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 위험성 낮음, 연인은 정상가족 아님…비정상 대응이 부른 ‘교제살인’

강은·전지현 기자 2023. 5. 28.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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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폭력 신고 후 ‘보복살인’에
경찰 조치·규정 미흡 지적 봇물

‘교제폭력’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30대 남성이 조사 직후 상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법적·제도적 허점에 대한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추가 범죄로 이어질 ‘위험성’을 더 높게 보지 않은 경찰의 초동조치가 부적절했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동시에 가정폭력처벌법이나 스토킹처벌법처럼 보복 가능성에 대비한 피해자 보호조치 규정이 촘촘해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피해자 A씨(47)는 지난 26일 오전 5시40분쯤 경찰에 김모씨(33)를 교제폭력으로 신고했다. 경찰은 이들을 23분간 조사했으나, 적절한 보호조치를 하지 않았고 결국 보복살인으로 이어졌다. 먼저 조사를 마친 김씨는 A씨의 집에서 흉기를 들고나와 상가 지하주차장에서 대기했으며 A씨가 나타나자 수차례 흉기로 찔렀다.

서울 금천경찰서는 지난 27일 언론브리핑에서 “앞선 신고에서 A씨와 김씨 모두 ‘팔을 잡아당긴 정도’의 경미한 폭행이었다고 진술했다”면서 “A씨에게 스마트워치 지급 등 보호조치를 안내했으나 주거지 순찰만 원한다고 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피해자 의사를 고려했다’는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상황 판단이 안이했다는 지적을 피하기는 어렵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교제폭력 등의 사건에서 통상 피해자를 먼저 내보낸다”면서 “가해자가 먼저 나가면 피해자가 어디로 이동할지 알고 기다릴 수 있지 않냐”고 말했다.

경찰이 피해자 신변에 대한 위험성을 ‘낮음’으로 평가한 것도 잘못된 판단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피해자가 진술하는 폭행의 정도가 가벼웠더라도 ‘이별 후 폭력’은 추가 범죄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A씨는 사건 발생 나흘 전 김씨에게 이별을 통보한 상황이었다.

가정폭력이나 스토킹범죄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교제폭력도 피해자 보호를 실효적으로 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가정폭력의 경우 경찰이 피해자 동의 없이도 가해자로부터 분리해 보호조치를 하는 등 적극적인 개입이 가능하다.

교제폭력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가 확연하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교제폭력으로 검거된 사람은 2016년 8367명에서 2021년 1만554명, 지난해에는 1만2841명으로 증가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1년 12월 “가정폭력처벌법 적용 대상을 교제폭력까지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으나 아직 현실화된 것은 없다.

젠더폭력 전문가들은 피해자 보호조치가 지나치게 ‘정상가족’ 틀 안에 매여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윤정숙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해외에서는 (분리조치 등) 보호 범위를 정서적으로 ‘친밀한 파트너에 의한 폭력’인지로 폭넓게 본다”고 말했다. 윤 연구위원은 이어 “피해자는 ‘설마 그럴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서 피해자 의사에만 의존해 보호조치를 결정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면서 “피해자 의사를 순순히 따르기보다는 보호조치를 최대한 두껍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강은·전지현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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