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낭이 거느린 세계문화유산 코스, 후에·호이안·미선 [ESC]

한겨레 2023. 5. 28.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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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노동효의 지구 둘레길]노동효의 지구둘레길 베트남 여행②
후에 왕궁에서 가장 먼저 복원된 입구 ‘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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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에시 크비아트코프스키가 없었더라면 ‘각광받는 관광지 다낭’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전후 베트남은 파괴된 유적을 복원할 기술이 없었다. 국제사회에 도움을 청했다. 폴란드의 기념물보존연구소가 이에 응했다. 1981년 유적복원전문가 카지미에시가 임무를 맡았다. 그는 고대 참파 왕국의 유적지 미선을 발굴하고 복원하기 시작했다. 정글에 묻힌 유적을 발굴하던 중 폭발한 지뢰와 풍토병으로 동료들을 잃기도 했다. 1986년에 정치적 변혁을 겪던 폴란드 정부가 재정 지원을 끊자 그는 독일의 ‘참문화 우정협회’로부터 지원을 끌어내 발굴복원사업을 이어갔다.

그는 휴식이 필요할 때면 호이안을 찾곤 했다. 어느 날 건물 곳곳에 붙은 철거 표지를 발견했다. 베트남 정부는 낡은 건물들을 철거하고 신식 콘크리트 건물을 지을 예정이었다. 카지미에시는 남은 건물들을 보수·보전해야 한다고 베트남 정부를 설득했다. 덕분에 호이안은 옛 풍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로 남을 수 있었다. 문화유산을 보존하려는 카지미에시의 관심과 노력은 미선에서 호이안, 후에로 이어졌다.

1993년 옛 왕조의 수도 후에가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1997년 왕궁과 왕릉 복원에 전념하던 카지미에시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로부터 2년, 호이안과 미선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국제공항을 갖춘 다낭은 100㎞ 이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세 곳이나 거느린 해변휴양도시가 되었다. 푸껫, 세부, 코타키나발루가 ‘단품요리’라면 다낭은 미선·호이안·후에까지 곁들인 ‘코스요리’인 셈이다.

호이안과 안호이섬 사이를 잇는 투본강의 밤 풍경.

호이안의 ‘길거리 합창대회’

올해 4월 호찌민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역이 없는 호이안을 지나쳐 다낭역에 도착했다. 동행한 가수 손병휘와 함께 택시를 잡았다. 곧 호이안에 닿았다. 숙소에 배낭을 내려놓고 거리로 나섰다. 호이안은 16~18세기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했던 도시다. 중국·일본·아랍 상선들이 드나들었고 대항해시대 이후엔 유럽 상선까지 비단, 향신료를 사기 위해 찾았다. 조선인이 도착한 적도 있었다. 풍랑을 만나 표류해 온 제주도민이었다. 국왕은 그들에게 위로품까지 주고 그들을 조선에 데려다줄 중국 상선에 부탁했다. “조선인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증표를 받아오면 뱃값을 더 줄게”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중국 상선은 5개월 뒤 조선에 닿자마자 중국으로 압송됐다. 외국 선박이 아라비아해, 인도양, 남중국해, 태평양을 넘나들며 무역할 때, 조선은 꽁꽁 틀어박힌 채 바다를 통한 교역을 금하던 시절이었다.

호이안의 옛 시가지에서 국제합창대회가 열렸다. 콘서트홀이나 강당이 아닌 거리에서 합창대회를 하다니! 카지미에시를 기리며 세운 동상 앞에 합창단이 대회를 준비했다. 청중이 인도를 가득 채우고 가게 입구까지 막아섰다. 그럼에도 가게 주인들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베트남·라오스에 이어 타이 합창단이 등장했다. 아바의 ‘생큐 포 더 뮤직’. “음악 없이 살 수 있을까? 음악 없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노래나 춤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일까?”

투본강 위로 화려한 등을 켠 배가 지나고, 우리는 다리 건너 안호이섬으로 갔다. 강변 라이브클럽에 자리를 잡았다. 베트남 청년으로 구성된 밴드가 팝송을 불렀다. “본인들만의 방식으로 곡을 해석하고 변주하면서 노래해, 신선하다!” 병휘 형이 귀를 쫑긋 세웠다. 전쟁이 끝난 세상에서 청년들이 맘껏 개성을 발산하고 젊음의 에너지를 터트리며 춤추고 노래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상상했다. 이들이 ‘군부 독재를 끝낸 후’의 미얀마 청년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오행산의 동굴 안 사원의 입구.

열심히 사는 게 고마워서

다낭으로 숙소를 옮긴 우리는 마블마운틴으로 갔다. 종종 ‘손오공이 갇혔던 오행산’으로 소개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화강암과 대리석 산 5개가 한데 모인 장관을 본 왕이 “오행산 같구나!”라고 했던 데서 붙은 이름일 뿐. 봉우리마다 화산, 수산, 목산, 금산, 토산이란 뜻을 갖고 있다. 가장 큰 산은 수산인데 여러 동굴을 품고 있어서 한낮을 보내기에 좋았다. 연옥을 형상화한 동굴을 시작으로 미끈미끈한 대리석으로 이뤄진 산 정상까지 올랐다. 하산하면서 대리석 불상이 자리한 동굴에 들렀다. 기운 햇살이 천장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햇살이 허공의 먼지를 비췄다. 빛을 받았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먼지가 누군가의 생애 같았다.

다낭에서 묵는 동안 매번 같은 데서 저녁식사를 했다. 낮엔 오토바이 주차장, 저녁엔 식당으로 변하는 곳이었다. 연이어 방문하자 처음엔 외국인을 낯설어하던 종업원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웃었다. 베트남어로 된 메뉴판밖에 없었지만 주문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가령 구글 렌즈가 ‘불타는 사랑의 오징어’로 번역하면 ‘매운오징어볶음’ 정도로 짐작하면서. 마지막 날엔 양념돼지머리구이, 야채샐러드, 해물볶음밥에 맥주를 마셨다. 1만원 정도가 들었다. 친숙해진 종업원에게 번역 앱으로 물었다. “학생입니까?” “네.” “고등학생인가요, 대학생인가요?” “대학생이랍니다.” 병휘 형이 “팁을 좀 주면 어떨까” 하고 내게 물었다. “좋아요!” 그 또래 많은 청년이 카페에 앉아 저녁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았다. 같은 시간에 아르바이트하는 청년을 보니 고운 말이든 적은 돈이든 뭐라도 주고 싶었다. 음식값의 반을 팁으로 내밀자 청년이 놀란 듯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고맙다고 말했다. 천만에, 열심히 사는 네가 고맙구나.

젊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호이안 청년 밴드.

베트남의 프랑스 관광객

낮 기차를 타고 후에로 갔다. 1802년부터 베트남을 통치한 왕조의 수도였던 도시다. 베트남을 통일한 왕조지만 1840년대 후반부터 서구 세력에 잠식되기 시작해 1884년 프랑스 식민지가 됐으니 실질적 통치 기간은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도심을 지나는 강변에 왕이 머물던 궁전이 있다. 배산임수, 풍수지리에 따라 터를 잡았다. 해자로 둘러싸인 성의 둘레는 거대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화려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파괴의 흔적을 보여주는 공간에 가까웠다. 프랑스·미국과 연이어 전쟁을 치르면서 모든 전각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1947년 베트민이 왕궁을 점령하자 프랑스군은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포화를 쏟아부었다. 1968년 베트콩이 왕궁을 점령하자 미군은 미사일까지 발포했고 남아 있던 전각까지 잿더미로 변했다.전후 베트남 정부는 왕궁 입구인 오문과 태화전을 먼저 복원했고 지금도 복원이 진행 중이다. 총탄과 포탄 흔적이 당시의 참상과 폭발음을 떠올리게 했다.

이번에도 저녁식사 때면 매번 같은 식당을 찾았다. 외국인이 뜸한 길거리 식당을 연이어 찾아오자 주인아주머니가 얼굴을 알아보고 웃음 지었다. 음주운전에 대한 우려로 주류를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 맛있는 요리를 어떻게 술 없이 먹겠느냐. 뚜벅이니 염려할 필요 없다“고 푸념하자 검은 봉지에 맥주캔을 담아서 내밀었다. “발아래 숨기고 마셔!” 음료수 잔에 맥주를 따라 들이켰다. 음, 빨대까지 꽂으면 완벽하겠는걸! 번역 앱을 이용해 식당 주인과 얘길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나는 왕들이 만든 궁이나 그들의 무덤을 구경하는 시간보다 상인과 어울려 노는 시간이 더 좋았다.

후에에서 자주 찾아간 길거리 식당 풍경.

숙소 근처 점방은 밤을 보내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 안을 기웃거리니 할머니가 봉지 하나를 가리켰다. 스낵을 찾던 중이었지만 할머니 추천에 따랐다. 튀긴 돼지껍질이었다. 한 입 먹고 엄지 척을 내밀자 할머니가 함빡 웃었다. 병휘 형이 찬장 속 화이트 와인을 발견하곤 말했다. “뜨뜻하겠지? 아이스 버킷이랑 얼음만 있으면 될 텐데.” “형, 할머니께서 해결해주실 거야! 지금 할머니께선 우리가 뭘 원하든 다 해주실 태세거든!” “어떻게 알아?” “느낌으로!” 정말 할머니께선 플라스틱 통에 얼음을 담아 내밀었다. 잠시 후 프랑스어를 쓰는 무리가 들이닥치더니 가게 한쪽을 차지했다. 할머니께서 다가와 술병과 아이스 버킷을 발아래 숨기라고 손짓했다. 우리에게 베푼 호의를 그들에겐 베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다음날 하노이행 기차를 타기 위해 후에역으로 갔다. 이번엔 4인용 침대칸 아래층을 예약했다. 출발 후 위층의 베트남 승객들에게 내려와 같이 앉아가도 괜찮다고 손짓했다. 탑승 전 사뒀던 과일을 나눠 먹으며 번역 앱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모자 관계였다. 중년의 어머니가 기타 케이스를 가리켰다. 병휘 형이 기타를 꺼내 노래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박자에 맞춰 손뼉을 쳤다. 아들이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아마 떼, 뗴 두아, 떼 끼에로”로 시작하는 ‘서른네 번의 프러포즈’. 포르투갈어·알바니아어·스페인어 등 말은 다르지만 ‘같은 뜻’을 가진 서른네 개 문장으로 이뤄진 노래. “주 떼므(프랑스어), 아로하(마오리어)…” 아는 문장이 나오자 엄마와 아들이 환히 웃었다. “우히부키(남→여, 아랍어), 우히부카(여→남, 아랍어), 안 요우 엠(남→여 베트남어)….” 노래하는 동안 소음, 굉음, 폭발음 등 인류가 지나온 역사처럼 기차가 계속 덜컹거렸지만, 서른 네 개 문장이 가리키는 ‘단 하나의 의미’는 묻히지 않고 열차 칸을 채워줬다. “사랑해요.”

글·사진 노동효 여행작가

화성으로 떠나기 전 인류 삶과 지구 풍경을 톺아보기 위해 여행하는 ‘길 위의 노동자'. ‘지구둘레길’은 작가의 과거 여행을 회고하며 현재적 의미를 톺아보는 여행기다. <남미 히피 로드>, <세계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 빠이>, <푸른 영혼일 때 떠나라>, <로드 페로몬에 홀리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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