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학의 미리미리] 한국의 트럼프와 추종자들은 다양성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2023. 5. 28.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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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트럼프가 금지시킨 다양성훈련

2020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도널드 트럼프는 다양성훈련을 '위험한 교육'으로 지목하며 다양성훈련 금지 명령을 했다. 트럼프는 이미 미국사회에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다양성훈련은 '반미 정치선동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분열조장 개념 교육'이라고 주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주민을 차별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당선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주민에 대한 구조적인 차별과 폭력을 없애야 한다는 다양성훈련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는 미국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를 가속화시켰다. 트럼프는 블루컬러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가난하게 된 이유가 미국을 떠난 기업과 아시아인들이 고소득 직업군(의사, 과학자, 엔지니어, 회계사 등) 일자리를 뺏고 있는 것에 있다고 주장했다. 실업과 빈곤은 이주민들의 탓이 아님에도 이는 아주 잘 먹혔다. 근본적인 문제를 발견하고 제대로 된 해결을 하기 위한 노력은 이해를 시키기도 어렵고 실제 해결도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손쉬운 소수자 탓하기가 정치적으로도 이용하기 용이하기 때문에 트럼프는 이를 적극 활용했다.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인 저비용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작동과 분배의 실패, 경제력에 따른 차별을 철저하게 숨겨졌다. 그리고 블루컬러 백인 노동자는 근본적인 문제인 경제구조와 분배의 실패가 아닌,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을들의 전쟁'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손쉬운 소수자 탓하기를 선택하면서 진짜 문제의 해결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지지자들의 표가 움직이며 트럼프가 당선되도록 만들었다.

▲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 연합뉴스

소수자 존재 자체를 '범죄'로 여기는 사람들

근본적인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할 의지가 없기로는 한국 사회도 못지 않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만 하더라도,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정신질환과 공용화장실을 원인으로 발표했다. 이는 정신장애인 존재 자체가 '잠재범죄자'인 마냥 낙인을 강화했고, 진짜 필요한 모두에게 안전한 화장실에 대한 상상을 불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그 어디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는 '페미사이드'와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이 문제는 그들이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기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경찰 뿐 아니라 정치인도 동일했다.

그리고 2022년, 한국도 트럼프식 정치로 당선이 된 정권이 탄생했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 후보와 이준석 당시 당대표는 '더 이상 여성에 대한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이 경험하는 차별, 억압, 폭력을 부인하고 당선됐다. 트럼프는 이주민에 대한 차별이 그의 혐오정치의 핵심이었다면 한국은 여성이 가장 핵심 타겟이었으며 그 다음이 장애인, 노동자, 이주민, 성소수자 등이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도 다양성훈련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미 수 년 전부터 내 이름이나 한국다양성연구소의 단체명을 검색해서 이런 사람을 불러서 교육하지 말라며 민원을 넣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민원들의 내용은 늘 같았는데 성평등, 성소수자, 이주민, 난민, 무슬림을 다루는 김지학 씨를 부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백래시 민원은 7~8년부터 시작됐고 그동안 늘 지속돼 왔지만 최근 그 양상과 정도가 이전보다 훨씬 과감해졌다. '혐오'에 권력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차별에 대해 말하는 것, 페미니즘, 성소수자, 무슬림 등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으며 '사상강제주입'이라는 주장을 한다. 소수자 존재 자체를 '범죄'쯤으로 여기며, 차별이라는 '범죄'를 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사상' '강제' '주입'이라는 참 옛스러운 말은, 마치 오랜 냉전구도 속에서 이념전쟁을 치르며 공공의 적을 만들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적이 필요한 사람들의 익숙한 플로우가 느껴지기도 한다.

'누구의 인권은 빼고'

얼마 전 한국다양성연구소의 사업으로 한 고등학교에서 약 3시간씩 이틀 동안 다양성훈련을 진행했다. 이 사업이 수행된 이후 혐오세력이라 불리는 이들의 민원은 학교, 교육청, 교육부, 시의회, 시청, 국민신문고 등에 2주일 이상 지속되고 있다. 차별금지를 반대하고, 차별할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과거 노동자 계급(프롤레탈리아), 흑인, 장애인, 여성, 어린이가 배제되었던 자본가 계급(부르주아), 백인, 비장애인, 성인, 남성 중심의 부끄러운 인권의 역사를 배움으로 삼지 않는다. 여전히 '누구의 인권은 빼고'라는 사고방식이 스스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여긴다.

여성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며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절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또다른 소수자를 계속해 억압한다. 사회적 다수자를 위한 '그들만의 자유민주주의' 정치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진짜 문제를 외면하는 손쉬운 혐오정치

그럼에도 트럼프 정치가 그랬듯, 윤석열의 차별정치와 다양성훈련에 대한 억압이 힘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이주민들이 당신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하기에는 이주민들이 종사하는 직업이 3D 업종에 치우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주민이 당신의 일자리를 뺏는다'고 하기에는 극단을 치닫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습을 숨기기가 어렵다.

이주민에 대한 비난으로는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의 욕심과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가려지지 않는다. 이때문에 여성을 첫 번째 타겟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업과 빈곤을 걱정하는 남성들의 분노를 이용하는 전략은 동일했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들은 어려서부터 남성들보다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는데 남성들은 군대까지 갔다 와서 머리도 굳고 여성들보다 공부할 시간도 적으니 여성들이 시험을 더 잘 잘 보니 남성들의 일자리를 뺏아가고 있다'는 식의 프레임(생각의 틀)을 만들어 주어 근본적인 문제가 어디서 파악하지 못하고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주민들은 선주민들의 일자리를 뺏고 난민들은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한국에 오는 위험한 사람들로 만든다. 이주민과 난민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 중 무슬림은 이미 서양국가들에 의해 만들어 진 낙인과 편견을 이용해 테러리스트나 강간범이 될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향한 낙인과 편견을 유지, 강화, 조장한다.

케네디가 주목한 다양성교육

한국 사회에서 다양성훈련은 여전히 생소하고 8년 전 한국다양성연구소가 시작한 이후 여전히 한국 다양성연구소와 같은 형태의 다양성훈련을 진행하는 기관은 없는 상황이지만, 미국 사회에서의 다양성 훈련의 역사는 꽤 길다. 인종, 성별, 종교에 대한 억압, 차별, 폭력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시간이 더 길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을 시작한 역사도 더 길기 때문이다.

1961년, 복지국가 건설과 흑인인권의 신장, 냉전 완화에 노력을 기울여 많은 지지를 받았던 미국의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은 NCCJ(다양성훈련기관)이 조화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발언했고 이는 다양성훈련이 사회적으로 더 크게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오랜 기간동안 다양성훈련은 국가기관, 즉 공무원들에게 필수 교육으로 제공되기도 하고 대학들에서는 1학년 1학기에 필수 교양 과목으로 학생들에게 다양성훈련을 제공하는 학교도 있는 등 사회 전반에 널리 퍼졌다.

한국다양성연구소는 이러한 미국에서 발전해온 다양성훈련을 바탕으로 한국사회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고 제공하고 있다. 한국다양성연구소의 다양성훈련의 첫 번째 특징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수많은 사회적 정체성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상호 작용을 하는지 알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다양한 정체성을 함께 다룬다는 점이다.

이주민, 난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어린이, 청소년, 노인, 저학력, 저학벌, 저소득, 비정규직, 획일적 미적 기준, 가족의 형태 등에 의한 억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누구나 안전하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시민이 될 수 있는 연습을 함께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근본적인 연결되어 있는 차별의 구조를 이해하고, 자신을 비롯해 이주민 난민 여성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점을 재정립하고 자신의 역할을 탐색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게 공동체의 변화를 이끄는 리더로 초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주입' 아닌 능동적 과정

그리고 다양성훈련은 게임, 활동, 대화를 통해 느끼게 된 감정과 발견하게 된 사실을 대화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배운다는 것이 두 번째 특징이다. 일방적으로, 주입식으로, 강연식으로 가르치는 방식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이렇게 경험을 통해 느끼고 깨닫게 되면 그 학습은 자신의 것이 된다.

이런 교수법은 백래시 집단에서 주장하는 '사상강제주입'이라는게 불가능하다. 애초 주입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사회화 과정에서 주입된 생각을 '당연하다'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체험형 활동과 서로배움을 통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권력이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그 결과 만들어진 차별과 억압이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 자기자신을 어떻게 억압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미국도 마찬가지지만, 효율을 중요하게 여겨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을 목적으로 장시간 반복적으로 만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단시간 짧게 만날 때 한계가 발생하고는 있다. 그럼에도 여러 단계를 나누어 장시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누군가가 경험하는 차별이 당연하다, 자연스럽다,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차별과 억압이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과정, 아래서부터의 변화를 만드는 가능성은 바로 다양성훈련에서 진행된다.

다양성훈련은 연결되어 있는 차별을 인지하고,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권력구조를 이해하며, 자신과 우리 모두를 위해서 억압을 해체하는 주체로 초대하는 반억압 작업이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경험하는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이야기하며, 단 한가지의 사회적 정체성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회적 정체성에 의해서 발생하는 교차성(차별을 경험하는 정체성이 중첩될 수 있다는 것)과 상호성(모든 사람은 차별을 경험하는 정체성도 가지고 있고 차별을 할 수 있는 정체성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것이 다양성 훈련에 가장 큰 특징이자 힘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정체성마다 그 그룹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 한국다양성연구소 홈페이지

'다문화'가 낙인이 아니기 위해서는

이주민 정책은 '다문화 정책'으로 불리며 시작됐다. 그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던 사람들의 의도는 좋은 의도였을 수도 있다. 우리 사회의 행정 체제가 어떤 특정한 정체성을 가져야 지원을 할 수 있는 체제이다 보니 선별적인 복지나 지원을 받기 위해 이주민을 분리해서 부를 용어가 필요했다. 그래서 다문화 정책이라고 부르고 다문화 가정, 다문화 아동, 다문화 청소년과 같이 사람 앞에 “다문화”를 붙여 사람을 구분 지었다.

도움을 주고자 했던 의도와는 다르게 결과적으로 '다문화'라는 용어와 그 용어가 호명하는 사람들 자체에 편견을 생기게 하고 낙인을 만들었다. 구분 짓기로 작동하는 명명부터 좋은 시작을 하지 못했으며 그 방향도 이주민들을 선주민처럼(즉 한국인처럼) 만드는 방식의 정책을 실시했다. 한국어 교실과 김장 담그기 등이 가장 대표적인 정책이며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물론 한국어를 교육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이주민에게 한국의 언어와 음식을 소개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가 이주민들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선주민들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함께 진행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빠져 있었다. 특히 이주민의 가족들에게조차 이주를 해온 사람의 언어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배우고 함께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저 이주민이 빠르게 한국인이 되는 것만이 정답이고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여겨지는 가정, 학교, 사회의 분위기 여태까지 지속되고 있다.

한국다양성연구소의 다양성훈련은 이주민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제공해서 이주민이 한국인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이주민을 차별하지 않는, 이주민이라고 해서 배제되지 않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함께 포함되어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러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가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이주민과 난민뿐만 아니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은 모든 사회적 소수자 인권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여성이 남성이 되거나 남성과 같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성소수자가 비성소수자가 돼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돼야 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과 성소수자와 장애인 모두가 안전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다양성훈련을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위험함

한국사회를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모두가 포함되는 평등사회, 포함의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다양성훈련에 대한 저항이 상당히 큰 요즘이다. 오랫동안 이러한 공격들은 있어 왔지만 지금처럼 조직되어 있는 사람들이 아주 전략적으로 학교, 교육청, 교육부, 시의회, 시청 등에 하루에 수 십 통의 전화를 걸어 업무를 마비시키고 국민신문고를 통해 온갖 부서들에 민원을 접수하고 현장에 직접 피켓을 들고 나타난 적은 없었다.

한국다양성연구소에서 진행하는 교육을 취소시키기 위해 공격을 쏟아 붙는 강도와 조직력이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전국에서 학생인권조례를 폐지시키고 있고 서울도 학생인권조례를 폐지시키기 직전이다. 그들에게는 “성공의 경험들”이 쌓여가고 있고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장악한 시의회와 지자체가 힘을 실어주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점점 더 기세가 강해지고 있다.

다양성훈련과 포괄적 성교육을 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성평등, 페미니즘, 성인지 감수성, 퀴어, 성소수자, 젠더, 섹슈얼리티, 피임, 재생산권, 차별, 자본주의' 등과 같은 단어를 쓰지 말라고 한다. 이름을 부를 수 없으면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이야기를 할 수 없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모든 차별이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모든 억압을 함께 살피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우리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억압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사회문제이자 구조적인 문제라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 한다. 백래시 집단들은 구조적인 억압에 대한 이야기를 '특정 사상을 주입한다'고 표현한다. 공산주의, 페미니즘, 퀴어, 이슬람 등을 주입하는 교육이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교육들은 '교육의 중립성'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언론, 미디어 등 모든 영역에서 억압의 구조적인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작동하고 있다. 현체제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자본주의, 비장애인 중심주의, 남성 중심주의, 시스젠더 이성애자 중심주의 사회가 당연하며 오직 그것만이 정상으로 믿고 살아가게 한다. 기득권자들을 위한 특정 사상을 주입하는 것이다. 전혀 중립적이지 않다.

민원을 없애는 게 중요한 공무원들

이들의 기세등등한 움직임은 교육의 영역에서도 지금처럼 차별에 저항하지 말고 계속 동조하고 방임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혐오'민원이 '정당한 의견'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는 교육이 중립성을 잃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정말 모두를 위해 평등하고 안전한지 들여다보고 탐구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며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그리고 국가와 사회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함께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시민”이 되는 길이며 모두가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자 의무다. 이를 하지 않는 공교육은 국가의 역할과 공교육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며 억압, 차별, 폭력에 대한 방임이자 방조다. 교육의 중립성을 완전히 위반,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혐오민원인들은 교육의 중립성을 위반하는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의 관계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절차를 만들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야 말로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법에 의해 처벌받아야 할 대상들이다. 혐오 민원인들이야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겠지만, 정치와 행정이 무엇이 혐오이고 무엇이 민원인지 파악을 못하고 그저 민원을 없애는 방식으로 일처리를 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 2018년 9월16일 오후 서울 보신각 앞에서 난민인권센터 주최로 열린 '난민과 함께하는 행동의 날' 집회에 참가한 난민 어린이가 집회 참가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모두가 포함되는 사회로 가는 길

막상 우리가 만나는 청소년들은 매번 후기를 통해 '이런 교육이 학교 안에서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와 행정은 학교에서 이런 교육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 혐오세력이라 불리는 백래시 집단의 존재가 문제가 아니라 정치와 행정의 무능과 무지가 문제다. 정치와 행정을 완전히 새롭게 개혁, 변혁해야 한다.

우리는 평등, 평화, 포함, 돌봄의 가치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교실, 학교, 사회를 만들 것이다. 모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이 속한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다양성훈련을 경험하고 즐길 수 있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모두가 안전하고 평등하게 포함될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으로, 존엄한 인격체로 존재할 수 있는 사회가 될 때까지 계속 나아갈 것이다. 뜻을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우리와 함께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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