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왜요, 이걸요, 지금요?”

박병률 기자 2023. 5. 29.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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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노무현의 시간은 지루했다. 어떤 정책도 단번에 되는 것은 없었다. 제안했다가 안 되면 후퇴하고, 그러다 다시 제안하기를 반복했다. KTX 천성산 터널 공사, 경주 중저준위 방폐장 건설 등 난제들이 그런 과정을 겪었다.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은 신년연설과 국정연설, 시정연설을 통해 ‘왜, 이걸, 지금 해야 하는지’를 직접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대통령의 연설 뒤에는 항상 나라가 시끌벅적해졌다. 때로는 보수가, 때로는 진보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했다. 지켜보는 국민들은 피곤했다. 뭐 하나 속시원히 해결되는 게 없었다. 대통령이 저렇게 추진력이 없나, 싶었다.

박병률 경제부장

그랬기에 이명박 정권이 출범했을 때 ‘살짝’ 기대한 것이 있었다. 정말 필요한 국정과제라면 대통령이 책임지고 밀어붙여도 되는 것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 이명박은 최고경영자(CEO) 리더십을 내세웠고, 롤 모델은 박정희였다. 이런 생각이 짧았다고 깨닫는 데는 몇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취임 두 달 만에 미국산 쇠고기 전면개방을 추진했다. 미국 대통령 전용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를 방문해 골프 환대를 받은 직후였다. 시민들은 식탁 안전을 우려했지만 정부는 “왜, 이걸, 지금 해야 하는지” 설득하는 데 부족했다. 곧 거센 저항에 부딪혔고, 지지율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통령은 나 홀로 캄캄한 인왕산 중턱에 앉아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행렬을 지켜봐야만 했다. 미국산 쇠고기는 지금도 30개월령 미만으로 주요 위험 부위(편도, 뇌, 척수, 소장 끝, 머리뼈 등)가 제거되어야 수입이 가능하다.

두 대통령이 생각난 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일외교를 보면서다. 한·일관계 복원을 향한 윤석열 정부의 행보는 ‘노빠꾸’다. 현지를 다녀온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시찰단도 그랬다. 누가 위원으로 참석했는지, 어떤 일정으로 갔는지, 무얼 봤는지 지금도 모른다. 일본 주재 한국 특파원들은 이런 시찰단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현지에서 술래잡기를 해야 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마저 “시찰단이 투명하게 운영되지 못한 것에 대해 굉장히 비판받아야 한다”며 “시찰단에도 분명 국민 세금이 들어가 있을 텐데 그 명단조차 공개하지 못하는 건 어느 누구도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추정해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 강제동원(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한 접근도 비슷하다. 답이 정해져 있으니 따라오라고 할 뿐 적극적인 설득은 부족하다.

취임 2년차를 맞은 윤 대통령의 대국민 소통 방법이 달라졌다. 출근길문답(도어스테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는 국무회의 생중계로 채워졌다. 설득하고 해명하는 자리가 아닌 일방적으로 지시를 하는 자리다. ‘왜, 이걸, 지금 하는지’ 궁금한 게 많지만 물을 데도, 답해줄 데도 없다. 들어보니 각 부처도 국무회의 직후 하달된 대통령실 지시사항에 허둥대는 일이 잦다고 한다. 대통령 인터뷰는 미국·일본 등의 외신들과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 껄끄러운 국내 언론은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당장 소낙비는 피할 수 있어도 근본 해결책은 아니다. 질문은 잠재됐을 뿐 해소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괴로웠지만 지금 돌아보면 설득의 시간은 축적의 시간이었다. 지독한 갈등을 겪었던 천성산 터널과 경주 방폐장은 정권이 몇번이나 바뀌어도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 반면 4대강 사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 해체와 유지로 갈등을 겪고 있다. 4대강 운하사업으로 추진됐다 변경되는 과정에서 대국민 설득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도 따지고 보면 설득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30년을 내다봐야 하는 에너지 정책이라는 점에서 반대하는 학계와 산업계, 시민들의 의견을 더 적극적으로 들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지금 윤석열 정부는 탈원전을 뒤집는다고 하는데, 탈원전 폐지 역시 지속 가능할지는 자신할 수 없다. 탈원전에 찬성하는 국민들을 설득할 시간도, 노력도, 의지도 부족해 보인다.

정권이 추진한 사업은 다음 정권이 뒤엎을 수 없다고 믿은 적이 있다. 그러나 한번 박으면 빼지 못할 ‘대못’은 없었다. 반대 여론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정책은 언제든지 수정되고 폐지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는 엄청난 비용을 치르게 된다는 점에서 권장할 일은 아니다. 설득되지 못하는 시민들은 끝까지 묻는다. “왜요? 이걸요? 지금요?”라고. 그 답을 주지 못하는 이상 시간은 대통령의 편이 아니다.

박병률 경제부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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