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결국 통과는 됐지만…피해자에게 다 책임지라는 '전세사기 특별법'?

안상우 기자 입력 2023. 5. 2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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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특별법은 피해자를 가장자리로 내몰고 책임을 지운다


지난달, 인천 미추홀구에서 세 번째 전세사기 희생자가 나오자 정부는 즉각 미추홀구 소재 피해 주택에 대한 경매 절차를 중단시켰습니다. 이어서 피해 주택에 대한 '공공 매입' 카드까지 꺼냈습니다.

결국, '공공'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손사래를 쳤던 정부가 공공 매입을 골자로 한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물론, 이 사태를 바라보는 전문가들도 '공공 매입만으로는 현실적으로 부족하다'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정부가 꺼내는 이야기는 '형평성'이었습니다.

"주가조작 또는 보이스피싱, 이런 사기 피해의 경우에 국가가 반환해 주고 나중에 환수해 오는 사례는 현재까지 있지도 않고 선례를 남겨서도 안 됩니다."

-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지난달 24일)
 

"전세사기는 다릅니다. 장관님!"


현장에서 만난 전세사기 피해자 중 대부분은 많은 대출금을 떠안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네 번째 전세사기 희생자의 경우에도 전세보증금 3억 가운데 무려 2억 4천만 원이 은행 대출금이었습니다.

피해자 스스로도 막상 피해를 당하고 난 뒤야 묻는 질문은 '그런데, 어떻게 큰돈이 그렇게 쉽게 대출이 됐었지?'입니다. 다시 기억을 돌려보면, 전세 계약을 맺을 당시 공인중개사가 은행 대출은 어디서 받을지 정했는지 물어봤다고 피해자들은 공통되게 말합니다. 대출 금리 때문에 고민이라는 말에 공인중개사는 '○○ 은행 ᨜᨝ 지점 △△△ 실장'을 추천합니다.


실제로 전세사기 임대인들과 전세 계약을 맺은 피해자들은 나중에서야 서로가 같은 실장을 통해 대출 상담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실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이들은 업계에서는 'SR'이라 불리는 대출 상담 직원입니다. 분명히 명함에는 '○○ 은행' 소속이라 나오지만, 실제로는 하청을 받아 업무를 받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 은행을 찾아가 항의하더라도 '모르는 일'이라는 답변을 듣는 이유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실장들은 여러 가지를 순식간에 확인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주택도시보증공사(HUG)와 같은 보증기관들이 전세 대출에 대한 보증을 섰는지를 꼼꼼하게 확인합니다. 당시에는 HUG 같은 보증 기관 덕분에 비교적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피해자들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갑니다.

정부 기관이 보증을 해주니, 은행 입장에서는 설령 피해자들이 못 갚더라도 보증기관에 청구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은행은 부담 없이 대출해 줍니다. 이런 점을 악용한 전세사기 일당은 전세 가격을 한껏 부풀려 시장에 내놓습니다. 리베이트에 눈이 먼 공인중개사들은 '가격 대비 좋은 집이 나왔다'며 세입자를 유인하고, 부족한 전세자금을 고민하는 세입자에게 또다시 모 실장님을 소개해줍니다. 이렇게 끊을 수 없는 전세사기의 고리가 완성됩니다.

자 그렇다면, 원 장관의 말처럼 전세사기는 주가 조작이나 '코인' 사기, 보이스피싱과 다를 바 없는 사건일까요? 아닙니다. (물론 모두가 막아야 할 범죄들이지만) 전세사기처럼 뒤에서 정부가 보증을 서주는 사기 사건은 없습니다. 정부는 다른 사건과의 형평성을 운운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했던 잘못이 무엇이고 책임을 통감했어야 했습니다.
 

"폭탄은 언제나 약자에게 떨어진다."

여야가 전세사기 특별법을 두고 한 달 가까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피해자들의 속은 바싹 타들어갔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피해자들이 마치 정부 예산을 축내려는 것처럼 취급했고, 이에 따라 '피해자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야당에서는 '채무 조정안'을 대안으로써 내밀었습니다. 피해자들이 떼인 보증금을 정부가 나서 보상해 줄 수 없다면, 기존에 존재하는 개인회생이나 파산 제도를 통해 적어도 은행 빚이라도 조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회생 및 파산 제도는 자신의 자산보다 채무가 많아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렀을 때 법원에 신청할 수 있습니다. 법원에서는 피해자가 숨겨놓은 재산이 혹시 있는지, 소득은 어느 정도인지를 면밀하게 조사한 다음 파산 또는 개인 회생(소득 수준에 맞게 갚아야 할 빚 재조정)의 결정을 해줍니다. 다만, 현재는 회생 및 파산 제도를 이용할 경우 최장 5년 동안 신용 기록이 남아 은행 대출 등을 받을 수 없습니다.

피해자 중 상당수는 회생이나 파산을 선택하고 싶어도, 이러한 불이익 때문에 선뜻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는 야당에서는 적어도 전세사기 피해자라면 불이익 없이 회생이나 파산 제도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특례 조항을 뒀습니다. 정부가 굳이 예산을 쓰지 않더라도, 피해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은행 빚 문제를 법원을 통해 공정하게 조정할 수 있어 실효성이 컸습니다. 그만큼 기대감도 컸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정부 기관이 은행 대출을 보증해 줬기 때문입니다. 즉, 피해자가 채무 재조정을 통해 갚지 않은 빚을 은행은 얼마든지 정부에 청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정부의 빚보증은 피해자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아무리 피해자들이 발버둥치더라도 결국 전세사기 특별법은 본질적으로 공포의 '폭탄 돌리기'였습니다. 사회적 재난으로 불리는 전세사기 사건의 책임을 정부에게 돌릴지, 은행에게 돌릴지, 아니면 피해자에게 돌릴지를 두고 치열하게 폭탄 돌리기를 했던 것입니다. 폭탄은 결국 가장 약자인 피해자에게로 향했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피해 보증금 채권 매입은 물론, 채무 조정안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무이자 대출과 분할 상환이라는 절충안을 제시했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전세사기 책임은 피해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지라는 것입니다. 여야가 결국 전세사기 특별법안에 합의하고 국토위 전체회의를 통과한 날, 너무 안타깝게도 인천 미추홀구에서 또 다른 희생자가 가족 곁을 떠났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안상우 기자asw@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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