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갔던 여고생, 민주화 외친 고3…5·18 유족 정신적 손해배상서 승소

진창일 기자(jci@mk.co.kr) 2023. 5. 29.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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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유족 315명 청구금액 50~89% 인정
1980년 5월 아버지 영정사진 든 꼬마 조천호씨(오른쪽). [자료 = 연합뉴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총탄에 맞아 숨진 피해자의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정신적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광주지법 민사14부는 유족 315명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전두환 등 신군부가 헌법 질서 파괴 범죄를 자행하며 저지른 반인권적 행위로 위법성 정도가 중대하고, 고인과 가족들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며 원고 청구 금액의 50~89%를 인정해 정부가 각각 800만~1억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번 소송에는 고교생이거나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숨진 박금희 양, 전영진 군, 차종성 군, 정윤식씨 가족과 다섯 살배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난 조사천씨의 유족 등이 참여했다.

박금희 양은 전남여상 3학년이던 1980년 5월 21일 “피가 부족해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차량 방송을 듣고 헌혈 후 귀가 도중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전영진 군은 대동고 3학년 재학 중이던 1980년 5월 20일 문제집을 사러 책방에 가다가 계엄군에게 곤봉으로 폭행당한 뒤 다음 날 옛 전남도청 앞에서 민주화 시위 도중 총상을 입고 숨졌다.

차종성 군은 금호고 3학년이던 1980년 5월 19일 무등경기장 인근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을 구타하는 것을 목격하고 항의하다가 곤봉과 개머리판으로 폭행당했다. 이후 광주교도소로 끌려가 45일간 구금됐다가 석방된 뒤 구타·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83년 3월 5일 생을 마감했다.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정윤식 씨는 옛 전남도청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다가 체포돼 고문당했고 후유증을 앓다가 1982년 2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조사천 씨는 계엄군의 시민 폭행에 분노해 시위에 참여했다가 1980년 5월 21일 옛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현장에서 숨졌다. 당시 5살이던 아들 조천호 씨가 합동 장례식에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모습을 외신 기자가 촬영해 후일 독일 슈피겔지에 실으면서 5·18의 상징이 됐다.

앞서 정부는 5·18 보상법으로 이미 보상받은 사람은 ‘재판상 화해’ 효력이 발생해 더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했지만, 헌법재판소는 정신적 손해를 고려하는 내용은 없었다며 2021년 5월 위헌 결정했다.

이후 5·18 유공자와 유족 1000여명이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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