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 퇴짜 맞은 그녀, 신약 개발의 역사를 바꾸다[홀오브페임]

박건형 테크부장 2023. 5. 29.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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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케나드·1924~2023)
데이터의 중요성을 일깨운 선구자
전세계 과학자들의 백과사전 만들어

<홀 오브 페임(Hall of Fame)>

지구와 우리 삶을 바꾼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발자취를 다룹니다.

이들의 한 걸음이 인류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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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케나드 /케임브리지대

과학자들이 자연현상을 연구하고 새로운 발명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분석은 빼놓을 수 없는 과정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인지,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깊숙이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만들어집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마찬가지이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이터의 효율적인 관리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전세계 과학자들이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밝혀낸 결과물을 한 곳에 모아놓고 누구나 참조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요. 시간과 노력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은 물론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을 1960년대에 떠올리고 실천에 옮긴 여성 과학자가 있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 결정학 데이터베이스(Cambridge Structural Database·CSD)를 만들고 케임브리지 결정학 데이터베이스 센터(CCDC)를 설립해 30년 넘게 운영했던 결정학자 올가 케나드(Olga Kennard)입니다.

지난 3월 세상을 떠난 케나드는 현대 생화학과 신약 개발의 산파로 평가받습니다. 200여편이 넘는 논문을 낼 정도로 연구 업적도 훌륭했지만, 그가 설립한 CSD가 이들 분야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나치 독일의 탄압을 극적으로 피하다

올가 케나드. /케임브리지대

케나드는 결정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X선 회절 분야 연구자입니다. X선 회절은 X선을 특정 물질에 쏘인 뒤 결정에 의해 휘어지거나 통과하는 패턴을 분석해 분자 내의 원자 배열을 발견하는 방식입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X선 회절 사진은 1952년 5월 킹스칼리지 연구자였던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촬영했습니다. 지난 홀오브페임에서 다뤘던 인물과 사건이죠. 이른바 ‘51번 사진(Photograpg 51)’으로 불리는 이 사진은 유전자(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는데 이바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촬영한 '51번 사진'. /위키미디어

케나드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은행가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지만, 반유대주의가 확산하자 가족 모두가 1939년에 이주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주 전에 나치 독일을 가로지르는 기차를 타는 위험한 도박에 성공한 겁니다. 케나드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호브 카운티 여학교에서 곧바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특출난 학생이었습니다. 이후 케임브리지 뉴넘 칼리지에서 물리학과 광물학 등 자연과학을 전공했습니다. 그가 입학할 당시만 해도 여성은 공식적으로 학위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케임브리지에서 2년제 학위를 받은 케나드는 1944년 캐번디시연구소의 연구 조교가 됐습니다. 적혈구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의 구조를 연구하는 막스 퍼루츠 밑에서 일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X선 회절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의 평생 연구 주제가 됐습니다.

◇”데이터 모으면 개별 실험 결과 초월”

당시의 다른 여성들처럼 케나드가 과학계에서 일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케임브리지 박사 학위 과정에 지원했지만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습니다. 안과학 연구소, 국립의학연구소 등에서 일하다 1962년 케임브리지 화학과 과장이었던 알렉산더 토드 교수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결정학 그룹을 맡아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다만 대학의 직책은 주지 않았습니다. 영국 가디언은 “케임브리지 규칙이 경직돼 있었기 때문에, 케나드는 다른 교직원의 감독 아래에서만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1965년 케나드는 동료 직원들을 “데이터의 집합적 사용은 개별 실험의 결과를 초월하는 새로운 지식의 발견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서로 데이터를 공유하면 획기적인 발견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겁니다. 케나드는 자신의 생각을 곧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모든 유기 및 금속 분자 결정 구조를 하나의 데이터베이스에 모으는 케임브리지 결정학 데이터베이스(Cambridge Structural Database·CSD)를 만들고 아예 센터(CCDC)까지 설립했습니다. 물론 초기에는 모든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비영리 단체로 설립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케나드 팀의 자원봉사와 마찬가지인 노력으로 이뤄졌습니다.

출범 초기 케나드와 팀원들은 당시까지 알려졌던 3000개의 3차원 분자 결정 구조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세계 곳곳에서 출판된 논문에서 X선 회절과 분자 결정 구조를 있는 대로 긁어모았습니다. 이를 전자적으로 인코딩하고 주제별로 분류해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했습니다.

케임브리지 결정학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 분자 구조. /CSD

◇49세에 받은 박사 학위

시간이 지나면서 CCDC는 다양한 분자 구조를 그래픽으로 표시해주거나, 데이터 분석을 지원하는 소프트웨어 도구까지 개발했습니다. 케임브리지대의 지원금으로 운영되던 CCDC는 라이선스 모델을 통해 수익원을 확보했고 1992년 센터 독립 건물까지 지었습니다. 덴마크 건축가 에릭 크리스티안 소렌손 교수가 설계한 이 건물은 1993년 선데이타임스 올해의 건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CCDC 내부의 결정 조형물. /CCDC

2019년 기준, 이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분자 구조의 수는 99만5907개에 이릅니다. 매년 5만건 이상이 새로 축적됩니다. 1965년 656건이 추가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셈입니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전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최초의 수치 과학 데이터베이스로 평가받습니다. 기초과학 연구원뿐만 아니라 제약·바이오, 농업, 재료 분야 등의 연구자라면 누구나 이 데이터베이스의 도움을 받습니다. CSD는 단백질 데이터뱅크(Protein Data Bank), 핵산 서열 데이터베이스(Nucleic Acid Sequence Database) 같은 다른 거대 프로젝트의 모델이 됐고, 실제로 케나드는 이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케나드는 그 자신도 수많은 연구성과를 발표했습니다. 1971년에는 생명체에서 근육의 수축과 혈액 순환, 신경계 활동에 관여하는 분자인 ATP(아데노신 3인산)의 구조를 밝혀냈습니다. 가디언은 “하지만 케나드의 최우선 순위는 항상 CSD와 CCDC였다”고 했습니다. 본인의 연구보다 전세계 연구자들이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우선시했다는 겁니다.

케임브리지대는 1973년 케나드에게 이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그의 나이 49살에야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된 겁니다. 가디언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케나드 박사로 부르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 부끄러움을 덜어준 학위”라고 했습니다. 1987년에는 왕립학회 펠로가 됐고, 1988년에는 영국제국훈장(OBE)을 받았습니다. 젊은 시절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았던 차별을 오롯이 자신의 실력과 철학으로 극복하고 명예까지 거머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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