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미친 등록금’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기자 2023. 5. 29.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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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등록금이 고등학교 학원비보다 싸고, 펫 유치원보다 싸다며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국사립대총장협의회 사무처장의 말이라고 한다. 중앙일보는 이 말을 인용하면서 등록금 인상 주장에 힘을 보탰다.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학원 수강료가 대학 등록금보다 비싸고, 강아지·고양이 유치원비가 대학 보내는 것보다 더 비싼 현실을 개탄할 것이다. 하지만 대학 운영자들은 거꾸로 분개한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저 말은 대학 운영을 학원 운영이나 반려동물 유치원 운영과 다를 바 없는 영리사업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임을.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대학들이 등록금 인상의 근거로 대는 것은 ‘물가 상승’이다. 얼마 전 대교협은 반값등록금 정책으로 등록금을 동결한 결과, 지난 10년간 대학 손실액이 2조원이 넘는다는 연구보고서를 내놓았다. ‘2조원’은 어떻게 계산한 값일까. 현재 등록금 인상률은 물가상승률의 1.5배 이내로 법정 상한선이 정해져 있다. 대교협 자료집에 따르면, 법정 상한선 최대치까지 매년 등록금을 올렸다면 지난 10년간 벌어들였을 등록금 수입 추정액은 10조9052억원인데, 실제 등록금 수입은 8조7470억원이었으므로 차액인 2조원만큼 손해를 본 것이란다.(<고등교육 현안 정책 자문 자료집>) 참 희한한 셈법이다. 거꾸로 대학 강사나 청소 노동자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대학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대학들이 막대한 재정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하는 기간 동안에도 적립금은 산처럼 쌓여갔다. 올해 2월 기준 사립대 적립금은 총 10조6202억원이다. 2020년 대학 알리미에 공시된 사립대 적립금은 8조640억원이었다. 대부분 등록금을 받아 쌓아온 돈이다. ‘반값’이나 ‘동결’이라고 말하지만, 대학이 그동안 등록금을 반만 받은 것도 아니고, 등록금을 동결한 것도 아니다. 반값등록금은 이름만 반값일 뿐, 국가장학금을 통한 소득수준별 등록금 보조 정책으로 변형돼 실시되었다. 정부는 국가장학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학부 등록금 인상을 억제해왔지만, 대학들은 학부가 아닌 대학원과 외국인 학생 등록금은 꾸준히 올려왔다.

대학등록금 인상률 억제 정책은 어떤 배경에서 도입되었던가. 2008년 대학등록금 인상률을 물가상승률 2배 이내로 제한하는 법안을 처음 제안한 것은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이었다. 대학등록금이 매년 높은 인상폭으로 가파르게 올랐기 때문이다. 1989년 노태우 정권은 사립대 등록금 자율화 조치를 단행해 대학이 맘껏 등록금을 올릴 수 있게 해줬다. 1989년부터 오르기 시작한 등록금은 1996년까지 7년 연속 매년 10% 이상 증가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 사립대 연간 평균 등록금은 100만원 이하였지만, 1995년엔 323만원이 됐다. 외환위기로 전 국민이 고통을 겪던 시기에도 등록금 고공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2002년 김대중 정부 말기에는 국공립대 등록금도 자율화됐다. 2009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미국 다음으로 대학 등록금이 비싼 나라가 됐다. 지금은 세계 5위다. ‘미친 등록금’이란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2009년 한강에서 고려대생의 사체가 떠올랐다. 등록금 마련에 지치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학생이었다. 2010년에도 학자금 대출을 못 갚고 고민하던 대학생들이 잇달아 목숨을 끊었다. 극단적 선택을 한 학생 옆에 복권과 학자금 대출 서류가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 대학 등록금 납부 마지막 날에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한 모녀의 이야기 등 ‘등록금 자살’로 기사를 검색하면 ‘등록금 지옥’에서 벌어진 수많은 비극들이 줄을 잇는다.

당시 경찰청 발표에 따르면 2007년 232명, 2008년엔 332명, 2009년엔 249명 등 한 해 수백명의 청년들이 스트레스와 경제적 고통으로 목숨을 끊었다. 청와대 앞에서는 등록금 고통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대학생 추모집회가 열렸고, 2011년 반값등록금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됐다. 등록금을 대학이 맘대로 올리지 못하도록 한 정책은 이런 죽음의 행렬 끝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사회적 타살’이라 불렀던 그 죽음은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대학들이 다시 ‘등록금 자율화’를 이야기한다. 학생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다. 대학 재정위기를 등록금 인상으로 해결하려는 건 가장 쉬운 방법이자 가장 나쁜 방법이다. 지금 경제상황은 10년 전보다 훨씬 안 좋다. 인플레이션이 삶을 덮치고, 고난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도착한다. 위기를 아래로 전가하는 등록금 인상 말고 다른 대책을 강구하라. 청년들을 죽이고 부모 가슴을 멍들게 했던 ‘미친 등록금’의 나라로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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