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전 칼럼]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수십년 이래 유행병이 성행하여 여름, 가을 사이에는 한 사람이 병에 걸려도 백명, 천명의 사망이 계속된다. … 날이 서늘해지고 전염병이 없어지면 다시 즐거워하며 지난 일을 잊어버리니 가히 어리석고 불쌍하다.” 1882년 김옥균이 쓴 <치도약론>에 나오는 구절이다.
지난 5일(현지시각) 세계보건기구는 코로나19에 대한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해제했다. 현재 국내에서도 하루 평균 약 10명의 사망자가 보고되고 있기에 이것이 유행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약 694만명의 사망자와 7억7천만명의 확진자를 야기한 인류사의 큰 재난을 반성 없이 보낼 수 없다. 이 초유의 사건에 완벽히 대응할 순 없었어도 우리가 조금 더 탐욕을 줄여 현명하고 헌신적으로 노력했다면,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살아남은 우리가 자축뿐 아니라 성찰의 형벌도 감수해야 할 이유다.
첫째, 현 코로나 소강 국면은 인간이 이루어낸 게 아니라 하늘의 축복, 코로나바이러스의 자비, 우연한 행운일 뿐이다. 보건의료 현장 종사자들의 헌신과 시민들의 협력이 기여한 바가 없지 않으나 현재 코로나 변종의 감염률과 치명률이 10배가 넘었다면, 지금 우리는 이미 죽었거나 지옥 속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둘째, 코로나 팬데믹은 천재지변이 아니었다. 동굴 속에서 잠자던 코로나바이러스를 깨운 것은 인간의 무분별한 생태 파괴였는데, 이 근본 원인은 여전히 완고하게 건재하다.
셋째, 코로나는 약자에게 더 혹독했다. 2020년 미국 성인 대상 연구에서 코로나로 인한 연령 보정 사망률은 백인 여성에 견줘 히스패닉 남성이 27.4배나 높았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코로나 확진자 9148명 중 가난한 의료급여 수급권자의 사망률이 보험료 상위 20%인 사람들에 비해 2.81배 높았다.
넷째, 우리의 인내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이기적이었으며, 타인의 죽음에 쉽게 둔감해졌다. 팬데믹 초기 많은 이들이 마스크, 백신, 구호물자도 없이 죽어갔다. 어쩔 수 없는 조처였다고 믿는 이들이 많지만, 마스크 좀 보내달라는 인도·콜롬비아 친구들의 부탁을 해외배송 금지 때문에 들어주지 못한 것이 나는 한없이 미안하다.
다섯째, 국제 협력의 규범이 작동하지 않았다. 70여년 전 유엔 설립 이후 생긴 각종 규범은 부자 나라들의 이기심과 다국적 제약회사의 영리 추구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빈곤국 국민 20%가 맞을 수 있는 백신을 무료 공급해주자는 코백스 프로젝트가 부국의 백신 독점과 소극적인 재정 지원으로 실패한 게 그 예다.
여섯째, 정치화가 피해를 키웠다. 우리 정부의 초기 대응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는데, 투명성이 정부 신뢰로 이어지며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행의 장기화로 인한 사안의 복잡화와 피곤 등에 더해 대통령선거라는 정치가 개입해 공론장은 합리성을 잃고 자극적인 정보가 넘쳐나고 헌신이 폄하되었다. 시민들은 각자도생을 택했고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았다.
유행이 잦아든 이 선물의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자잘한 기술적·행정적 문제도 개선해야겠지만, 우리의 생존 회복력이 지속될 수 있도록 사회 전반의 근본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다. 그 재구성의 원칙은 “모든 존재가 함께 건강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건강할 수 없다”가 되어야 한다.
생태를 파괴하는 막개발, 공장식 축산을 중단하고, 백신 구입 시 10분의 1을 저소득 국가에 할당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등 근본적인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대규모 유행의 장기화에 따르는 복합 사회문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 여러 부처에 대한 통합 리더십과 시민 참여를 의무화하는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사적 권력,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을 걸러낼 수 있는 민주적 장치들이 필요하다. 국가와 전 지구적 차원에서 공공 제약회사 등 공공 인프라의 양적·질적 확대를 진행하고 민간 부문의 공공성을 좀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사망자 694만명에 대해 진정으로 애도하는 것이다. 진정한 애도란 영원히 잊지 않는 것이다.안치실조차 찾지 못해 즐비하게 널려 있던 주검들, 바나나 껍질로 만든 마스크를 써야 했던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마스크 한장을 양보하지 않은 부끄러움을 잊지 않는 것이다. 철학자 헤겔은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건,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불안하다. 이쯤에서 되뇌어 기억할 말이 있다. 영화 <터미네이터>(종결자)의 대사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I’ll be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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