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의 견문발검] '성소수자는 나대지 말라'는 당신의 말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3. 5. 28.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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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은 척 '성소수자 권리를 인정하지만, 제발 나대지 좀 말라'는 당신의 말이 폭력의 씨앗이다. 지금 전 세계를 관통하는 혐오 광풍은 바로 그 말부터 시작됐다.

[미디어오늘 이송희일 영화감독]

“우리에게 가족의 보호는 국가 안보 문제입니다. 이 나라에서 성소수자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30년 집권 연장의 기로에 서 있는 튀르키예 에르도안 대통령의 이번 대선 연설의 일부분이다. 에르도안 정부는 최근 몇 년 사이 '동성애 반대'를 핵심 정치 프레임으로 활용하고 있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성소수자 표현을 규제해왔다. 함부로 나대지 말라는 것이다. 지난해 6월에는 성소수자 퍼레이드를 진행하려던 활동가 370명을 구속했다.

심지어 지난해 9월 이스탄불에서는 성소수자 증오 시위가 벌어졌다. 수천 명이 '가족 보호는 국가 안보'라는 팻말을 들고 행진하며 노골적으로 성소수자 배제를 촉구했다. 수많은 성소수자들이 도시를 뒤흔드는 혐오의 외침 속에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튀르키예 행정부 웹사이트

2002년만 해도 차별 반대하던 젊은 에르도안

2002년에만 해도 AKP(정의개발당)의 젊은 에르도안은 성소수자 차별이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피력했었다. 또 2014년 이스탄불에서 열린 퀴어 퍼레이드에는 무려 10만명이 사람이 운집할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입장을 뒤집어 성소수자 반대를 정치 프로파간다로 내세운 것이다. 에르도안 정부의 이 같은 강성화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부상하는 우익 포퓰리즘과 신권위주의가 어떻게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중요 정치 의제로 수단화하는지, 어떻게 희생양 정치가 만개했는지를 예증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2021년 국제여성의날에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거리에서

우선, 유럽의 지도를 보자. 성소수자에 친화적인 서유럽과 동유럽 사이에 거대한 단절이 형성돼 있다. 오죽하면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대신 무지개 장막이 들어섰다는 말이 나온다. 러시아, 터키,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아르메니아 등 동유럽 20여개국에 걸쳐 반동성애 전선이 드리워져 있다.

우익포퓰리즘과 신권위주의, 어떻게 성소수자 폭력 이용하나

처음 포문을 연 것은 푸틴의 러시아였다. 2013년경부터 대대적으로 동성애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게이 선전 금지법'을 통해 성소수자들의 표현 자체를 금지시켰는데, 모스크바에서 100년 동안 퍼레이드를 금지하는 법령이 제출되기도 했다. 나대지 말고 눈에 보이지 말라는 것이다. 체첸의 카디로프는 한술 더 떠, 2017년부터 성소수자들을 닥치는 대로 사냥하고 고문했다. 한 인터뷰에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체첸에는 동성애자가 없습니다. 동성애자는 악마거든요.”

폴란드와 헝가리의 극우 정권이 그 뒤를 이었다. 폴란드의 두다 정부는 '성소수자 청정 지역 (LGBT-free zones)' 정책을 시행했다. 존재 자체를 청소하려는 것이다. 2020년 재선 때 두다는 '성소수자는 사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입니다' 라고 외치며 선거 캠페인을 진행했다. 헝가리의 오르반 정부는 더 나아가 '성소수자차별법'을 제정했다. 학교와 언론 등에서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대한 묘사와 논의를 전면 금지하는 법령이다.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것이다. 한편, 2021년 불가리아의 극우 대선 후보는 지지층과 함께 성소수자 인권센터를 습격하고 폭력을 행사해 충격을 안겨줬다.

혹자는 동유럽의 고유한 종교와 문화 때문이라고 반문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 직후인 1917년, 폴란드는 1918년 이래 동성애를 비범죄화했다. 이는 되려 서유럽보다 수십 년 앞선 행보였다. 구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된 후에는 성소수자 단체들이 발흥하고 퀴어 퍼레이드가 서서히 조직되고 있었다. 이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러시아와 동유럽에 극우 포퓰리즘이 창궐하면서부터다.

▲기사와 직접적으로 무관한 사진입니다. 사진=unspalsh

불평등과 공공성 와해, 안보·순혈에 대한 집착으로

세계화, 무역의 자유화, 사유화, 금융화로 점철된 신자유주의 질서가 오늘날 극우 포퓰리즘과 신권위주의의 인큐베이터로 기능했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초국적 기업과 서구 엘리트들이 불평등을 가속화하고 공공성을 와해했으며 고유의 정체성을 훼손했다는 불만이 '안보'와 '보호'에 집착하게 만들었고,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형태의 정념이 정치화된 것이 바로 극우 포퓰리즘이라는 것이다. 이 경향은 비단 동유럽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미국의 트럼프, 영국의 브렉시트, 인도 모디 정부, 브라질의 보우소나루에 이르기까지 지구촌 곳곳에 열병처럼 퍼진 상황이다.

이들 극우 포퓰리즘의 대부분은 '전통적 가치'와 종교와 가족 따위의 순혈주의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이주노동자, 난민, 성소수자들을 공동체를 위협하는 나쁜 타자로 적대시하고, 낙태권을 비롯한 여성의 재생산 권리를 부정한다. '내 아들이 게이일 바에는 그냥 사고로 죽는 것이 낫다'는 보우소나루, 트랜스젠더를 공공연히 표적 삼은 영국의 보수 정치인과 극우 페미니스트들, 최근 성소수자의 표현과 매체를 단속하기 시작한 중국, 여성에 대한 대대적인 마녀사냥과 더불어 성소수자를 더욱 강경하게 탄압하는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 등 사방에서 정체성과 문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본산 미국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 엊그제 공화당 대선 결선에 출사표를 던진 플로리다 주지사 론 디샌티스는 <동성애자라고 말하지 마 (Don't Say Gay)> 법안 추진으로 분쟁을 일으킨 극우 정치인이다. 학교에서 동성애 관련 토론과 표현 자체를 금지하겠다는 건데, 결국은 성소수자 입을 틀어막겠다는 것이다. 플로리다뿐 아니라 현재 미국에서는 극우 무장세력들이 성소수자들, 특히 트랜스젠더를 거의 사냥하듯이 몰아붙이는 실정이다.

신자유주의가 불러들인 성소수자 혐오
오세훈도 그렇게 시작했다

확실히 근래 지구 곳곳에 번지는 성소수자 혐오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실패가 불러들인 고약한 극우적 정동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여기 한국에서도 여봐란 듯 활개친다. 우선, 오세훈 서울시장이 퀴어문화축제의 서울 광장 사용을 불허했다. '조례' 핑계를 대지만, 그 동안 오세훈 시장이 사사건건 퀴어문화축제를 방해해왔던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극우 기독교 단체들과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며 결국 서울광장에서 성소수자들을 몰아냈다. 튀르키예의 에르도안과 러시아의 푸틴도 이렇게 나대지 말라면서 성소수자를 광장에서 쫓아내는 것부터 그 폭력의 여정을 시작했다.

▲오세훈 서울시장. ⓒ연합뉴스

그런가 하면, 충남인권조례를 시작으로 각 지역 인권조례를 폐지하려는 극우와 기독교 단체 들의 움직임이 거세다. 더 나아가 일선 학교에서 성평등 교육의 기미만 보여도 득달같이 달려들어 '부모의 이름으로' 온갖 협박을 일삼고 있다. 전 세계 극우들이 부모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성소수자를 공격하는 과정과 완전히 판박이다. 한편 이 혐오 광풍의 화룡점정은 국가인권위원회다. 이충상 상임위원이 '기저귀 찬 게이' 운운하며 성소수자를 모욕하면서 논란을 빚었다. 무려 국가인권위에서 벌어진 일이다. 극우 세력이 맹동하는 국가인권위라니, 한국의 인권이 기저귀를 찬 기막힌 형국이다.

어떤 존재든 자신을 드러낼 권리가 있다. 그 단순한 이치가 붕괴되는 순간, 민주주의의 장례식이 시작된다. 지구촌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는 극우 포퓰리즘과 백래시의 싹이 여기, 한국에서도 맹렬히 자라고 있다. 무엇보다 점잖은 척 성소수자 권리를 인정하지만, '제발 나대지 좀 말라'는 당신의 말이 폭력의 씨앗이다. 지금 전 세계를 관통하는 성소수자 혐오 광풍은 바로 그 말부터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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