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받아쓰기 보도는 그 어느 때보다 나쁘다 [미디어 리터러시]

조선희 2023. 5. 2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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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대한 반감이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좋은 언론'을 향한 갈구는 더 커지고 있다는 의미이겠지요. 매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 곧 '미디어 리터러시'가 중요해지는 시대, 우리 언론의 방향을 모색합니다.
기자들이 민주노총 건설노조 기자회견을 취재하고 있다.ⓒ시사IN 박미소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전국건설노동조합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 양회동씨가 5월2일 끝내 숨졌다. 양씨는 바로 전날인 노동절에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앞에서 분신했다. 이날 오후 구속 전 피의자신문을 앞두고 있었다. 양씨는 건설 현장에서 조합원 채용과 노조 전임비 지급을 강요했다는 혐의로 지난 1월부터 수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유서에 “죄 없이 정당하게 노조 활동을 했는데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이랍니다.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네요”라고 썼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노동조합 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지율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지난해 12월 화물연대 파업 당시, 윤석열 대통령은 “건설 현장에서 불법·폭력 행위가 판을 치고 있다”라고 발언했다. 사흘 뒤 경찰은 ‘200일간 건설 현장 특별단속’ 계획을 발표했고 검찰은 차례차례 기소로 답하고 있다. 지난 2월21일 국무회의에서는 윤 대통령이 ‘건폭(건설 현장 폭력)’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물론 폭력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러나 조합원 채용을 요구하며 집회를 벌이고 노조 전임비를 요구하는 행위의 어느 부분이 왜 ‘폭력’이 되는지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한편 민주노총·한국노총에 속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노동조합이라 보기 어려운 집단에 의한 불법·비리 행위가 적지 않은데도, 노조 전체를 폭력·불법 집단으로 낙인찍는 부정적 표현을 썼다.

이 상황에서 언론은 단순 중계자에 머무르고 있다. 경찰이 건설 현장 특별단속 성과를 자랑하는 보도자료를 내면 기사화하고, 검찰이 노조 간부 기소 성과를 자랑하는 보도자료를 내면 기사화한다. ‘건폭’도 마찬가지다. 국무회의에서 한 대통령 발언은 대부분 그대로 기사화되어 뉴스 소비자에게 전달되는데(심지어 ‘속보’로 나온다), ‘건폭’이라는 용어부터 분명 문제적인데도 그대로 기사화했다. 특히 당일 나온 국무회의 보도의 경우, 말 그대로 받아쓰기 보도에 가까운 기사가 많았기 때문에 해당 표현에 대한 비판은커녕 건설노조 관계자의 반론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국 언론의 고질적 문제

노동조합과 대화하기보다 그들에게 ‘폭력·불법 집단’ 프레임을 씌우고 ‘법과 원칙’ 운운하며 일반 시민과 다른 존재인 양 갈라치기 하는 것이 결코 옳은 일이 아님을 언론이 모를 리 없다(일부는 알고도 그럴 수 있다). 대부분이 습관적인 보도자료 베껴 쓰기, 타성에 젖은 대통령 국무회의 발언 옮겨 쓰기를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기자의 일이 듣고 받아 적는 데서 그쳐선 안 되는데, 한국 언론은 거기에 머물고 있다. 양씨 분신을 둘러싼 보도도 ‘왜 그가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기사는 거의 없다. 경찰서, 소방서, 야당 대표 말을 받아쓴 기사가 훨씬 더 많다.

세상 모든 일이 언론 탓은 아니다. 그러나 이건 분명하다. 정부가 노동조합을 적대시하는 이 환경에서 말만 옮기는 받아쓰기 보도, 따옴표 저널리즘, 중계 저널리즘은 훨씬 나쁘다. 따옴표 저널리즘이 흔한 비판의 대상이긴 하지만 지금 이때 훨씬 더 비판받아 마땅하다. 발화자가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중요한 결사체 중 하나인 노동조합을 싸잡아 모욕하고 헐뜯는 상황, 심지어 그가 최고 권력기관인 데다 이를 지속적으로 행하는 지금, 한국 언론의 고질적 문제는 더욱더 문제적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이를 비판할 때 해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중략) 그런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판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나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그 이후 둘은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이를 비판할 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지 말라고 지적하는 언론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은 정부와 노동조합 모두를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인 존재’로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다.

조선희 (민주언론시민연합 미디어감시팀 활동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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