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대전’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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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이정국 | 문화팀장
‘걸그룹 대전.’
지금 대중문화판에서 가장 뜨거운 키워드다. 28일 국내 최대 음원사이트 멜론 차트를 보면 상위 10곡 중 8곡이 ‘아이브’ ‘(여자)아이들’ ‘에스파’ ‘르세라핌’ 등 걸그룹의 곡이다. 이들 걸그룹이 4월부터 2~3주 간격으로 신곡을 발표하면서 치열한 순위 경쟁을 펼치는 상황이라 ‘대전’이란 수식어가 붙은 것.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방탄소년단(BTS)의 공백과 보이그룹의 국외 활동 치중이라는 환경이 작용한 탓도 있지만, 많은 전문가는 지난해 데뷔한 ‘뉴진스’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뉴진스는 에스엠(SM)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아 소녀시대, 샤이니, 에프엑스, 엑소, 레드벨벳 등을 히트시켰던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첫 작품이다.
뉴진스 등장 전에는 ‘기 센 언니’ 이미지를 가진 이른바 ‘걸크러시’ 콘셉트가 주류였다. 2세대 걸그룹 대표주자였던 와이지(YG)의 투애니원(2NE1)이 걸크러시 콘셉트로 큰 성공을 거둔 뒤, 3세대 걸그룹 ‘블랙핑크’가 이를 이어받아 글로벌 원톱 걸그룹으로 성장했다. 에스엠은 아예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를 끌어와 걸크러시를 확장했다. ‘광야’라는 가상세계에서 ‘블랙맘바’라는 적과 싸우는 ‘여전사’ 세계관의 걸그룹 에스파를 2020년에 공개하며 4세대 걸그룹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하지만 이내 케이팝은 ‘걸크러시 과잉’이란 벽에 부딪혔다.
뉴진스는 이 흐름에 반기를 들었다. 별다른 세계관도 없는 레트로(복고) 하이틴 콘셉트에, 귀에 쏙 박히는 쉬운 멜로디와 간결한 춤 동작을 내세워 순식간에 음원 차트를 점령하며 대세 걸그룹으로 뛰어올랐다. 중장년층까지 팬으로 끌어들여 케이팝의 외연을 넓혔다. 멜론 차트에서 ‘오엠지’(OMG) ‘디토’ ‘하이프 보이’ 3개 노래로 지난 1~3월 석달 동안 1~3위를 독식하는 초유의 기록도 세웠다. 빌보드 메인 차트 ‘핫 100’에서 ‘오엠지’가 6주 동안 머물고, 스웨덴 음원 스트리밍 업체인 스포티파이에서 케이팝 그룹 최단 기간 10억 스트리밍을 달성한 뉴진스는 <타임>이 선정한 ‘2023 차세대 리더’에 이름을 올렸다.
뉴진스 돌풍은 경쟁 기획사를 자극했다.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의 퇴진과 회사의 인수합병 파동으로 최근 뒤늦게 복귀한 에스파는 기존의 세계관을 버리고 신곡 ‘스파이시’에서 하이틴 콘셉트로 선회했다. 전략은 적중했다. 그들은 하이브의 르세라핌을 밀어내고 방송 순위와 음원 차트를 석권하며 4세대 걸그룹 선두주자의 저력을 보여줬다. 에스파의 변신과 성공은 기민하게 시장에 반응하고 변화하는 케이팝 산업의 경쟁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무한경쟁의 어두운 측면도 살펴봐야 한다. 요즘 걸그룹 활동을 보면 ‘숨 막힐’ 정도다. 새벽부터 사전 녹화를 하는 주요 음악순위 프로그램 ‘풀방’(목·금·토·일 연속 출연)은 기본, 라디오에 온갖 예능 프로그램, 유튜브 채널까지 출연한다. 순위 프로그램 생방송을 마치고 바로 대학 축제로 이동해 공연하기도 한다. 이 와중에 필수가 된 쇼트폼 챌린지 영상까지 찍는다. 팬들이 댓글로 “도대체 스케줄 몇개를 뛰는 거냐”고 할 정도다. 아이돌의 가혹한 스케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미성년자가 많은 걸그룹 특성상 장시간 노동 문제는 짚어봐야 할 문제다. 오죽하면 한 걸그룹 멤버가 “‘잠은 죽어서 자자’가 인생 슬로건”이라고 했을까.
마침 이른바 ‘이승기법’으로 불리는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안’이 지난달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했다. 개정안은 12살 미만 청소년 예술인의 경우 주 25시간(하루 6시간), 12~15살은 주 30시간(하루 7시간), 15살 이상은 주 35시간(하루 7시간)까지 노동 시간 상한을 두었다. 한국연예제작자협회 등 엔터산업계는 현실성도 없고 산업 경쟁력이 약화한다며 반발하는 중이다.
치열한 경쟁이 지속되면 사람은 결국 지친다. 케이팝의 가장 소중한 자산은 바로 사람 아닌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진 말아야 한다.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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