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계집파일’ 논란… 男병사의 女장교 성희롱 의미 [정지혜의 빨간약]

정지혜 2023. 5. 2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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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군 부대에서 남성 병사들이 여성 장교들의 신상정보를 올려놓고, 외모 평가와 성적 조롱 발언 등 집단 사이버 성폭력을 벌여온 사실이 드러났다. 6명으로 구성된 당직대 병사들이 컴퓨터에 한글파일을 만들어놓고, 돌아가며 댓글을 다는 방식으로 성희롱을 일삼은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내용이 추가되면 ‘계집파일 업데이트 완료’라고 썼다. 파일에는 #아가씨 #계집 #뽀뽀가능 #○○건들면 다 뒤진다 등을 비롯해 입에 담지 못할 성적 발언, 나체·노출 이미지 합성 사진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11월부터 지난해 7월쯤까지 약 9개월간 벌어진 일이다.

신고자에게 문서 삭제를 종용하고, 신고 이후 두 달간 아무런 조처가 없는 등 사건을 뭉개려 한 정황도 포착됐다. 언론 취재가 시작되자 군은 그제야 관련자 조사에 착수했다. 지난 11일 보고를 누락한 간부 3명을 징계 입건하고, 부적절한 파일 작성 혐의가 확인된 병사 1명을 민간 수사기관에 수사 의뢰한 상태다.

공군 계집파일 캡처
◆‘성별 권력’은 계급 권력에 우선한다

이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건 다른 종류의 계급을 앞서는 성별 권력의 굳건한 작동이다. 위계 질서가 철저한 군대에서 다수의 ‘병사’가 ‘상관’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질렀다. 남성 병사가 가진 성별 권력이 여성 상관이 가진 계급 권력보다 힘이 세기에 가능한 일이다.

남군은 여성 상관을 성희롱하지만, 여군은 남성 상관을 성희롱하기 힘들다. 고(故) 이예람 중사 사건(2021년)을 비롯해 남성 상관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군의 사례는 알려진 것만도 수두룩하다. 여군은 자신보다 높은 계급은 물론 낮은 계급의 남군에게도 성희롱당할 위험을 감수하는 처지다.

사정이 이런데 ‘여성 징병제’를 입에 올리는 사회는 여성 입장에서 무심함을 넘어 기이함에 이른다 할 것이다. 여성 간부조차 남성 부하에게 성희롱당하는 마당에 계급 낮은 여군의 처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여성 징병제를 실시하는 해외에서 여군의 성범죄 피해는 끊이지 않는 문제다. 노르웨이 국군연구소(FFI)의 실태조사에서 여군 응답자의 46%가 “지난 1년 동안 어떤 형태든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반면 남군은 14%만 그렇다고 답했다. 이스라엘 역시 2016년 조사에서 6명 중 1명꼴로 여군이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해외 사례는 여성 징병제를 통해 성평등이 달성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불성설인지 보여준다. 성평등 수준이 높은 편인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에서 그 결과값으로 여성 징병제가 도입됐다는 편이 더 적절하다. 그러나 이런 국가에서조차 여군은 남군보다 성폭력 피해를 입을 확률이 높았다. 뿌리 깊은 성별 권력은 이곳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군대만의 문제로 치부해서도 곤란하다. 사회 곳곳에서 비슷한 일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남성 기자들의 ‘단톡방 성희롱’(2017년) 사건에서 피해를 입은 여성 기자는 가해자들의 선후배를 가리지 않았다. 다른 업계라고 큰 차이가 있을까. 유구한 남성 권력의 남용 앞에서 여성은 지위와 계급을 얻은 뒤에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피해자가 된다.

◆‘댓글놀이’와 집단 성폭력 문화

‘계집파일’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지점은 디지털 환경에서 더욱 악질적으로 진화한 집단 성폭력 문화다. 정보기술(IT)의 발달과 함께 남성 집단의 여성 대상 성폭력은 빠르게 증식했다. 

발전한 기술은 성평등보다 성별 권력 격차 강화에 쓰이고, 여성 피해자를 양산하는 실정이다. 사회 전반의 성 인지 감수성이 따라오지 않은 채 도구만 고도화하면서 나타난 문화 지체 현상의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다. 여성혐오라는 게임이 활개칠 수 있는 플랫폼이 생긴 셈이다.

이번 사건에서 가해자들은 공군 인트라넷망을 통해 수집한 여군의 사진 등 신상을 디지털 파일에 모아놓고 품평하며 즐겼다. 주1회 파일을 업데이트 하고 공유하는 식으로 일종의 집단지성을 활용했다.

문제의 파일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플랫폼에서의 ‘지인 능욕’ 범죄와 형태가 유사하다. 피해자의 이름·나이 등 신상정보, 합성 사진을 모욕적인 허위 사실과 함께 SNS에 게시하는 행위를 지인 능욕이라 한다. 친구, 회사 동료 등 아는 사람이 나 몰래 벌이는 짓이라는 점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줬다.

마치 댓글 달듯이 한마디씩 거든 점도 눈길을 끈다. 사냥감을 잡아두고 댓글로 조롱하고 괴롭히는 놀이는 요즘 세대에게 익숙한 문화다. 군중심리에 의해 경쟁하듯 수위 높은 악플을 달게 되고, 그 과정에서 엄연히 피와 살을 가진 피해자의 존재는 철저히 비인간화 된다.

권력 우위에 있는 남성 집단은 여성들의 피해를 못 본 척 하고, 공론화를 성가셔한다. 이번 사건에서 부대가 신고 이후 신속한 조처에 나서지 않은 것은 어김 없이 그러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남초 집단에서 해로운 남성성(toxic masculinity)을 뿌리 뽑는 것을 어색해하고 미숙한 분위기가 여실히 나타났다.

특히 ‘2차 가해’ 운운하며 사건을 쉬쉬하려 한 대목은 경고등이 켜질 만 하다. 성범죄 2차 가해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피해자를 방패 삼아 사건을 묻어두고 책임을 회피하려 드는 것은 가해자측의 단골 전략 중 하나가 됐다.

언론 보도가 없었다면 과연 지금처럼 관련자 조사가 진행됐을까. 여기에 의문이 든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직 우리 사회는 갈 길이 멀다고 할 수 있다. 폐쇄적인 군 조직에서 조금 더 심각할뿐 바깥 사회에서도 문제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도 있다. 

‘계집파일’ 논란을 그저 또 하나의 선정적 뉴스로만 취급하고 넘어간 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듯 망각하는 사이클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 성범죄 기사를 손쉽게 포르노적으로 처리하고 소비하는 언론, 대중의 행태를 이번에도 돌아보게 된다. 이 사건 역시 비슷한 흐름으로 조회수 경쟁에 돌입한 복붙 기사가 쏟아졌다. 그러는 동안 피해자의 회복과 가해자의 엄벌은 뒷전이 될 수 있다.

공군은 관련 기사를 쓴 매체들에 “전역 병사들이 간부 대상 성희롱 메모를 공유한 사건과 관련해 성고충상담관이 보내온 글을 전달한다”며 피해자들이 배려 없는 무분별한 언론 보도에 고통받고 있다고 전해왔다. 지속적인 보도로 인해 피해자의 불안이 높아지고 있으며, 사건 보도를 멈추고 이미 올라간 기사들도 삭제를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적 문화를 지적하고 엄벌을 촉구하기 위한 성범죄 보도마저도 ‘선정적 콘텐츠화’ 되는 것이 우리의 씁쓸한 현주소다. 이로 인한 N차 피해까지 여성들의 몫이 되는 부당한 현실의 벽을 또 한번 실감한다. 당장 그것을 경감하려면 성폭력 실태를 알리는 많은 시도들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바뀌어야 할 집단에게 일부 면죄부를 주며 변화와 혁신의 속도를 늦어지게 하는 측면이 있다. 이 모든 상황의 복잡성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구조적 성차별이 얼마나 단단하고 중층적인지, 그 고리를 끊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일지 보여준다.

*‘정지혜의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그랬듯 빨간약을 먹고 나면 보이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예민하게 분석해보는 코너입니다.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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