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해서 산책 종로3가 금은방] 당신의 '상처'가 이 도시를 치유하리라

이지형 '강호인문학' 저자 2023. 5. 29.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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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로3가 금은방
내 '몸값'은 얼마일까. 금은방의 '고가매입' 입간판 앞에서 움찔한다.

싱어송라이터 제이Jay는 신작 싱글 '리빙 디셈버Leaving December'에서 상처받은 도시인을 노래한다. 맘속의 상처, 어둠을 직시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동굴처럼 깊어진 어둠이 그들을 또 다시 찢고 헤집는다. 젊은 크리에이터는 상처에 굴복할 생각이 없다.

낙엽 지고, 눈송이 날릴 때

당신의 상처가 이 도시를 치유할 거야.

As the autumn leaves fall

The snowflakes recall

Your hurts will heal the town

그리고 주문한다.

그냥 한 걸음만 내디뎌. 상처scar가 별star이 될 거야.

You, Just get out, then scars will be a star

가끔씩 제이의 노래를 귀에 꽂고 거리를 걷는다. 도심 곳곳의 생채기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을도 아닌데, 겨울도 아닌데, 낙엽 떨어지고 눈 날린다. 지상의 상처들이 하늘로 올라 한낮의 별로 뜬다. 내가 생각하는 도시의 상흔은 이런 것들이다.

"나도 고가로 매입당하고 싶었다"

어느 아침, 종로 3가를 지난다. 보도 옆으로 귀금속 도매상들이 즐비하다. 흔히 금은방이라 부르는 점포들이다. 금은방의 넓고 깨끗한 창 안으로 빈 진열대들이 가지런하다. 귀금속들은 금고 속에서 겨울잠을 자는 중이다. 괜한 노출은 야밤의 무모한 도벽을 유발할 테니, 잠재우는 편이 낫다. 그렇게 텅 빈 진열장 위로 빨갛고 노란 소형 입간판 하나가 솟아올랐다.

'고가매입 순금. 14k. 18k. DIA'

나는 상처받는다. 중중첩첩한 이 자본 시장에서 나의 몸값은 어느 정도일까. 나도 한 번쯤 고가로 매입당하고 싶었는데, 이젠 세월에 깊숙이 잠식당해 그럴 기회는 더 멀어졌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아무래도 순금이었던 적은 없다. 14k도, 18k도 아니었다.

젊은 시절의 어느 시기엔 그래도 은銀 대접은 받았던 게 아닐까. 그저 값싼 합금 정도의 품질이었고, 그 정도 대우를 받았던 것 같다. 저 멀리 세운상가 2층의 로봇 태권V가 눈에 들어온다. 무적의 강철 합금이었다면 그나마 좋았겠다. 다이아몬드DIA는 꿈꾸지도 않았고.

귀금속 도매상 내부의 조그마한 입간판이 상처가 될 줄은 몰랐다. 아침부터 괜히 기가 꺾이고 눈길을 돌리고 만다. 그 정도면 상처가 맞지. 상처의 원인이라고 해야 정확할까. 나의 내면으론 이미 삭막한 도시의 아침 풍경이 비집고 들어왔고, 마음의 안팎은 구분되지 않는다. 상처의 인과因果가 섞인다.

8차선 건너편으론 수십 종의 생활용품들이 노란 박스에 담긴 채, 노란 종이에 쓰인 가격표들을 흔들어대는 중이다. 1,500원, 1,000원, 700원, 500원…. 폭탄 세일이다. 대륙 간 탄도 미사일처럼, 빨간 숫자들이 넓은 도로를 건너와 나의 가슴에 푹푹 꽂힌다. 거리의 가격표들이 죄다 다부진 탄두들 같다.

종로 거리의 어느 건물, 2·3층만 올라가도 도시의 생채기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오래된 골목엔 부숴진 슬레이트 지붕들이 덮여 있고, 이곳저곳에서 도심 재개발을 위한 공사들도 한창이다. 주황색 포클레인들이 도심의 밑바닥을 박박 긁어댄다. 버려진 집기들이 어지러이 널린 담벼락들도 여전하다. 제각각의 상처들이다. 그러나 부끄럼을 모르는 자본의 공간에서 영업과 마케팅을 위한 카피와 숫자만큼 아픈 상처는 없다.

도심 곳곳의 상처들은 정말 우리를 치유할 수 있을까.

도시들은 위독하다

가끔은 현대의 모든 도시들이 병중病中이란 생각도 한다. 철과 유리와 모래를 구태의연한 재료들로 치워버린 첨단의 소재들이 만들어낸 도시는 겉보기엔 멀쩡하다. 세련되고 화려하고 때론 우아하다. 낮은 조명들이 초저녁, 지상에서 예리한 각도로 고층 건물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도시 전체가 별천지로 변신한다.

그러나 아침의 출근길, 빌딩 숲으로 향하는 활기찬 젊음들이 썰물처럼 자신들의 사무실로 흩어지고 나면 거리는 조금씩 침울해진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린 노년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거리를 활보하고, 지하철역 주위에선 일군의 노숙인들이 늦잠을 깬다. 시도 때도 없는 매연과 미세먼지가 가세해 건물과 대기가 함께 잿빛으로 변해가는 동안, 풍경은 음울해진다. 도시는 위독하다. 병문안을 기다리는 중이다.

자연과 절연한 도시는 디스토피아에서 멀지 않다. 영화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좀비 친화형 도시'들은 그저 상상 속의 일일까. 숱한 도시들이 위태로운 상태로 인공호흡을 기다린다.

젊은 아티스트의 싱글은 좀비 도시를 양산하는 문명을 비판하지 않는다. 창작자로서 그는 도시의 살풍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조울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아파할 뿐이다. 예술은 원래 그런 거니까, 비애를 분류하고 등급화하는 대신 실감實感할 뿐이니까. 그러나 아프게, 뼈저리게.

그의 노래를 듣는 건 그렇게 민감하고 솔직한 실감이, 반전처럼 치유의 가능성을 포착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게다가 내 상처에서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 아닌가. 정말이지, 낙엽 지고 눈송이 휘날리는 어느 날, 머리 위로 총총한 별들이 휘황하게 떴으면 좋겠다. 젊은 아티스트의 노랫말처럼, 힘겨운 도시를 치유해 줄 별, 한때는 너와 나의 상처였던 그 별들이 흐드러졌으면 좋겠다.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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