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멘 콘덴서 "1인 개발자의 놀라운 국산 TCG"
보드게임 인기는 꾸준히 성장하는 추세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이는 국내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2022년 기준 글로벌 게임 시장 규모는 1844억 달러, 그 중 보드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137억 달러로 7%도 채 되지 않는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보드게임 대중화를 위해 혈혈단신으로 뛰어든 한 개발자가 있다. 국내에서는 더욱 마니악한 장르로 평가받는데도 말이다. 게임을 좋아하는 애정과 열정만으로 가시밭길에 20대 청춘을 바쳤다.
1인 보드게임 개발자 '페르소'가 그 주인공이다. 대전격투 게이머와 TCG 유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더 많은 이들이 보드게임에 관심을 갖고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드는 게 목표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인디게임도 아닌 1인 보드게임 개발자는 다소 생소한 이야기다. 최근 게임톡은 서울 잠실에 있는 한 보드게임 카페에서 페르소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1인 보드게임을 개발하며 겪는 어려움, 개발 과정, 그리고 1인 창작 BTCG '루멘 콘덴서'를 직접 즐겨보고 다양한 얘기를 나눴다.
■ 운보다는 심리전 중요한 TCG '루멘 콘덴서'
루멘 콘덴서는 격투게임 특유의 심리전을 TCG로 표현한 게임이다. 격투게임의 캐릭터는 직업, 각 기술은 '카드'로 구현했다. 하나의 덱은 총 20장의 카드로 구성되며 14장은 메인 덱, 6장은 사이드 덱으로 분류한다.
모두가 즐기는 TCG를 표방한 게임답게 룰이 매우 간단하다. 시작에 앞서 메인 덱을 자기 앞에 뒤집어 놓고 사용할 5장의 카드를 패로 가져온다. 이후 서로의 패를 확인한다. 뒤집어 놨던 나머지 9장의 카드를 앞면으로 변경한다. 사이드덱은 비공개 정보다.
플레이어는 사이드덱을 제외한 상대방의 모든 카드를 알 수 있다. 다만, 항시 공개되는 덱과 달리 패는 처음 시작 단계에서만 공개하기 때문에 카운팅이 필요하다.
매 턴 패에서 카드 1장을 선택해 뒤집어 내려놓는다. 이후 동시에 내려놓은 카드를 공개하여 판정을 통해 승패를 가린다. 이를 어느 한쪽의 체력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반복한다.
격투게임은 공격, 공격이 가드에 막혔을 때, 서로가 가드를 올렸을 때 등 상황마다 기술 프레임 및 상중하 판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루멘 콘덴서는 이에 착안해 결과를 도출한다.
루멘 콘덴서의 기술 속도는 격투게임의 프레임이다. 프레임이 낮을수록 공격을 더 빠르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루멘 콘덴서 역시 기술의 속도값이 낮을수록 판정 우위를 갖는다. 예를 들어 '속도 3' 중단 카드와 '속도 5' 상단 카드가 맞붙었을 경우 속도 3 중단 카드 데미지만 결과에 반영된다.
다만, 속도 5 카드에 '중단 회피' 효과가 있을 경우 결과가 달라진다. 속도가 느리지만 회피 효과가 우선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속도 5 상단 카드 데미지만 들어간다. 만약 속도, 판정, 효과 모든 조건이 동일할 경우 양측 모두에게 데미지가 먹힌다.
격투게임에는 공격이 맞았을 때의 유불리 프레임을 뜻하는 '히트 경직' 및 공격을 가드했을 때의 '가드 경직' 개념이 있다. 루멘 콘덴서는 이를 'FP'라는 개념으로 구현했다. 각 플레이어의 FP는 0이지만 기술카드의 적중 상황과 효과에 따라 FP 수치가 변한다. 변화한 FP는 다음 턴에 사용하는 기술 속도에 영향을 준다. 가령, FP가 3이라면 속도 5의 카드가 3 빨라져 속도 2로 발동하게 되는 식이다.
이외에도 공격 기술을 연달아 사용하는 '콤보', 대량의 FP를 소모하여 즉시 기술을 사용하는 '캐치' 등 격투게임 내 존재하는 친숙한 개념이 카드게임에 맞게 구현돼 있다.
Q. 한국에서는 격투 게임이 마이너 장르다. 격투게임을 활용한 TCG를 만들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좋아하는 것을 쫓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어진 흐름이다. 어릴 적부터 격투게임과 카드게임 모두 좋아했다. 아쉽게도 격투게임과 카드게임은 한국 시장에서 굉장히 마이너한 장르다. 그래도 '재밌다'라는 인식은 있다.
재밌는 것을 알지만 "고여있다", 혹은 "어렵다"는 인식이 강하다. 두 장르 모두 주변 사람들에게 권유하면 "고여있는 게임 왜 하냐"라는 대답을 자주 듣는다. 틀린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재미없다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아쉬웠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를 다른 사람들도 재밌게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힘든 시스템 때문에 안 하고 있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각 장르의 장점만을 가져와서 만든 것이 루멘 콘덴서다.
Q. 국내 보드게임 시장, 그 안에서도 TCG는 사실상 유희왕과 포켓몬이 양분하고 있다. 다른 보드게임 장르에 비해 신작 진입장벽이 높은데 걱정은 없는가?
루멘 콘덴서는 TCG와 LCG의 중간에 있는 게임이다. 현재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TCG는 유명 IP로 이뤄진 좋은 게임이 자리잡고 있다. 반대로 LCG는 유명 IP는 '후루요니', '넷러너' 등의 창작 IP 출신 게임이 다수다.
지금은 창작 IP인 루멘 콘덴서가 TCG 유저들에게 매력적인 게임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카드게임만으로 멈추는 것이 아닌, 당당한 하나의 IP로 성장시키고 싶다. 이를 바탕으로 굿즈, 웹소설, 웹툰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시키고 싶다. 더 넓게는 오프라인 서브컬처 IP에 대한 진입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IP가 되고 싶다.
Q. 접근성 측면에서 '하스스톤'이나 '섀도우버스' 같은 컴퓨터 게임으로 출시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왜 실물 카드 게임으로 만들었는가?
대부분의 카드게임이 디지털 인디게임 형식으로 출시된다. 나 또한 한명의 팬으로 이런 게임을 많이 즐긴다. 개인적인 목표로 한국에서 TCG 시장을 다시 부흥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재밌는 오프라인 카드게임을 지금보다 더 많이 즐겼으면 한다. 물론 루멘 콘덴서가 잘 되면 해당 IP를 활용한 디지털 게임을 제작하려는 생각은 있다.
Q. 개발 인력과 기간은 어느 정도인가?
대부분의 작업은 혼자하고 있다. 다만, 카드 일러스트까지는 혼자하기 벅차서 외주형태로 일러스트레이터 7명과 함께 작업했다.
시작은 군 복무 시절이다. 한창 군에 철권이 보급되던 시기였는데, 우리 부대만 기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노트에 철권을 카드게임 형태로 그려서 부대 사람들과 가지고 놀았다. 그때 부대원들 평가도 좋았다. 이에 영감을 받아서 루멘 콘덴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현실적인 문제로 다른 일을 하다보니 100% 시간을 쏟은 것은 아니지만 대략 10년 정도 됐다.
여담으로 일본에도 진출 계획이 있다. 일본 TCG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의외로 일본에서의 반응이 더 좋았다.
Q. 국내 1인 보드게임 개발자가 겪는 어려움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테스터 모집 외 겪는 고충은 일러스트레이터와 디자이너 구인이다. 개발자가 원하는 테마에 맞고 소통이 원활하면서 비용 부담이 적은 일러스트레이터를 찾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보드게임은 일반 게임과 달리 실물 패키지와 그에 맞는 시각적인 요소가 크게 강조된다. 이를 잘 아는 디자이너를 물색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Q. 외주 방식으로 일러스트레이터 7명과 함께 작업을 했다고 말했는데 협업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는가?
루멘 콘덴서 역시 오랜기간 개발해오며 많은 일을 겪었다. 장시간 지속된 개발로 모두 지칠 때도 있었고, IP가 없는 게임 개발에 참여하다보니 포트폴리오 등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좋은 게임을 만들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나를 믿고 잘 따라와줬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의 노고 덕분에 좋은 캐릭터가 탄생했다.
Q. 루멘 콘덴서를 테스트해 본 유저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격투 게임을 즐기던 유저들은 "내가 반응속도가 느려서 기술을 회피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루멘 콘덴서는 턴에 맞게 카드를 내기만 하면 되니까 편하고 재밌다"라는 의견을, TCG 유저들은 "운적요소가 없다. 상대의 심리를 읽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을 고민하는 과정이 굉장히 즐겁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TCG 유저는 오픈덱 구성으로 게임을 즐기니 현재 내릴 수 있는 판단에 최선을 했으니 결과에 승복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기분 나쁘게 졌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애초에 패가 안 좋아서 이길 수 없는 상황이 없기 때문이다.
Q. 테스트에서 유저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피드백은 무엇인가?
캐릭터의 능력(키워드)에 대한 가독성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유저들이 많았다. 이는 보완해 나갈 예정이다. 게임 룰과 관련된 것으로는 전투 계산 방법을 가장 어려워 한다. 효과 우선순위에 대한 얘기다. 물론 기존 TCG 유저들은 "이게 어렵나"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처음 TCG를 접하는 유저라면 힘들 수 있다. 그래서 보면서 할 수 있도록 플레이보드에 우선 순위에 대한 설명을 함께 실었다.
Q. TCG에서는 플레이 외에도 덱메이킹을 하는 재미를 뺴놓을 수 없지만, 오픈덱 형식이다 보니 영향이 크게 있지 않아 보인다.
한 번의 승부는 3판 2선승제로 진행된다. 기본 덱 20장 중 6장을 사이드덱으로 빼놓는다. 세트에서 진 사람만 사이드덱에서 메인덱으로 카드를 교체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 덱을 보고 더 유리한 방향으로 구축할 수 있다. 또한 캐릭터(직업)간의 전용 카드와 효과로 자신만의 스타일로 덱을 구성할 수 있다. 자신만의 덱을 만드는 재미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Q. 첫 번째 턴에 승리하여 FP를 많이 확보한 플레이어가 갖는 메리트가 상당히 크다. 상대의 방어 카드만 예측할 수 있으면 게임을 계속 굴릴 수 있는 여지가 커보인다. 첫 승부에 너무 많은 포인트가 걸리는 느낌이다.
격투 게임의 고증을 가져온 시스템이다. '선빵필승'이라는 말대로 격투 게임에서는 첫 한방이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TCG 시스템을 활용해 적정선을 유지시켰다. 회피 효과를 가진 방어 카드도 있고, 카드 자체의 효과도 있다. 자신의 카드 풀 내에서 상대 기술을 막을 수 있는 카드가 반드시 있다. 상대의 다음 수를 잘 읽어내기만 하면 판도를 바꿀 수 있다.
Q. 덱을 공개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패까지 공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렇게 설계한 이유가 무엇인가?
'억까'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싶었다. 루멘 콘덴서는 격투 게임 기반 TCG다 보니 첫 한방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첫 한방을 몰라서 맞았다는 것 자체가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쾌하게 다가온다. 이것이 반복되다보면 결국 흥미를 잃는다. 패를 공개해서 정보의 제한은 없도록 만들었다. 격투게임에서 상단, 중단, 하단 중 어디를 때릴지 고민하는 것처럼 루멘 콘덴서도 상대가 어떤 종류의 카드를 낼지 생각하는 심리전이 중요하다.
Q. 콤보 시스템의 경우 한 번에 너무 많은 데미지가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패 소모가 크지만 체력(생명점) 격차를 한 번에 크게 벌릴 수 있다.
루멘 콘덴서의 핵심은 "콤보를 어떻게 맞추나"다. 이는 격투게임도 마찬가지다. 한 번 콤보에 맞아버리면 체력이 반 넘게 닳거나, 그대로 게임이 끝나기까지 한다. 격투게임이 콤보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이 게임도 콤보를 넣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게임이다. 콤보를 대략 두 대정도 맞으면 패배하는 것은 격투게임의 흐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물론 패를 적게 쓰고 짤딜만 넣을 수 있다. 같은 콤보여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개인의 판단에 달렸다. 패를 많이 소모해서 큰 데미지를 넣으면 그만큼 다음 턴 어드밴티지 차이로 불리하기 때문에 되려 역전당할 수 있다.
Q. 게임 한 판에 평균적으로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지 궁금하다.
숙련자 기준으로 대략 10분에서 15분 정도 걸리게끔 설계했다. 3세트까지 간다고 쳐도 대략 45분 내로는 끝난다. 유희왕이나 포켓몬TCG도 1라운드 당 제한시간이 45분인 것을 감안하면 기존 게임과 비슷하게 느껴질 것이다. 공식룰에는 제한시간 내 승부가 결정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격투게임처럼 체력이 높은 플레이어가 승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Q. 대부분의 게임이 보통 숫자가 높을수록 속도가 빠른데, 루멘 콘덴서의 경우 숫자가 낮을수록 빠른 판정이다. 문법에서 벗어난 룰이다 보니 헷갈리는데 이렇게 설계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적용해야 격투 게이머 분들이 익숙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격투게임에서는 프레임이 낮을수록 공격이 빠르게 들어가는 판정이다. 카드 게이머들에겐 미안하지만 격투 게이머보단 룰에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양 쪽 팬덤 모두를 고려했을 때 이렇게 가는 것이 더 낫다고 봤다. 격투 게이머는 카드게임의 재미를, 카드 게이머는 격투게임의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룰을 고민했을 때 "숫자가 낮은 쪽이 먼저 공격한다"라는 룰이 모두가 재밌게 즐길 수 있는 방향이라고 판단했다.
Q. 결국 루멘 콘덴서도 카드를 출시하다보면 카드풀이 쌓일텐데, 이것이 결국 진입장벽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카드게임에서는 블록제를 운영하고 있는데 루멘 콘덴서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루멘 콘덴서도 블록제를 운영할 생각이다. 대략 1~2년 정도의 텀을 둘 방침이다. 기존 카드게임과 마찬가지로 블록 아웃을 하게 된 카드는 밸런스를 조정해서 다른 이름의 카드로 재출시할 계획이다.
Q. 루멘 콘덴서가 어떤 게임이 되었으면 하는가?
유희왕이나 포켓몬 TCG와 공존하는 게임이 됐으면 한다. 유희왕을 하다가 잠시 쉴겸 "루멘 콘덴서나 할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메인 게임을 하는 시간 외 즐기는 '블루아카이브'나 '프리코네' 등과 같은 서브게임이 인기를 끌고 있듯이 루멘 콘덴서도 서브 TCG로써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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