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켓값 3만원…수익은 어려워”...민간에서 꽃 핀 소리극 창작세계

2023. 5. 28.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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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루·바닥소리·판소리 트래블러
민간에서 이어온 소리극 창작
단체 운영은 지원사업 통한 공연
보통 6000~8000만워 제작비
저렴한 티켓 가격…수익 내긴 어려워
소리극 본질은 소리꾼과 이야기
다양한 단체들의 다양한 소리극
지금 소리극의 트렌드이자 경향
소리극의 터전을 다져온 세 단체 ‘창작하는 타루’, ‘판소리 공장 바닥소리’, ‘판소리 트래블러 KA2729’가 한 자리에 모였다. 2023 남산소리극축제의 일환으로 열린 ‘반상회-할 말 있는 소리극 동네 사람들’을 통해서다. [서울남산국악당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삶의 밑바닥을 딛고 선 노동자(다큐 판소리 ‘태일(TALE)’), 하늘을 호령하는 독수리와 음습한 지하를 휘젓는 쥐(‘아리랑 그리랑’), 양계장을 뛰쳐나온 닭(‘닭들의 꿈, 날다’), 조선 최고의 여성 명창(‘진채선’)….

이 땅의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됐다. 그 위로 전통 소리가 입혀졌다. ‘춘향전’도 아니고, ‘심청전’도 아니었다. 익숙함을 벗어던진 새로운 무대를 누군가는 ‘실험’이라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파격’이라 했다. 신선하고 기발했지만, 때론 ‘불손’하다 여겨졌던 ‘창작의 세계’를 이끈 주역들이 있다. 과거와는 다르다는 표식은 이름에서 시작됐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창극’인데, 그 이름 대신 ‘소리극’으로 명명했다. ‘창극’이라는 명칭이 낡고 촌스러웠던 시절 태동한 창작욕구이기 때문이다.

2001년 창단, 원년멤버로 ‘창작하는 타루’를 이끌고 있는 정종임 대표는 “20여년간 타루는 별별 말을 들어왔고, 내 마음속에도 상처와 영광의 순간이 있었다”며 “그 말들에 휘둘렸다면 우리는 작품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창작하는 타루’는 업계 ‘최고의 스타’인 이자람, 이날치의 권송희가 거쳐갔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판소리를 입힌 ‘판소리, 애플 그림을 먹다’, 햄릿의 자아를 네 명으로 설정한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 등 23년간 30여편의 신선한 창작물을 보여줬다.

소리극의 터전을 다져온 세 단체 ‘창작하는 타루’, ‘판소리 공장 바닥소리’, ‘판소리 트래블러 KA2729’가 한 자리에 모였다. 2023 남산소리극축제의 일환으로 열린 ‘반상회-할 말 있는 소리극 동네 사람들’을 통해서다. 반상회에선 성실한 뚝심으로 저마다의 길을 걸어온 소리꾼들과 각기 다른 창작을 이어가는 예술가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최용석 남산소리극축제 예술감독은 “20~30대 소리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창작 판소리를 기반으로 소리극을 만든지 20여년이 됐다”며 “그 때 만난 사람들의 20년을 돌아보고, 어떻게 소리를 해왔는지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다”는 말로 이 자리의 취지를 설명했다. 최용석 감독은 ‘바닥소리’의 전 대표이기도 하다. 반상회에선 창작 소리극 단체들의 운영 방식부터 소리극의 본질과 트렌드까지 나누는 시간이 됐다.

소리극의 터전을 다져온 세 단체 ‘창작하는 타루’, ‘판소리 공장 바닥소리’, ‘판소리 트래블러 KA2729’가 한 자리에 모여 소리극의 터전을 다진 지난 20여년을 돌아봤다. [서울남산국악당 제공]
티켓 가격은 3만원…민간 단체 운영은?

“평소 소리극을 좋아해 즐겨보는데요. 티켓 가격은 너무도 저렴한데, 심지어 돈을 주고 사야할 굿즈를 만들어 주기도 하더라고요. 티켓 판매를 통해 수익 창출이 되나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조수진 씨의 질문엔 ‘소리극 팬’으로의 진심 어린 염려가 담겨 있었다. 더 자주 보고 싶은 소리극이 이러다 망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다시는 볼 수 없게 돼버리는 것은 아닌지, 소리극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적잖았다. 해체 직전의 ‘최애’ 아이돌 그룹을 바라보는 심경과 다르지 않았다.

남산소리극축제 동안 공연한 세 단체의 소리극 티켓 값은 전석 3만 원. 지난 3월 막 내린 국립단체 작품의 S석보다도 5000원이 저렴하다. ‘축제’가 아닌 공연으로 만날 때에도 창작 판소리 단체들의 공연은 대체로 비슷한 수준이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세 단체의 주역들은 민망한듯 웃었다. 이날 반상회의 진행을 맡은 이상화 김봉영은 알면서도 “대체 왜 이러는 거냐”며 답변을 재촉했다. 돌아온 답변은 더 진솔했다.

정종임 타루 대표는 “티켓 수익만으로 유지되는 민간 예술 단체는 극히 드물다”며 “모든 단체는 수익을 내고 싶지만, 더 많은 관객을 끌어 모아야 하는 만큼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총 제작비는 오르지만, 여전히 티켓 단가는 낮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작품의 규모마다 다르지만, 하나의 작품을 올리기 위해 보통 8000만원 정도의 제작비가 들어간다. 각 단체들은 그간의 노하우로 맞춤형 제작이 가능해졌다. 1억 5000만원 정도의 제작비가 확보되면 최고의 퀄리티로 여유로운 작업을 이어갈 수 있다. 보통 6000~8000만 원 정도면 “아끼고 아껴 작품을 제작”(바닥소리)한다. 최소 400만원에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도 있다.

전지혜 바닥소리 PD는 “민간단체는 정부 보조금으로 운영되는데, 공모 시즌이 되면 많은 민간 단체들이 경쟁한다”며 “공모 사업에 선정되지 않으면 다음해에 활동이 어렵다”고 말했다. 김희정 타루 PD 역시 “연초에 공모 사업에서 몇 개가 선정되느냐에 따라 일 년 살림살이가 달라진다”며 “주된 업무 역시 지원서를 쓰는 일이다. 이 일을 ‘헌터’라고 부른다”며 웃었다.

소리극의 터전을 다져온 세 단체 ‘창작하는 타루’, ‘판소리 공장 바닥소리’, ‘판소리 트래블러 KA2729’가 한 자리에 모였다. 2023 남산소리극축제의 일환으로 열린 ‘반상회-할 말 있는 소리극 동네 사람들’을 통해서다. [서울남산국악당 제공]
소리극의 본질은 소리꾼과 이야기

장르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대다. 소리극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리극의 창작 주체들도 소재의 확장을 통해 장르의 경계를 넓혀간다. 보다 다양한 장르에서 소리극과의 협업을 기대하고, 소리극 장르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판소리를 통한 참신한 시도와 발전 가능성을 발견한 예술가들이 ‘소리극의 비전’을 새롭게 그려나가는 때다.

다만 소리극은 여전히 ‘전문가의 영역’이라 진입장벽이 높다. 저마다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도 첫 소리극(창극) 작업에선 적잖은 어려움을 고백한다. 소리극으로 차용되는 이야기는 연극, 뮤지컬 등의 장르와는 다른 소리극만의 독특한 특질을 가져야 한다. 소리극 장르로의 진입을 시도하려는 창작자들의 고민도 이 때문에 생겨난다.

소리극의 본질은 소리꾼과 이야기에 있다. 변성기가 오기도 전부터 수련을 시작한 소리꾼들이야말로 장르의 본질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판소리의 모든 창작은 “아니리에서 시작해 곡조가 붙으며 표현의 범위가 확장”(김봉영)됐고, “민초들의 이야기에서 메시지”(이상화)를 담아낸다. 그것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바로 소리꾼이다. 스스로의 목에 끊임없이 상처를 내며 완성한 “목소리와 창법”(정종임 대표)은 소리극이 다른 어떤 장르의 극과도 구별되는 지점이다. 소리꾼들은 “무수히 많은 감정을 ‘목소리’와 독특한 창법을 무기로 악기”(타루)처럼 전달한다.

정지혜 바닥소리 대표는 “창작 판소리를 하면서 내가 과연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며 “내가 생각하고 전하고 싶은 판소리는 ‘말’이라는 생각을 해왔고, 판소리의 본질 역시 말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리꾼은 소위 말하는 판소리의 ‘말맛’을 가장 잘 구사하고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말을 하되 전통의 음계 위에 얹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것”(이상화)이 소리꾼이 하는 일이다. 뼛속 깊이 새기고, 오랜 시간 체화해 ‘본능’에 가까워진 작업들이 바탕하면 그 위로 무한한 창작이 나래를 편다.

[서울남산국악당 제공]

소리극은 결국 소리꾼이 무대의 중심에 선 장르라는 점이 가장 특별하다. 그렇기에 소리꾼의 장르라는 것을 인지하고, 이들의 장점을 끌어내며 이야기를 쌓아가야 한다.

이야기는 소리극의 또 한 가지 중요한 본질이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소리극이나, 표현 방식에 있어 소리극에 맞는 변형이 중요하다. 소리극은 기존 극 장르와 달리 상징과 은유의 언어로 채워지고, 서사의 신축(늘임과 줄임)이 자유롭다. 이미 존재한 문학 작품을 소리극으로 가져올 때도 “소리의 한 대목으로 소설의 10페이지 이상의 분량을 담을 수도 있고”, “기존의 핵심 내용의 순서를 뒤바꿔 표현”(정종임)하기도 한다.

소리극의 작가가 반드시 소리꾼일 필요는 없다. 이들 단체들 역시 소리와는 무관한 장르의 창작진과도 협업한다. 국악관현악부터 실내악, 창극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해온 황호준 작곡가는 “기본적으로 판소리는 말을 하는 작업이다. 산문을 많이 쓰다 보면 문어체 안에 갇히게 된다”며 “작가들이 한국적 서사를 가져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말로 옮기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용석 감독 역시 “대본을 쓰고 나면 소리꾼들이 읽어보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소리꾼이 읽어본 뒤 수정하면 보다 자연스러워진다”고 말했다.

[서울남산국악당 제공]
지금 우리 시대 소리극 트렌드는 ‘다양성’

민간의 ‘창작 판소리’는 지난 20여년 동안 전통을 동시대 감각으로 재해석, 재창조해왔다. 척박했던 판소리 창작은 집요하게 한 세계를 탐구하고 탐험한 단체들과 함께 다양한 이야기로 태어났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지금의 창작 판소리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2002년 창단한 바닥소리는 노동자,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무대로 가져왔다. 단체의 이름이 이들의 방향성을 담고 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판소리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다. 고전 소설,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 희비극이 아닌 현실의 밑바닥에 발붙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리극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했다. 최근 작품인 ‘체공녀 강주룡’은 단체의 정체성에 지금 현재의 공연계 트렌드를 담아냈다. 한국 노동운동사 최초의 노동운동가이자 고공 농성자. 시대를 바꾼 주역이면서도, 공연계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2030 여성 관객들이 선호하는 ‘여성서사’를 중심으로 끌고 왔다.

바닥소리의 소리꾼 김부영은 “소재를 찾을 때는 우리 시대에 문제가 되는 것, 이슈가 되는 것을 중심으로 찾는다”며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사람들, 소외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목청껏 이야기해 개선점을 만들어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타루는 판소리에 다양한 장르를 접목해 ‘젊은 소리극’을 선보였다. 고전 작품에 동시대성을 입혀 ‘지금의 이야기’로 다시 만드는 작업도 타루가 즐겨 쓰는 방식이다.

정종임 타루 대표는 “고전소설을 활용할 때는 그 시대의 이야기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고, 지금 시대엔 어떻게 관객과 호흡할 수 있을지 의견을 나눈 뒤, 판소리나 민요와 함께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작업한다”고 했다. 특히 고전소설을 현재로 가져올 땐 스토리나 인물이 설득력을 갖기 어려워 인물을 변형하거나 통합하는 경우도 많다.

신진 창작단체인 트래블러는 ‘바닥소리’ 멤버이기도 한 강나현 김은경이 이끌고 있다. 보편적 주제를 담아 전 세계에 통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존재인 ‘독수리와 쥐의 이야기’를 통해 ‘공존’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방식이다.

황호준 작곡가는 “소리극은 어느날 뚝 떨어진 새롭고 신비한 장르가 아니”라며 “다양한 양식을 가져와 적용하고 수십년간 잘 이어온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김희정 타루 PD는 “민간단체들이 저마다 자기만의 색을 가지고 팀을 이끌어와 소리극이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소리꾼들도 창작할 줄 아는 노하우가 생기게 됐다”며 “각기 다른 단체의 다양성, 이를 바탕으로 한 여러 색깔이 지금의 창작 판소리의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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