설 시점이 빠지기 쉬운 편협/독단의 한계를 버리고 거미줄 같은 시선망을 선보인 것도 인물과 사건에 대한 매몰된 관점을 극구 피하려는 세심한 노력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력이 시점 선택에만 국한한 것은 아니고, 필요할 때 정확한 타이밍을 지켜 여지없이 등장하는 짧은 문장들에도 고스란히 실려 있다. ‘땅이 조금 젖어 있었다’와 같은.

◊손보미 ‘사랑의 꿈’

‘사랑의 꿈’에 실린 여섯 중편 중에 표제작만 화자가 어린 소녀가 아닌 성인 여성이다. 그렇긴 해도 나머지 소설 다섯편 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과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화자가 고집스럽게 성인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사랑의 꿈’에도 다른 다섯편에 등장하는 소녀들과 나이가 비슷한 인물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닌데, 다만 화자인 ‘그녀’의 딸이면서 화자의 인식 대상으로서다. 나머지 다섯편의 화자가 어린 소녀고 그 인식 대상이 어머니를 비롯한 성인들이었던 것에 비하면 전복된 인적 구성이라고 할 만한데 왠지 그래 보이지 않는다.

다른 중편들에서 어머니나 아버지 등의 성인은 질서화된 세계에 어떻게든 순치된 면모를 보이는 데 반해 ‘사랑의 꿈’의 ‘그녀’는 외려 다른 작품들 속의 소녀 화자 쪽을 닮았다. 철들지 않은, 혹은 질서화되지 않고 나이만 먹어 키가 큰 성인 소녀 같다. 그녀는 ‘애들은 정말 성가셔요. 가끔씩은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죠.’라고 하는 공주연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지만 결국 자신의 딸을 산 채로 언 땅에 묻어버린다(실제로 묻히는 것은 그녀의 차에 치여 부상당한 고양이지만).

그러고 보니 수록작의 모든 소녀는 독특한 성격의 인물들을 매개로 성인 사회가 미봉해 놓은 균열에 날카롭게 다가간다. ‘밤이 지나면’의 ‘정신 나간 여자’, ‘불장난’의 양우정, ‘해변의 피크닉’의 삼촌, ‘첫사랑’의 턱남과 과외선생, 그리고 ‘이사’의 중학생 언니가 문제의 인물들이다. 그 인물들을 중심으로 소녀는 이쪽에 놓이고 성인 사회가 저쪽에 놓이는데 ‘사랑의 꿈’에서는 공주연을 가운데 두고 성인인 ‘그녀’가 소녀 자리에 선다. 그러니 ‘그녀’는 성인이 아니라 연속된, 혹은 확장된 소녀인 셈이다. 소녀들은 낯설고 이질적인 인물에 이끌려 예기치 않은 사태에 빠지게 되는데, 예기치 않았던 만큼 그 사태를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피하지도 않는다. 더러는 그 사태를 초래하기도 한다. 문제적 인물들이 지닌 거부할 수 없는 매혹 때문일 테지만 소녀는 매혹의 성격과 정체도 알지 못한다. 아감벤이라면 매혹이라는 말 대신 신비라고 쓸지도 모르겠다.

아감벤은 숄렌과 아그논을 이중인용하면서 불의 신비가 글로 이동하는 과정을 전한다. 그의 짧은 에세이 ‘불과 글’을 여기에 언급하는 이유는 이번 작품집에도 실린 손보미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이 ‘불장난’이기 때문이며, 내용이 불장난과 불조심 글쓰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그논의 인용은 불이 텍스트로 이동 및 정착하는 과정에서의 신비의 소멸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감벤은 역으로 텍스트에 숨은 신비의 기억, 신비의 씨앗에 대해 말한다. 상징계의 수호자로 지탄받아 억울해하던 저술가들에게 반가운 해석일 수밖에 없다. 불이 글이 되었다면 글이 불도 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논리일지도 모른다.

다시 불이 있던 산으로 향하는 여정이 소설가 손보미에게는 소녀 기억하기가 아니었을까. 아이는 천국에서 가장 적게 걸어 나온 자라고 했던가. 천국을 유토피아나 아토포스로 번역할 수 있다면 소녀는 신비의 나라에 가장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가슴에 불씨가 꺼지지 않은 존재. 그러니 충동적으로 불을 지르고, 이제는 조심하겠다고 어른의 언어로 글을 썼다가, 읽을 때 그것을 다시 불사르고 마는 것. 그래서인지 이번 소설집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단번에 환하게 읽히고 마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출몰한다. “그녀가 허언증 환자에 거짓말쟁이라고 할지언정, 아니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녀의 매 순간순간은 완벽한 진실에 가까울 수 있었으리라.(359쪽)”

불의 문장이라고 할 만한 이와 같은 발화는 그러나 소녀 당시의 것이 아니다. 많은 괄호를 사용하여 회상 시점임을 끝없이 환기하는 것만 봐도 서술자의 위치는 성인이며 현재다. 그러나 비가역적인 위치에 있음, 그 이유 때문에 비로소 저와 같은 발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이게 바로 손보미 식 불의 문장일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신비란 현재 없는 유년, 유년 없는 현재만으로는 길어 올릴 수 없는 장소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이 ‘사랑의 꿈’을 지나는 현 단계로서의 손보미 문학의 장소가 아닐까.

◇이승우·소설가

이승우 소설가 / 오종찬 기자

◊정영선 ‘아무것도 아닌 빛’

정영선의 프로젝트는 좀 무모해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기를 거쳐 코로나 팬데믹까지, 내용에서도 원폭 피해부터 빨치산, 분단과 이념 대립을 통과하며 험악한 세월을 살아낸 사람들이 노년에 이르러 지나간 삶을 회상하는 이런 이야기를 200쪽이 조금 넘는 분량 안에 담아내려고 하다니. 긴 시간과 여러 공간을 거치며 겪는 신산한 사연들을 어떻게 다 들려준단 말인가.

그러나 이 소설은 미전향 장기수 안재석과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조향자, 두 노인에게 집중하여 특정한 시대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데 성공한다. 역사와 사회와 존재를 함께 담아내기 위해 작가는 꽤 공교하게 기획하고 수고했을 것이다. 과감한 생략과 기억의 전경화를 통해 인물들의 마음과 보편 감정을 조명하는 것이 이 작가의 전략이다. 그렇게 하여 이 소설을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닌 것이 되게 한다. 소설이란 게 이런 거지, 하며 읽게 한다.

90세 노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육체를 가진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부분에서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한때 기쁨과 의욕과 열망의 장소였던 육체는 이제 추억과 회한을 담은 그릇이 되었다. 아직 지키고 있는 것이 있지만, 시간의 힘 앞에서 많은 것이 허물어졌다. 어떤 것은 오해였고, 어떤 것은 미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허무한 것이 아니다. 가령 아들이 죽은 민박집에 5년이 지나 찾아가 방세와 회값을 두고 오는 장면이나 과거의 애틋함을 재현이라도 하듯 취기인 듯 치매인 듯 다른 집에 들어가 자고 나오는 한 노인과 그 노인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받아주는 노인이 만들어내는 스산하고 따뜻한 기운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결코 ‘아무것도 아닌 빛’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손보미 ‘사랑의 꿈’

등단 후 손보미만큼 열심히 소설을 쓴 작가도 별로 없거니와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소설 세계에 대한 실험을 그처럼 요란하게 해온 작가도 없는 것 같다. 10년이 조금 지난 기간 동안 그는 개성 강한 여러 모양의 소설을 보여주었다. 성찰과 유연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기이한 것에 대한 충동이 아니라 가장 정확한 표현을 얻기 위한 모색과 탐구야말로 참된 실험 정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삶에 대한 호기심과 의문을 내장한 성장기의 소녀를 앞세운 꼼꼼한 심리 묘사와 일상의 화면에 불쑥 돌출하는 개성적인 캐릭터(이를테면 ‘해변의 피크닉’의 할머니나 ‘밤이 지나면’의 ‘그녀’와 같은)를 통해 세계의 불가사의함을 선언하는 이 소설집의 세계가 손보미 소설의 도착점이 아닐지 모른다. 손보미의 독자는 아마 그의 다른 탐구에 기꺼이 동행하겠지만, 그러나 이 자리에 오래 머물기를 원하는 독자도 아마 꽤 있을 것이다.

“친구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에서 허점을 발견하면 애가 탔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는 양우정에 대한 소문들이 완전무결한 사실, 조금의 빈틈도 없는 완전한 진실의 모습을 하고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그것. 그래, 내가 바란 건 바로 그런 것이었다.”(‘불장난’, 102쪽)

‘불장난’의 화자인 소녀가 어떤 허점도 없는 완전한 이야기에 대한 기대, 완전무결함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할 때 독자는 작가가 자기 소설에 대해 갖는 욕망을 표현한 거라고 느낀다. 행동의 동기와 인과성을 설득시키려는, 과하다 느껴질 정도의 집요하고 촘촘한 묘사와 디테일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생생한 실감. 그러나 그의 소설은 실감을 획득하는 자리에서 멈추지 않는다. 여러 소설에서 ‘초능력’이라는 단어가 발견되는데, 이 단어는 대개 난처한 상황에 처한 인물이 다소 비상식적인 대처를 할 때 나온다. 초능력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게, 모순과 어불성설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는 언질 같은 것을 던지고 있다고 느껴진다. 어쩌면 성장이란, 삶에는 이런 초능력이라고 할 수 없는 처세의 수단을 갖는 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인지 모른다.

◇김인숙·소설가

김인숙 소설가/이명원 기자

◊정영선 ‘아무것도 아닌 빛’

해방 시기부터 시작하여 코로나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70년 넘는 세월을 관통해나가는 정영선의 장편소설 ‘아무것도 아닌 빛’은 거대한 역사적 서사이다.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만 봐도 그러하다. 빨치산 투쟁, 해방, 원폭 피해, 정부 수립 후의 이념 투쟁과 갈등, 그리고 배반, 또 그 뒤에는 수십년에 걸친 투옥 생활과 애증이 있다. 그토록 많은 세월과 이야기들이 쌓인 후에 남은 것은, 그런데 노년. 가진 거라고는 너무나 거대해서 하나로 뭉뚱그려지지 않는 기억뿐인, 가난하고 초라한 노년들이다.

이 거대한 역사적 서사가 무거울 법도 한데, 정영선은 이 무거운 역사를 묵묵하게 지고 간다. 회한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생의 끝에서 감당하는 극복과 화해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다만 최선을 다해서 바라보고 기록하고 기억한다. 그 기억은 거대 역사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구체적 삶의 기억이기도 해다. 1인칭 시점의 주체가 변하는 것이 흥미롭다. 오롯이 견디는 자신만의 기억, 자신만의 삶이 그런 시점의 변화 속에서 강조된다.

긴 역사의 이야기를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노년의 주인공들일 수밖에 없겠으나, 그것도 가난하고 누추한 주인공일들일 수밖에 없겠으나 이 소설이 가난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은 것은 이야기를 잘 쌓아놓은 플롯의 힘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빛’이라고 하였으나, 여전히 빛을 응시하고 있는 작가의 시선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 문장이 남는다. “영감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도, 꼭 심장 뛰는 소리처럼 들렸다.”

◊손보미 ‘사랑의 꿈’

손보미의 연작소설집 ‘사랑의 꿈’ 표제작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오르막길도 아니고 과속방지턱도 없는데 갑자기 차의 하부가 땅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이 문장은 소설 내에서 두 번 반복되고 그때마다 화자와 동승인이었던 등장인물은 이렇게 말을 한다. “아, 내가 무거워서 이런 거예요?” 별것 아닌 소리와 별것 아닌 말, 별것 아니게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순간들이 손보미에게 포착되면 그것은 날카롭게 벼려진 생의 한 순간이 된다. 깨진 유리 조각 같은 것, 그 유리 조각에 반사되어 빛났다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러나 지나가고 나면 덧없어지는 순간. 그 순간을 그토록 빛나게 만들었던 비밀과 비의의 특별함이 벗겨지고 나면 남게 되는 자의식과 위악과 허위. 그걸 모르는 체하지 못해서 결국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환멸과 통증.

성장은 상처로부터 오는 법이라는 진부한 말을 할 필요는 없겠다. 누구의 성장이나 다 특별하고 동시에 다 진부하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겠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이 성장에 머물 때, 그 시선의 방향에 따라, 시선을 서술하는 방법에 따라, 또 그 시선의 끝에 도달하는 방식에 따라 소설은 달라진다. 흔한 성장의 이야기가 비밀과 균열과 허위로 가득찬다. 그 비밀을 밝히기 위해 손보미가 택하는 방식은 끝없이 비틀어보기. 내밀하게 보기. 특히나 소녀들의 순간을 보기. 아직 덜 자란 소녀들의 들큰한 열기와 아슬아슬한 두려움과 도발과 맹목성이 뭉쳐 성장은 갑자기 도약이 된다. 소녀들은 과연 천천히 자랐을까. 시간과 날들을 고스란히 견디며 자랐을까. 손보미의 소녀들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앞에 인용한 문장은 그래서 의미 깊게 여겨진다. 바닥을 긁는 소리를 견디며 성장하고, 몸이 무거워지고, 그래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삶. 그 안에는 첫사랑이 있고, 죽음이 있고, 나를 등진 부모가 있고, 내게 초라함을 들키는, 자기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들키는 ‘어른들’이 있다. 소녀들은 그 다 자란 사람들이 부러웠을까, 가소로웠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독자들 자신의 과거로 되돌아보게 하는 손보미의 문장은 흥미롭다. 그토록 끝없이 비틀고 부정하고 또다시 비트는데도, 신파로 빠지지 않는다. 손끝으로 짚어가며 읽어야 할 문장인데, 그 문장 한 줄 한 줄이 서사가 된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김연정 객원기자

◊정영선 ‘아무것도 아닌 빛’

정영선의 장편소설 ‘아무것도 아닌 빛’은 빨치산 서사와 디아스포라 서사의 결합을 통해서 한국 소설의 시공간을 심화 및 확대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작품의 주인공은 아흔을 훌쩍 넘긴 노인들인 안재석과 조향자이다. 해방과 한국전쟁 시기에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동지의 배신으로 당국에 검거되어 비전향 장기수로 복역했던 안재석이 빨치산 서사의 축이라면, 일본인 아버지와 조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해방기에 조선으로 귀환해서 빨치산 활동을 지원하며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와 결혼해서 곡절 많은 삶을 살았던 조향자는 디아스포라 서사의 축을 담당하고 있다. 안재석과 조향자를 이어주는 매개적인 인물이 없을 수 없는데, 류정일은 일본의 조선인 학교에서 조향자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해방이 되자 그녀와 함께 부산으로 귀환해서 빨치산 활동을 지원했고, 당국에 쫓기고 있던 동지 안재석에게 조향자의 집을 피난처로 주선해주어 몸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안재석은 검거된 후에 심문 과정에서 조향자라는 아내가 있다는 자신도 모르는 이야기를 전해듣게 되는데, 그 흐릿한 인연들이 60년의 세월을 넘어서 부산의 아파트에서 우연하게 다시 해후한다. 이념의 빛이 지배했던 시대에 대한 사실적인 소설이기도 하고, 동시에 빨치산 서사와 디아스포라 서사의 후일담이기도 하며, 아흔 넘은 노인들의 슬프면서도 허망한 로맨스이기도 하며, 사람의 존재 자체가 그저 희미한 빛이었던 시절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손보미 ‘사랑의 꿈’

일반적으로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를 두고 MZ세대라고들 한다. 손보미의 연작소설 ‘사랑의 꿈’은 MZ세대,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밀레니엄 세대의 10대 소녀 시절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자신의 환경과 욕망의 불투명성과 맞서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10대 소녀의 생생한 감각과, 이제 30대 중후반에 이른 밀레니엄 세대가 지나간 소녀 시절을 회고하는 시선이, 내밀한 방식으로 얼굴을 드러낸다. 성인으로서 회고하는 시선과 10대 소녀로서 살아가는 감각은 서로 교차하고 뒤엉키면서 소설의 서사 속에 성장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무늬들을 새겨 넣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장의 서사 또는 성장을 회고하는 서사에는 통과의례적인 단절이 있게 마련인데,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에는 10대에 만났고 좋아했던 사람들(대부분은 여성들)에 대한 기억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예지몽을 꾼다고 주장하는 정신 나간 여자, 허언증 증세가 있는 외고 지망생 언니, 자신을 매력남으로 여기는 난봉꾼 삼촌, 소녀에게 벗은 몸이 되기를 권유한 문제아이자 모델 지망생이었던 동년배 여자아이 등, 소녀의 사막과도 같은 일상에 비일상적인 충격을 주었던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이 그것이다. 그 당시의 소녀는 이들을 사랑이라는 생각도 없이 사랑했고, 이들을 통해서 자신의 불투명한 욕망과 정체성을 객관화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다양한 인물과의 만남들이 성장이라는 목적론적인 서사로 수렴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꿈’이 보여주는 성장소설로서의 독특함은, 성장이라는 결과로 수렴되었는지 아니면 수렴되지 않았는지 정확하게 확정할 수 없는 매혹의 지점들을 기억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불명료하고 불확정적이었던 소녀 시절의 그 막연하면서도 끈적끈적한 느낌들이 작가 특유의 감각적인 문체 속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나고 있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그 어떤 막연한 끈적함이 쉽게 떠나가질 않았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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