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김창완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가

한겨레 2023. 5. 2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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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어렸을 적 ‘산울림’의 음악은 예쁜 물감들로 만들어진 ‘동화의 성' 그 자체였다. 아름다운 빨노초파 원색의 음표들로 둘러싸인 그 성안에 들어가면 예쁜 투명 색유리를 통과한 음악 빛깔이 보이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받았다. 그때 받은 빛깔은 ‘개구쟁이’처럼 크라잉넛의 음악 어딘가에 묻어있으리라. 초중고 동창 녀석들인 크라잉넛은 산울림이 깔아놓은 주단을 밟고 미친 듯이 떼굴떼굴 구르며 28년 동안 달려왔다. 그렇게 산울림의 음악과 함께 성장해 온 크라잉넛이 실제로 김창완 형님과 술잔을 비워가며 밤을 채워가는 사이가 되었다니 아직도 신기할 뿐이다.

얼마 전 김창완 형님의 개인전 ‘붓으로 보다’ 전시에 다녀왔다. 김창완 형님은 라디오 디제이를 하면서 매일 라디오 오프닝 멘트를 직접 쓰시고, 음악과 연기뿐 아니라 그림도 그리고, 자전거도 사계절 거의 매일 타시고 그 와중에 풍류도 빼놓지 않는다. 도대체 김창완의 시간은 어떻게 흐른단 말인가? 혹시 ‘시간 축지법' 같은 것을 사용하시는 게 아닐까?

비가 슴슴하게 내리던 평양냉면 같은 날씨였다. 갤러리도 오래된 양옥을 개조해 만든 곳으로, 편안한 고향집 같은 분위기였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도 마주치고 명절날 철딱서니 없이 떡국 얻어먹으러 온 막내처럼 많은 분께서 반겨주셨다. 따뜻한 공기가 흐르고, 화려하진 않지만 어렸을 적 예쁜 물감으로 만든 동화의 성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입구 쪽 벽에는 <푸른 눈물> 작품이 지쳤던 내 마음 대신 울어주고 있었다. 행복한 푸른 눈물이었다. 푸른 장미잎이 새벽 호수에 조용히 떨어지듯 평온해졌다. 건너편 벽에는 와인 코르크 뚜껑을 오브제로 만든 <내 술친구>라는 작품이 눈이 풀린 개구쟁이 표정을 지으며 걸려 있었다.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고 한경록이 아니냐고 많이들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동안 김창완 형님은 꽃만 100여 점 그리셨다는데, 전시에 가지고 온 작품만 30점 정도라고 하셨다. <파란꽃>이란 작품에서는 떨어지고 있는 파란 꽃잎을 통해 그림 안에 시간을 담아내셨다고 한다. 그림 속에 시간을 담으니 꽃잎은 시간(詩間·시 사이)을 낙화하고 있었던 것일까? 시간이란 무엇일까?

‘시간'의 신비롭고 오묘한 의미에 관심 없는 철모르는 아이처럼 살고 싶은데, 시계 초침 소리가 복싱장에서 샌드백 텅텅 치듯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확실히 살아있다. 우리도 시간도. 불현듯 불안감이 불청객처럼 매너 없이 찾아올 때, 김창완 형님의 ‘시간'이라는 노래가 위안을 준다.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중략)/ 후회할 때 시간은 거꾸로 가는 거야/ 잊지 마라 시간이 거꾸로 간다 해도/ 그렇게 후회해도 사랑했던 순간이/ 영원한 보석이라는 것을”(‘시간’ 김창완)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니 우리 모두는 그 존재만으로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 그 누가 뭐라 비난해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그 누구와 비교할 필요도 없다. 화려하게 반짝이며 빛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아련한 상처는 시간이라는 파도가 부드럽게 감싸줄 것이다. 지나고 나면 산울림의 ‘청춘’처럼 처연하고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될지 모른다. 시간이란 두렵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형님께서 술이라도 한잔 사 주실 때면 술잔 위에 넘실거리는 하얀 막걸리를 화선지 삼아 시를 써주시기도 하고 지혜의 말씀을 전해 주시기도 한다. “다시 순수로 돌아가야 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음악을 시작한 이유는 순수한 즐거움 때문이었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리고 “예술은 구차하면 안 된다”라고도 하셨다. 예술과 관객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감정은 전달된다. 덧칠하고 설명할수록 상상력의 불씨를 꺼뜨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놀이는 오래가지만 장난은 금방 사라진다. 항상 진심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형님은 비싼 캔버스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꼭 비싼 재료가 아니더라도 진심은 전해진다고 하셨다. 항상 소박하시다. 조용한 골목길에 위치한 집 같은 갤러리의 투명 테이프로 고정된 와이어에 걸린 조금은 삐뚤어진 그림들이었지만 그 역시 아름다운 인생 같고 생명력이 느껴졌다. 날씨가 흐려서 꽃들은 더욱 선명했고 웃음과 향기는 은은하게 퍼져있었다. ‘붓으로 보다’ 전시는 따뜻하고 소박하지만 그 향기는 묵직한 기억으로 남는다.

누군가 형님께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냐고 물어봐서, 아무 생각 없이 연기한다고, 자신이 연기를 하는 줄도 모르는 상태로 연기한다고 답했다 하셨다. 슬픈 노래도 슬픔에서 빠져나와서 노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김창완 형님의 시간은 때로는 음악, 연기, 그림 그 자체로 몰입되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자유로이 흐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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