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귀한 걸 다 쏟아버리다니”...큰 마음 먹고 샀는데 맛이 다 변해버렸네 [전형민의 와인프릭]
와인을 즐기다보면 때때로 난관에 봉착합니다. 고이 보관해온 귀한 와인을 기껏 큰 마음 먹고 열었는데 이미 상해있었다거나, 주량에 맞게 한두 잔만 마시고 코르크 마개로 꽁꽁 잘 닫아놓은 와인이 다시 마시려고 보니 맛과 향이 바뀌어 하수구로 쏟아버린 경험을 다들 해보셨을텐데요. 어쩌면 이런 경험들이 와인을 어렵거나 불편한 술 터부시하게 되는 요인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와인은 한 잔으로 총 세 가지를 즐기는 음료입니다. 잔에 따라진 빛깔을 즐기고, 코로 1·2·3차향(아로마)을 즐기고, 마지막으로 입속에서 맛(팔렛)을 즐기는거죠. 섬세하게 향과 맛을 표현해내는 특징 덕분에 와인은 지난 8000여년간 인류 역사에서 살아남은 음료지만, 그 섬세함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히 까다로운 보관 조건을 요구합니다.
오늘은 ‘예민보스’인 와인의 아름답고 섬세한 풍미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들, 그리고 와린이들이 와인을 비교적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드릴게요.
특히 와인 양조 과정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돼왔는데요. 2000년 전 로마인들이 정확한 명칭과 원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황으로 만든 초를 와인을 담은 통에서 태우고 나면 식초 냄새도 나지 않고 신선하게 보존되는 것을 발견하고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7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와인 양조의 필수품으로 사용됐고요.
아황산염은 포도즙이 미생물에 의해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항미생물제, 와인이 갈색으로 변하는 산화 방지를 위한 항산화제, 와인의 풍미를 유지하기 위한 보존제로 사용됩니다. 인체에 위해하지 않냐고요? 서울대 의과대학 국민건강지식센터에 따르면 황에 특히 예민한 일부에게는 호흡곤란(천식)이나 재채기, 두드러기 등의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 불편을 야기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보통 와인 1병에 포함된 아황산염의 양은 우리가 즐겨먹는 푸룬(건자두) 같은 건과일 한 봉지에 들어있는 양보다 적어 큰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아황산염이 걱정된다면 차라리 다른 식품을 덜 먹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뜻이죠.
오히려 문제는 와인을 즐길 때 이산화황의 썩은 달걀·방구 같은 불편한 냄새인데요. 와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런 냄새가 나곤 하죠. 그럴땐 잠시 이산화황이 날아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거나, 잔에 따라 스월링(swilling·와인잔을 돌려 와인을 잔 안에서 흔들어주는 것)을 해주면 곧 날아갑니다.
문제는 맛과 향이 계속 변한다는 겁니다. 와인이 오크통에서 오래 머물수록 통 내부 부산물이 떨어져 나오거나, 과도하게 오크 숙성됐고, 가죽 주머니는 기본적으로 비위생적이고, 내부 세척도 쉽지 않습니다. 결국 17세기 이후 두껍고 내구성 좋은 유리병이 발명되면서 와인의 맛과 향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에 유리병이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됩니다.
병의 모양은 다양하지만 크게 어깨가 각이 진 보르도병, 완만한 부르고뉴병, 무겁고 더 두꺼운 샴페인병으로 나뉩니다. 병 모양도 지역별 와인의 특성을 반영해 가장 효과적인 형태로 발전했는데요.
보르도 와인은 와인의 스타일 자체가 굳건하고 단단한 만큼, 남성형의 각진 어깨가 잘 어울립니다. 강건한 스타일 덕분에 숙성잠재력도 높은데, 대개 오래 숙성하면 생기는 침전물이 병을 기울여 와인을 따라낼 때 각진 어깨에서 한 차례 걸러지는 효과도 있습니다.
병의 밑단에 움푹 들어간 부분, 펀트(Punt)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숙성된 와인을 똑바로 세워놓으면 침전물이 펀트의 틈새로 잘 모여듭니다. 병 내부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장치 중 하나라는 것도 이미 밝혀진 사실입니다. 와인을 따를 때 펀트에 손가락을 넣고 기울이기 위한 목적이라던가, 펀트가 깊을 수록 좋은 와인이라던가 하는 속설은 낭설입니다.
대부분 녹색 혹은 갈색 계열인 병의 색깔도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색칠된 병속 침전물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투병한 병보다 직사광선과 자외선에 취약한 와인을 잘 보호한다 게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실제로 맥주 등 다른 주류도 빛에 노출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투명한 병 대신 짙은 색의 병을 사용하죠.
동굴은 한여름 땡볕 더위에도 서늘하다못해 으슬으슬한 느낌을 줄 정도로 온도가 낮습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상대적으로 바깥보다 따뜻하죠. 비교적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곳입니다. 습도는 또 어떤가요. 벽면에 습기가 맺혀서 물방울이 생깁니다. 당연히 조금만 들어가도 직사광선과 자외선을 피할 수 있구요.
여담이지만 같은 종류, 같은 빈티지의 와인이 있다면 와이너리에서 셀러링해온 와인과 홍콩 경매장에서 팔리는 와인 중 어떤 것이 더 비쌀까요? 당연히 와이너리의 와인이 더 비쌉니다. 와인이 보관 상태와 이동 거리에 따라 맛과 가격의 차이가 발생할 만큼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다보니 와인을 보관하는 데에도 제법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택에 깊숙한 지하실이 있고, 일정하게 서늘한 온도가 유지된다면 괜찮은 선택지 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아파트나 빌라 등 공동주택에 사는 대한민국에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결국 개개인의 선택입니다만, 우리의 현실에서 와인을 위한 최선은 와인셀러입니다.
한여름이라면 차라리 냉장고에 눕혀서 보관하는 것도 추천합니다. 포인트는 ‘눕혀서’ 입니다. 냉장고에 떡이나 밥을 놓아두면, 습기가 다 빠져서 딱딱하거나 푸석해진 것을 볼 수 있는데요. 냉장고 속 극도의 건조함이 와인병 코르크 마개를 수축시켜 공간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공기가 드나들면서 내용물의 산화가 촉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눕히면 코르크의 한쪽이 와인에 젖어있기 때문에 계속 팽창·밀봉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다만 와인은 급격한 온도변화에 큰 스트레스를 받는 만큼, 한번 냉장고에 들어간 와인이라면 다시 꺼냈을때는 반드시 소비하는 게 좋겠죠.
이미 열어 마신 와인을 100% 처음 상태 그대로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근접한 방법은 코라뱅(Coravin)이라는 도구를 활용하는 겁니다. 가느다란 바늘로 코르크 마개를 뚫어내고 무색·무미·무취·무해한 아르곤 가스를 병에 넣어 병속 와인을 밀어올리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도구인데요.
이 외에도 시중에서 판매하는 진공 마개를 사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제품에 따라 성능이 천차만별이고 이미 코르크 마개 오픈 당시 유입된 공기에 의한 산화를 막을 수는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참고로 와인을 밀폐용기에 담는 방법은 의미가 없습니다. 밀폐용기에 옮겨 담는 과정에서 이미 다량의 산소와 접촉이 충분히 이뤄졌기 때문에, 밀폐용기에 담더라도 산화는 진행됩니다.
저는 어떤 방법을 쓰냐고요? 와인을 새로 오픈하면 왠만하면 다 마십니다.2~3시간에 걸쳐 와인이 산화하면서 변하는 맛과 향을 관찰·음미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거든요. 정 남겨야할 때는 마실 만큼 마시고, 재빨리 원래 코르크 마개를 끼워 냉장고에 눕힙니다. 차라리 최대한 빨리 온도를 낮춰서 와인을 잠재우고, 다음에 다시 꺼낼때는 반드시 전부 소비하는 겁니다.
와인은 기호품 입니다. 필수재는 아니지만 이를 통해 단순한 필수재 이상의 기쁨을 얻기도 하죠. 와인을 어떤 식으로 소비할지는 전적으로 소비자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바라건대 절대 진리가 통용되지 않는 기호품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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