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문화의 산실 제주

한겨레 2023. 5. 2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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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5일 제주도립미술관은 '무릉도원보다 지금 삶이 더 다정하도다'라는 이름으로 동양화 100년을 집대성해 보는 전시를 열었다.

100년의 기간을 아우르며 60여명이 넘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데 제주 작가를 다섯도 채울 수 없었던 것은 제주의 동양화 전통이 약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여전히 제주도미술협회는 서예를 서양화와 동양화같이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보고 있다.

제주도는 사실 유명한 동양화가는 없었으나, 유명한 서예가, 혹은 서화가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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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제주 서귀포시 소암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는 서예가 소암 현중화 선생 대표작 <달아 달아 밝은 달아>(70.0×136.7㎝, 1989년). 연합뉴스

[서울 말고] 이나연

제주도립미술관장

지난 5월5일 제주도립미술관은 ‘무릉도원보다 지금 삶이 더 다정하도다’라는 이름으로 동양화 100년을 집대성해 보는 전시를 열었다. 1910년대~1960년대, 1960년대~2000년대, 2000년대~2020년대까지 기간별로 나눠 세 권의 고서를 넘겨보는 것처럼 기획했다. 첫 책은 소림 조석진으로 시작해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을 지나 월전 장우성까지 만난다. 두번째는 내고 박생광, 고암 이응노, 운보 김기창, 우향 박래현, 천경자 등 대중적으로 익히 알려진 작가들이 많이 포함됐다. 세번째 책은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만날 수 있는데, 김현수, 박성배 같은 제주 작가와 손동현, 이진주 등 젊은 동양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100년의 기간을 아우르며 60여명이 넘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데 제주 작가를 다섯도 채울 수 없었던 것은 제주의 동양화 전통이 약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지금의 동양화는 그 장르 개념부터 여전히 논쟁적이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가 추구하던 하나의 동양이라는 개념 아래 동양화라는 단어를 썼다. 근대기에 이르러 서양화가 도입되면서, 서양화와 대립하는 개념으로써 동양화는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각 미술대학은 여전히 동양화과와 서양화과를 구분 지어 관련 지식과 기술을 익히도록 한다. 서양화와 동양화의 구분 없이 한국인의 그림을 한국화로 칭하자는 논의도 있었지만, 현재는 동양화의 대체 개념으로 수묵화와 담채화를 포괄해 한국화라는 개념을 쓴다. 1980년 이후부터 발행되는 미술 교과서엔 동양화 대신 한국화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공식적으로 한국화를 권장하는 셈이지만, 필요에 따라 한국화와 동양화를 혼용해 쓰고 있다. 게다가 한국화라는 단어가 공식화하기 이전의 작품들은 당시 시대에 맞게 동양화라 부르는 게 적합해 보이기도 한다. 동양화의 기원을 조금 더 올라가면 문인화에도 다다른다. 서예와 그림이 섞여 있는 문인화의 고유한 조형언어(서화)에서 서예가 미술이 아닌 것으로 분류되면서, 서화, 동양화, 한국화가 필요와 해석에 따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에서 시작된 ‘서예는 미술이 아니다’라는 논쟁이 한국에도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한국에서도 서예는 미술인지 아닌지 아직도 명확한 정리가 어렵다. 여전히 제주도미술협회는 서예를 서양화와 동양화같이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보고 있다. 그리고 가장 많은 회원수를 자랑한다. 제주도는 사실 유명한 동양화가는 없었으나, 유명한 서예가, 혹은 서화가는 많았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됐던 곳이라, 추사관이라는 기념관도 만들어져 있다. 게다가 소암과 청탄도 있었다. 한라산을 기준으로 ‘산북에 청탄, 산남에 소암’이라는 말이 있었고, 청탄 김광추와 소암 현중화는 서예의 미술과의 분리 여부를 떠나 제주미술사를 논할 때 기점이 되는 인물이다. 둘은 일본인 서예가인 쓰지모토 시유라는 같은 스승을 둔 인연도 있다. 소암이 한라산 남쪽 서귀포에 터를 잡고 서예를 쓴 덕에, 국내의 다른 지역에서 소암에게 사사하기 위해 중국이나 일본이 아닌 제주로 유학을 오기도 했다. 소암과 청탄이 있는 동안, 제주는 서예의 거점공간이었다. 청탄은 제주도 최초로 1930년도에 그린 서양화 풍경도 남아있고, 최초로 일본에서 입선한 사진작품도 있다. 서예는 물론, 전각가로 알려지기도 했으며, 분재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소암은 서예에 집중했다. 소암은 자신의 작품들을 제주에 기증했고, 제주는 그 보답으로 2008년에 소암기념관을 마련했다. 작품을 보는 전시실뿐만 아니라 소암의 거처와 작업실 ‘조범산방’이 함께 있어 늘 소암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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