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는 현실" 필리핀 가사노동자 싸게 쓰던 노르웨이는 제도 폐지했다[인터뷰]

신은별 2023. 5. 2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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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LO) "현대판 노예제" 폐지 주도 
LO 고위 지도부 율리 로드럽 인터뷰
게티이미지뱅크

정부가 저출생 해결 방안으로 '저임금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도입하려 한다. 아이 양육 부담이 커서 →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하니 → 싼값에 양육자를 고용하게 해주겠단 것이다. 최저시급(9,620원)을 적용하면 월 150만 원 정도로 고용할 수 있는데(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 기준), 이는 현재 가사 보조 노동자의 통상적인 임금 수준(200만~300만 원대)보다 저렴하다. "70만~100만 원만 줘도 공급이 가능할 테니 최저시급을 적용하지 말자"는 주장도 있다.

'국내 노동자보다 저렴하게 일할 사람을 들인다'는 핵심 내용만 놓고 보면, 유럽 등 서구 국가에서 활용 중인 '오페어(Au pair)' 제도와 취지가 유사하다. 오페어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경험하거나 언어를 배우고 싶은 청년을 위해 1960년대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 도입됐다. 거주지 제공을 조건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적은 임금을 주면서 가사노동을 맡겼다. 실제로는 선진국이 저렴한 비용으로 저임금 국가의 여성 인력을 육아 보조 노동자로 고용하는 통로로 쓰일 때가 많았다. 노르웨이도 그중 하나였다.

최근 노르웨이 정부는 "내년 1월부터 오페어 비자 발급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반인권적이고 비윤리적인 제도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에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한국일보는 오페어 폐지를 주도한 노르웨이 최대 노조 노동조합총연맹(LO)의 율리 로드럽 제1비서(선임이사)와 26일(현지시간) 만나 노르웨이가 왜 그런 결단을 했고 한국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물었다.

노르웨이 정부가 '오 페어(Au pair)'제도를 폐지하겠다고 지난 3월 발표했다. 노르웨이 노동조합총연맹(LO)은 이러한 결정을 하도록 수년 동안 정부를 압박했다. 사진은 LO의 율리 로드럽 선임이사. LO 제공

"자국 노동자에게도 피해... 저출생 해법인지도 의문"

지난 3월 기준 오페어 비자를 발급받고 노르웨이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1,100명 정도다. 대부분 필리핀 출신 젊은 여성(18~29세)이다.

이들은 일주일에 30시간 일하는 대가로 5,900크로네(약 71만 원) 정도를 받는다. 주거비를 아낄 수 있다고 해도, 노르웨이 생활 물가가 전 세계 최상위권이고 노동자 1인당 평균 월급이 4만8,750크로네라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적은 액수다.

이에 LO는 7년 전부터 오페어 폐지를 주장했다. ①저임금 국가 출신 노동자 ②가사·육아 노동자 ③여성 노동자에 대한 다중 차별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로드럽 이사는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하지 않고 '2등 노동자'를 양산하는 상황을 국가가 용인해서는 안 된다""폐지하지 않으면 차별이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LO는 오페어를 "현대판 노예제"라고 묘사했다.

외국인 노동자가 차별받으면 국내노동자도 피해를 입는다. 시장 논리에 따라 저렴한 상품이 풀리면 다른 상품의 가격도 동반 하락하기 때문이다. 로드럽 이사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과 노동 조건을 보장하는 것은 결국 자국 노동자 보호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가사도우미를 저가에 공급하는 것과 출생률 상승의 연관성도 크지 않다는 게 로드럽 이사의 판단이다. 그는 "일·가정 양립 가능 여부, 양육 책임의 평등한 분배 등이 출생에 훨씬 더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게티이미지뱅크

"노르웨이에서 나타난 노동 착취들..." 한국이 고민할 '숙제'

오페어로 인한 노동 착취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로드럽 이사는 "정부는 비자만 발급해줄 뿐 고용은 민간 중개업체 등을 통해 개별적으로 이뤄진 탓에 정부가 규정한 노동 조건을 고용주가 어기는 경우가 많았다"며 "취약한 외국인 노동자가 '계약시간 외 근무' 요구 등을 거절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가정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착취여서 적발하기 어려운 것도 문제다. 외국인 노동자가 법적 대응을 하기도 쉽지 않다. 로드럽 이사는 "저임금 국가에서 온 이들이 변호사 선임 비용 등을 부담하고 해고를 감수하며 대응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외국인 가사도우미 도입을 끝내 강행한다면, 노르웨이에서 확인된 폐해를 점검해 봐야 한다고 로드럽 이사는 말했다. 외국인 노동자가 정당한 노동 대가를 지불받는지, 노동 환경이 건전한지 등을 정부가 챙기고 제도를 섬세하게 설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베를린= 신은별 특파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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