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경영 전략이 가진 가장 강력한 ‘필살기’[박찬희의 경영 전략]

2023. 5. 2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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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전략]
 



경영학 공부를 잘못하면 그럴듯한 말만 둥둥 떠다닌다. 핵심 역량, 플랫폼, 시너지 같은 알고 보면 뻔한 말들에 요란한 그림 자료까지 더해지면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얘기인지도 흐릿하고 회의실은 학술 세미나장이 되고 만다. 일을 잘하려고 만든 경영학이 오히려 일을 망치는 셈이다.

생각의 기반 없이 그럴듯한 말을 외워 떠들면 경영의 현실이 덮여 버린다. 구체적 기법(skill)보다 생각의 틀을 잡고 문제를 풀어 가며 남다른 발상을 제시하는 것을 중시하는 경영 전략 분야는 이런 ‘덧없는 말의 해악’이 가장 도드라진다.

학교마다 경영학과가 있고 경영 전문 석사(MBA)나 박사도 흔해 경영학 용어나 기법은 어지간하면 다 아는 ‘상식’이 됐다. 용어와 기법을 몰라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생각해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차이가 난다. 그런데 진정한 고수의 생각은 분명 남다르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아보는 실력이 없으면 불행히도 그 차이를 알 수 없다.

결국 사업의 실질적 내용이 아니라 포장술로 경쟁하고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공허한 단어를 늘어놓고 떠들면서 돈과 시간을 허비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다.

실제로 인터넷에 흔한 블로그 글이나 인공지능(AI)이 보여주는 답이 컨설턴트나 경영학 교수의 말과 큰 차이가 없다. 남다른 발상과 분석은 남들 다 아는 경영학이 아니라 사업에 대한 구체적 이해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에서 나온다. 인문학은 이를 위한 강력한 무기를 제공한다. 무협지에 나오는 남몰래 숨겨둔, 한 방에 승부를 결정짓는 ‘필살기’인 셈이다.

 

상상과 스토리텔링

혁신은 게으른 사람의 상상에서 나온다. 부지런한 사람은 빛이 나도록 빨래를 하지만 빨래하기 귀찮고 놀고 싶은 사람은 세탁기를 만든다. 낙하산이나 로봇 같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획기적 발상들은 이리저리 허황된 생각을 해 본 결과다. 사람이 하늘을 날면 어떨까 물어봤다가 밭이나 갈라고 두드려 맞는 아이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인문학은 인간과 사회를 생각한다. 사람의 생각과 감성, 추구하는 바 가치를 생각하고 당장의 쓸모나 조건에 얽매이기보다 ‘쓸모’란 무엇인지 다른 세상에선 어떨지 궁리하게 된다.

자유로운 상상이 사업적 가치로 이어지려면 경영자의 역할이 필요하다. 경영학의 개념과 기법이 상식이 돼 버린 세상에서 인문적 상상력은 더욱 절실한 과제가 됐다. 어느 날 갑자기 특강 주워 듣고 책 몇 권 봐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M건설은 새로 개발하는 신도시에 미술관·공연장을 활용해 주택 단지와 상가의 품격을 높이고 지역의 가치를 높이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마케팅과 도시 설계의 기법들을 아무리 동원해도 한 차원 높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미술·음악·건축 관련 집단의 생태계와 대화가 필요하다. 미술관과 공연장이 대중의 선택을 받아 체험 마케팅의 장이 되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가 필요하다.

스토리의 힘은 인문학에서 나온다. 사람은 세상을 일정한 테마와 맥락에서 스토리로 이해한다. 질문이 더해지고 새로운 정보가 확인되면서 스토리가 수정·보강된다. 사회적 여론이나 시장의 흐름도 이런 스토리텔링의 구조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싫든 좋든 인문학의 유산 속에서 생각과 감정의 틀을 얻는다.

고가의 패션 브랜드는 고유의 테마와 스토리를 구성해 제품과 서비스의 품격을 만든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때로는 상식을 깨는 파격을 혁신의 스토리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테슬라 차의 가치는 높아진다(전혀 모르는 원시인에게 이런 가치는 없다).

AI는 어떻게 물어보느냐에 따라 다른 답을 얻게 된다. 같은 AI 체계를 사용한다면 남다른 시각에서 추론할 때 자신만의 기회를 얻는다. 시장을 참가자들도 모르는 집단적 의식(혹은 무의식)으로 읽어 낸다면 압도적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최근 유튜브나 넷플릭스의 추천 콘텐츠도 AI를 이용한 일종의 큐레이션 서비스인데, 연령·지역을 넘어 콘텐츠 선호와 시청의 남모르는 포인트를 찾아내는 인문적 추론이 핵심이 된다.


역사와 사례 연구

인문학을 ‘공리공론(空理空論)’이라고 폄훼하는 경우가 있다.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던’ 개발연대에 지식인 흉내를 내는 분들의 덧없는 객담을 혐오하며 국사 시간에도 조선 성리학의 아둔함을 실학과 비교하며 배운 결과인지 모르겠다.

역사적 추론은 가설 설정과 정보 탐색, 검증의 과학적 과정과 같다. 오히려 수천 년 앞선다. 우겨대려는 내용에 대충 비슷한 역사 콘텐츠를 얹어 떠드는 얼치기들과 달리 제대로 된 역사적 추론은 기술과 경제의 구체적 사실을 담는다. 잘 모르고 아무 말이나 떠든 한심한 사람들이 문제일 뿐 인문학은 죄가 없다.

챈들러는 미국의 산업화와 기업 체제의 변화를 주요 기업들의 내부 자료와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분석했는데 경영자의 구체적 고민과 대응, 미국 정치와 정부의 속사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규모의 경제, 범위의 경제, 사업부 체제와 기획 통제 등 경영 전략 분야에서 공부하는 대부분의 내용이 나온다. 막연하게 ‘자본 축적’ 운운하는 구체적 사실이 없는 경제사, 돈 받고 회장님 영웅담이나 써 바치는 경영사와 다르다.

전략은 전쟁에서 시작됐고 역사는 전략 연구의 교재였다. 집단의 존망과 생사가 걸린 일이니 경제와 기술, 인간 심리의 치열한 고민이 들어있고 허울 좋은 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다만 정치적 이해관계를 정의(正義)로 윤색하고 군(軍)의 사기와 전쟁 동원을 위해 영웅적 승리를 꾸며낸 왜곡의 포장을 걷어내는 더 높은 수준의 추론이 필요하다.

사례 연구는 경영의 현실을 특정한 이론·논점에 비춰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성공 요인’과 ‘교훈’ 운운하는 유치한 분석이 아니라 세상을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보고 토론하는 일이다.

본격적 현장 연구를 통해 작성하면 좋지만 수업과 토론을 위해 간략히 정리한 교육용 사례도 있다. 어느 쪽이든 역사적 기술과 추론의 문법을 그대로 따른다(시의성이 필요해 최근의 사실과 논점을 다룰 뿐이다).

학자들의 연구는 조금 더 엄밀한 내용 타당성과 현실적 합성을 위해 이른바 방법론을 세밀하게 적용할 뿐 충분히 타당성이 확보된 보도는 논문에 대신해 연구와 토론에 사용된다.

챈들러의 미국 경제와 산업에 대한 심층 연구에도 주요 언론 보도가 교차 검증에 활용됐고 하버드대의 학부는 물론 MBA 과정의 거시·국제 경제 수업은 역사적 사레들과 당시의 언론 보도를 활용한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상상과 스토리텔링의 기반을 제공한다. 사례 연구는 역사적 추론의 틀을 따르고 전략은 역사에서 배울 것이 더 많다. 물론 제대로 된 인문학 공부일 때 그렇다.

영시 20편을 외워 괄호 넣기 시험을 보고 원작은 읽지도 않고 족보를 외워 때우는 인문학은 시간과 노력의 낭비일 뿐이다. 이런 사이비가 ‘공리공론’이라는 폄훼로 이어지고 무작정 외운 얼치기 경영학 단어들보다 못하게 여겨졌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튜브에 역사 콘텐츠가 인기이고 문화·예술을 내건 최고위 과정도 인기라니 다행인가 싶지만 불행히도 그 속내는 얄팍한 호기심, 혹은 허영심인 경우도 많다.

인간과 사회·역사에 대한 사색은 원래 대학의 역할이다. 잘하려면 너무 힘들고 그래서 꼭 필요한 사람만 하면 되지만 컴퓨터와 로봇이 일하는 시대에 각별히 중요해지고 말았다. 특히 전략을 다루는 경영자에게는 말이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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