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성 판단’ 보강했다던 경찰 ‘체크리스트’…현장선 무용지물
신당역 스토킹 살인 계기로
개선안 도입 4일 만에 사건
객관화가 목적인 체크리스트
심리적 요인은 배제돼 한계
경찰에서 지난 26일 교제폭력 조사를 받은 지 1시간 만에 헤어진 연인을 보복살인한 피의자는 경찰로부터 범죄 위험성 ‘낮음’ 평가를 받은 상태였다. 지난해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을 계기로 보강·개선된 ‘위험성 판단 체크리스트’가 경찰 조사 과정에서 사용됐음에도 비극을 막지는 못했다. 형식적인 점검표만으로는 여전히 관계성 범죄 피해자의 심리 상태나 피의자의 보복 위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금천구에서 지난 26일 ‘연인 보복살인’ 사건이 발생하기 1시간30분쯤 전 피해 여성 A씨(47)는 경찰에 피의자 김모씨(33)를 교제폭력으로 신고했다. 임의동행한 관할 지구대는 두 사람을 분리해 조사를 진행했다. 통상 범죄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보복당할 우려가 있을 때 경찰은 ‘범죄 피해자 위험성 판단 체크리스트’를 작성한다. 이 체크리스트는 피해자 신변보호 수단을 마련하는 근거가 된다.
이번 사건에서도 경찰은 A씨를 면담한 후 그의 진술을 토대로 피의자 김씨에 대한 위험성 체크리스트를 작성했다. 김씨는 ‘매우 높음, 높음, 보통, 낮음, 없음’ 5단계 중 ‘낮음’으로 평가됐다. 이에 따라 A씨는 오전 7시7분쯤 귀가조치됐지만 10분여 만에 상가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씨에게 피습당했다.
이번에 사용된 위험성 평가 체크리스트는 경찰청이 지난해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을 계기로 ‘스토킹 등 관계성 범죄’에 대한 문항을 보완해 지난 22일부터 현장에 배포한 것이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때도 경찰이 피의자 전주환(32)의 범죄 위험성을 ‘없음 또는 낮음’ 단계로 평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다. 기존에는 범죄 유형 구분 없이 일괄적으로 문항을 사용했지만, 개선된 체크리스트에서는 스토킹·가정폭력·데이트폭력 범죄에 대해 10개의 별도 문항을 추가했다. 하지만 개선안이 도입된 지 불과 나흘 만에 ‘교제폭력 신고 보복살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정서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 교제폭력·스토킹 등 성폭력의 위험성을 계량적인 체크리스트로 측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윤정숙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번 사건처럼) 급격한 폭력으로 진전되는 경우는 가해자의 심층 면담을 통해서나 알 수 있지, 겉으로 드러나는 위험성 평가 항목으로는 잡히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객관화’가 목적인 체크리스트는 돌발 범행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관계 변화 등 심리적 요인이 배제돼 있어 제한이 따른다는 것이다.
윤 선임연구위원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경찰들의 적극적인 피해자 보호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현장 경찰은 교제폭력이 강력범죄로 비화할 가능성이 없는지 심각하게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도 “체크리스트 문항만으로는 가해자의 과거사 등 사건의 특수성을 다 파악하기 힘들다”며 “위험성 판단표는 신변조치 판단에 있어 참고자료 정도로 제공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지현·강은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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