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태산보다 높고 무섭던 보릿고개
24절기 중 여덟 번째인 ‘소만’이 지났다. 이즈음엔 햇볕이 푸지고 만물이 생동해 세상에 생명들이 가득 차기 시작한다. 그래서 소만(小滿)이다. 하지만 요즘 피부로 느끼듯이 찬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장소나 날씨에 따라 바람이 차갑게 와닿는다. “소만 바람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속담도 있다.
맹하(孟夏·초여름)에서 성하(盛夏·한여름)로 치달으며 모든 잎이 연록의 빛을 더하는 이때에 푸르름을 잃는 것도 있다. 대나무다. 새 생명인 죽순에 영양분을 내주느라 이 무렵 대나무는 누런빛을 띤다. 자신의 몸을 살피지 않고 자식들을 돌보는 데 모든 것을 내놓으시는 우리의 부모처럼 말이다. 이렇듯 소만 무렵에 누렇게 변한 대나무를 일컬어 죽추(竹秋)라 한다. ‘대나무의 가을’이다.
이맘때 누레지는 것이 또 있다. 보리다. 지난해 심은 가을보리가 수확기를 앞두고 황금빛으로 물든다. 이 무렵은 옛사람들에겐 태산보다 높고 무섭던 보릿고개의 막바지였다. 요즘에는 보리가 영양식이자 가끔 먹는 별식이지만, 수십년 전만 해도 이때의 햇보리는 굶어 죽을 절망에서 목숨을 이어준 귀한 작물이었다.
이런 ‘보리’는 15세기 문헌에도 나올 정도로 우리가 오래전부터 써온 말이다. 그러나 어원은 분명치 않다. 다만 영어 발리(barley)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보리를 비슷하게 발음한다는 점으로 미뤄 보리가 전파될 때 이름도 같이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보리와 관련해 일상생활에서 자주 틀리는 말에는 ‘깡보리밥’이 있다. 깡보리밥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고 그것만으로 이루어진”을 뜻하는 접두사 ‘강’에 ‘보리’와 ‘밥’이 더해진 ‘강보리밥’을 강하게 소리 낸 말이다. 따라서 문자의 변천만 따지면 표준어가 될 만한다.
하지만 1989년 3월부터 시행된 표준어 규정에서 ‘깡보리밥’을 버리고 ‘꽁보리밥’으로 쓰기로 했다. 사람들이 깡보리밥보다 꽁보리밥을 더 많이 쓰기 때문이다. “보리쌀로만 지은 밥”을 뜻하는 말로 ‘맨보리밥’도 쓰이는데, 이 또한 표준어가 아니다.
엄민용 기자 margeu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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