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프렌치 시크는 어쩌다 '영원한 로망'이 되었을까?

정혜경 기자 입력 2023. 5. 28. 14:03 수정 2023. 5. 30. 10: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 "꾸민 듯 안 꾸민 듯" (글: 손가인)
'요즘 시대'의 문화 코드와 트렌드를 읽는 새로운 방식, [어쩌다]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깊이'를 채워줄 수 있는 프렌즈 컨트리뷰터들의 글을 비정기적으로 게재합니다. 이번엔 전직 신문기자이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 석사수료인 손가인 작가가 이른바 '패션의 정답'으로 오랫동안 군림해 온 '프렌치 시크' 스타일에 대해 전격 해부해 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프렌치 시크'에 열광하게 만들었을까요?
 


패션계에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스타일이 있습니다. 바로 '프렌치 시크'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현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다는 패션의 '이데아(idea)'라고나 할까요. 방금 일어나 침대에서 막 기어 나온 것만 같은 머리와 얼굴, 청바지에 대충 소매 걷은 셔츠만 걸쳤는데도 알 수 없는 아우라가 풍기는 것. 꾸며서 얻은 아름다움 말고 태어나길 느낌 충만하게 난 것 같은 '튜닝의 끝, 순정'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프렌치 시크입니다.

프렌치 시크가 어떤 스타일인가 하는 암묵적인 동의는 있는데 정작 정의해 보자면 모호하기만 합니다. 프렌치 시크를 인터넷에 검색하면 '12가지 필수 아이템' 같은 직접적인 정보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그 옷들은 나도 가진 건데 그 느낌이 나질 않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나른한 듯 보이면서도 자연스럽고 한편으론 생기가 넘치기도 하는 그 지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연출하는 건지 대체 공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프렌치 시크를 정복해 보려고 끝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프렌치 시크를 동경하는 건 한국만의 일이 아닙니다. 프랑스에 파견된 미국인 에밀리의 시선으로 파리의 패션과 식문화, 생활 습관 모두를 대리 체험할 수 있는 넷플릭스 시리즈 「에밀리 파리에 가다」가 흥행한 것은 프렌치 스타일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방증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파리지앵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에밀리의 과감한 패션 시도가 진짜 '프렌치'들의 냉담한 반응만 불러일으킨다고 하니, 에밀리도 프렌치 시크의 벽을 넘지 못했네요. 프렌치 시크가 도대체 무엇인지 더 어려워지기만 합니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

'프렌치 시크'라는 단어부터 살펴볼까요. 프렌치 시크를 말 그대로 해석하면 프랑스의 멋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멋'이 그냥 '패션'이나 '스타일'이 아니라 'chic(시크)'라는 또 다른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복식의 아름다움을 뜻하는 범주로서의 '시크'를 연구한 오현정(1993)에 따르면 '시크'는 여성의 옷차림을 표현하는 단어이며 19세기 이후 프랑스에서 등장했습니다. 이는 'chicane(시칸느)'의 줄임말인데 '시칸느'는 재판을 복잡하게 만드는 기교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재판장을 어지럽게 주무르려면 세련되고 교묘한 기술이 필요한 만큼, '시크'라는 단어에는 섬세하고 세련되며 독창적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시크'가 세계적인 유행이 된 것은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프랑스는 패션의 메카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패션과 문화에 대한 루이 14세의 적극적인 투자는 유럽의 유행을 선도하며 프랑스를 패션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패션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제정 시대를 거치며 더욱 다양하고 풍부해진 동시에, 찰스 프레데릭 워스의 디자인 하우스 '하우스 오브 워스'의 성공 등으로 오트 쿠튀르의 기원이자 핵심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패션을 앞세운 파리의 문화적 영향력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지나면서도 꺾이지 않았고, 20세기 이후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엘리트들이 프랑스 패션에 열광하면서 지금까지도 그 고고한 명성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발간된 패션잡지 《보그》에 실린 1900년대 초의 기사들은 프랑스의 패션에 관한 미국인들의 관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파리의 여성들은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고 패션 소품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소개하는 기사들이 '파리'라는 제목을 달고 시리즈로 연재됩니다. 1910년대부터 '프렌치'는 '시크'라는 단어와 동반되거나 결합한 형태로 등장하는데, 1912년 8월 1일 40호에 실린 기사 'The Chic in French Costumes(프랑스 의상의 시크)'에서는 '시크'를 프랑스 디자이너들만의 특별한 스타일(the shibboleth of the french designers)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물론 삽화까지 활용해 당대 프랑스 '인플루언서'의 세련된 모습을 포착하고 파리의 살롱이나 극장에 찾아가 패션 르포 기사를 쓰기도 합니다.

1911년 6월 15일 자 기사 'La Parisienne(파리 여성)'은 동경 어린 시선으로 프랑스 상류층 여성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기사 속 여성들은 문학을 즐기고 살롱에 모여 미술을 비판하며 소르본 대학에서 앙리 베르그송의 강의를 듣고 필기하는, 무척 지적이고 세련된 모습입니다. 그러면서도 섬세한 실루엣의 가운을 무심한 듯 툭 걸치고 푸른 벨벳으로 장식한 흰 밀짚모자를 개성 있게 소화하는 모습은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프렌치 시크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기사는 이런 프랑스의 패션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시크(indescribably chic)'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세련된 프랑스 패션에 대한 우리나라의 관심도 꽤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1927년 9월 15일 《조선일보》에는 '파리 녀자의 신류행'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습니다.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다니는 것이 현재 파리에서 유행하는데 다음엔 무엇이 유행할지 궁금하다는 내용입니다. 1934년 3월 8일에는 올봄 파리에서는 원색에 가까운 강한 빛깔이 유행할 것이라는 최신 정보에 덧붙여, 봄을 맞은 종로의 멋쟁이들이 어떤 옷을 주로 구매하는지를 조사한 '금년 봄의 류행! 색갈은 푸른 빗'이란 기사도 게재되었습니다. 1933년 10월 19일 자 《동아일보》에도 '33년 유행게 런던과 파리의 이 가을의 유행'이라는 제목으로 따끈따끈한 동시대 프랑스의 트렌드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프랑스 여성들이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인식은 1950년대 즈음의 기사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58년 12월 11일 자 《동아일보》에는 3년간 파리에서 의상 디자인을 연구하고 돌아온 디자이너 손경자 씨의 귀국담이 실립니다. 프랑스의 멋을 직접 공부했다는 그는 파리가 "생활하는 여성 생각하는 여성 그리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어느 나라 여인들도 따를 수 없는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문화, 사상, 유행의 발상지인 파리의 여성들이 사치스러울 것이라 착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미국이나 영국, 이탈리아 여성들보다 사뭇 검소한 차림을 하고 다닌다는 겁니다. 의복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듯 활동적인 옷을 즐겨 입으며 화장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설명은 오늘날 프렌치 시크를 소개하는 패션잡지의 기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1963년 7월 20일 《경향신문》에 실린 '파리의 여성들'이라는 기사는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유학한 후 '헤어스타일' 부문 프랑스 국가시험에 합격했다는 이화순 여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기사는 프랑스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지적인 매력과 연결해 설명합니다. 그들은 광범위한 독서를 하며 학교 캠퍼스나 지하철, 공원, 어디에서든지 책을 읽는다는 겁니다. 낙제를 당하지 않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던 모양입니다. 아름다운 프랑스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단발머리와 화장기 없는 피부"는 그들의 성실하고 검소한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거란 게 이 여사의 진단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여성들이 유행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경제적으로 부담이 없는 실용적인 몸차림을 선호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지식과 교양을 갖춘 위에 「테크닉」을 연마"하는 게 이 여사가 바라본 당시의 파리지앵이었습니다. 프랑스 현지에 다녀온 미용 전문가들의 체험담이 이렇듯 상세한 설명과 함께 신문에 게재된 것을 보면, 패션의 중심지 프랑스의 미(美)에 대한 당대 독자들의 관심도 지금 못지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프랑스의 미적 가치가 '프렌치 시크'라는 이름을 앞세워 한국에 본격 소개된 것은 2000년대 중반입니다. 당시 기사들은 세계적인 유행으로 떠오른 프렌치 시크라는 개념을 "프랑스인들의 몸에 밴 패션 감각", "자연스러운 감성이 묻어나는 세련된 멋",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듯하면서도 어딘지 개성과 멋을 느낄 수 있는 패션", "싸구려 티셔츠와 고급 핸드백을 조화시킬 수 있는 개성"이라고 정의합니다. 물론 '몸에 밴', '감성이 묻어나는', '어딘지 멋을 느낄 수 있는' 같은 어렵고 모호한 표현들로 말입니다. 어쨌든 20년 전만 해도 설명이 필요했던 외국어 용어가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가 하나의 관용어처럼 자리 잡았을 정도니,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프렌치 시크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어떠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꾸미지 않음을 꾸미는 법

프렌치 시크를 향한 사람들의 애정은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에 발맞춰 많은 패션 전문가와 기업들은 프렌치 시크를 앞세운 마케팅을 하고 있고요. 프렌치 시크의 '바이블'을 자처하며 홍수처럼 쏟아지는 책들이 그 일환입니다. '파리지앵은~' '프랑스 여자는~' 같은 제목이 붙은 책들의 저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프렌치 시크의 아이콘'이나 패션 저널리스트, 혹은 프랑스에서 수십 년을 살며 프렌치 시크를 객관적으로 분석했다고 자부하는 유명인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프렌치 시크'해 질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해 준다고 하니 솔깃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프렌치 시크의 비밀 역시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에 있습니다.

"다른 나라 여성들은 너무나 완벽해지려고 해요. 하지만 프랑스 여성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죠."

그런데 원래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지는 건 당연한 걸까요. 프렌치 시크를 실현하려면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위해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연출하는 법부터,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듯한 피부 표현을 위해 어떤 브랜드의 무슨 화장품을 발라야 하는지, 옷장 안에 필수로 있어야 할 옷은 어떤 것이며 당장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남들이 보지 않는 손끝과 발끝까지도 완벽히 관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해야 할 것은 왜 이렇게 많고 또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왜 이렇게 많을까요.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멋이 프렌치 시크라고 하면서 훈요십조 같은 이 규율들은 다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지금은 꽤 유명해진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기자로 일하던 필자는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랑스인 대표를 인터뷰했습니다. 대표는 대뜸 "'프랑스 여자'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떠오르느냐"라고 물었습니다. 필자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동안 읽어온 잡지와 책들이 가르쳐준 대로 "꾸미지 않았는데도 아름답다는 느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자기가 기대했던 대답이라는 듯 손가락까지 튕겨 보이며 "그렇죠!"라고 흡족해했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브랜드에서 내놓은 화장품을 단계별로 줄줄이 소개했습니다.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을 위해서 이 제품 다음엔 저 제품, 저 제품 다음엔 그 제품을 발라야 한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꾸미지 않음을 꾸며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기현상을 '프렌치 시크'라고 이름 붙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프렌치 시크 패션 바이블'을 표방하고 나온 또 다른 훈요십조 『You're so French!(당신 정말 프랑스인이네요!)』라는 책이 프랑스 현지에서도 10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합니다. 물론 프랑스인들은 단순한 호기심에 책을 사 봤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외부의 시선이 만든 '프렌치 시크'라는 용어가 되려 프랑스 사람들을 틀에 갇히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우가 든 것도 사실입니다. 이익을 얻고자 하는 패션 산업계는 주객이 전도된 이 열풍을 끝없이 부추기고 있고요.

프렌치 시크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캐롤린 드 매그레(Caroline de Maigret)가 연기한 흥미로운 유튜브 영상이 있습니다. 제목은 '10 Ways To Be Parisian with Caroline De Maigret'(파리지앵이 되는 10가지 방법). 식료품 쇼핑을 하던 캐롤린은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오자 "나 지금 디자이너랑 같이 백스테이지에 있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패션쇼는 보지도 않았으면서 쇼가 별로였다는 친구의 의견을 단호하게 비판하고 무시하죠. 부스스한 머리를 연출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곱게 땋고 잠들었으면서 다음 날 아침엔 연인과의 '뜨밤'을 보낸 양 자랑도 합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ALlDZIQeNyo&feature=youtu.be ]

영상 속 캐롤린의 모습은 그야말로 우리들의 환상 속 프렌치 시크의 현신처럼 매력적이고 한편으로 익살스럽기도 하지만, 어째 영상을 보면 볼수록 씁쓸해집니다. 이런 옷차림과 머리 스타일을 한 채 무단횡단을 일삼고 약속 시간엔 항상 늦고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우면 당신도 파리지앵이 될 수 있다는 이 영상은 꽤 자조적인 동시에 '옜다, 너희가 상상하는 프렌치 시크!' 하며 외부의 관찰자들을 비꼬는 듯합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정혜경 기자choice@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