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축내러 나왔어?” 백화점 구두매장 노동자 가을씨의 하루
백화점 구두 매장 직원 가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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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길. 전철을 타려면 버스로 두어 정거장은 가야 하는데, 가을(가명)씨는 걷는다. 전철역이 나와도 내처 다음 역까지 걷는다.
“진짜 몸이 막 으스러질 정도로 아프지 않은 이상, 30~40분 걸어가요. 일부러 몸을 움직여야 오히려 피로가 풀려서요. 피곤한 상태에서는 아침부터 물류 정리하기가 힘들잖아요.”
백화점에 도착하면, 가을씨는 매장에 둔 종이 가방을 챙겨 직원용 화장실로 간다. 같은 층의 10여개 구두매장 여자 직원들이 하나둘 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몰려든다. 탈의실은 없지, 휴게실에는 시시티브이가 있지, 매장에는 ‘백룸’(창고)이 없지, 그렇다고 공용 창고에서 그럴 순 없으니, 화장실에서 근무복으로 갈아입는다. 백화점 영업 시작 전이라도 고객용 화장실은 직원 사용 금지라, 세 칸뿐인 화장실에서 차례를 기다린다. 이런 번거로움은 매니저 포함 남자 직원도 마찬가지다. 같은 시각 다른 화장실에서.
“그동안은 자율 복장이었어요. 청바지에 맨투맨도 입고 일했거든요. 근데 지난해 갑자기 단톡방에 공지가 올라오고 백화점 담당들이 돌아다니면서 규정이 바뀌었다고 지금까지 입었던 옷을 입지 말라 그랬어요.”
대신 정장 바지에 정장 셔츠를 입고, 정장 구두를 신으라 했다. 위아래 검정 기본에 셔츠는 흰색도 허용, 신발도 매장 판매품이면 스니커즈까진 가능하나, 바지는 남색과 회색도 절대 안 되며, 반드시 검정! 일방적으로 하달된 지침이었다. 가을씨에겐 다 없는 옷이라 사비로 새 옷을 장만했다. 백화점 쪽은 정장을 입고 일하라는데, 정장은 일하기에 영 번거로웠다. 직접 현장에서 몸을 움직여 보면 알 텐데….
직원 인건비 줄여야 매니저 몫 커져
“앉았다 일어났다 하면서 손님에게 신발을 신겨야 하는데, 비활동적이죠. 구두 매장은 일이 많아요. 사이즈마다 신겨봐야죠, 디자인마다 색깔이 아이보리·베이지·블랙, 이 세 가지는 기본이고, 여기에 핑크나 네이비가 추가되고, 시즌 색깔로 보라·그레이도 있으니까요. 정리도 사이즈별로 다 해야죠. 손님한테 맞는 제품이 없으면 얼른 창고에 다녀와야 하는데, 공용 창고가 매장 반대편 저 끝이에요. 아무래도 옷이 불편하죠.”
복장 지침은 더 세세했다. 셔츠 단추는 되도록 목 끝까지 채워라. 무산되긴 했지만, 남자 직원에겐 되도록 넥타이를 매라 했다.
“오래 일한 사람들이 그랬어요. 10년 전부터 청바지 입고 일했다고. 그런데 2023년도에 청바지도 못 입고 무조건 정장 바지에 정장 셔츠만 입으라는 게 말이 되나요? 물론 돈 벌러 나왔으니까 하라면 해야겠지만, 무슨 학교도 아니고 왜 이렇게 규정을 하나하나 정해서 빡빡하게 관리하고 제약을 줄까요?”
가을씨는 백화점에서 일하며 꿈을 키웠다.
“경력이 5년 넘었을 때였어요. 나한테도 문은 열려 있겠거니, 어서 매니저 달고 내 매장 해서 돈 많이 벌자고, 이 악물고 빠득빠득 열심히 일하고 버텼어요. 그런데 번아웃이 오더라고요.”
퇴사해 자신을 추스르고 다시 백화점으로 왔는데, 처음으로 중간관리자 역할을 하는 개인사업자의 매장에서 직원으로 일하게 됐다. 직영매장과 달리 근로계약서도 안 쓰고 ‘4대 보험도 안 해준다, 퇴직금도 없다’ 했다.
이 중간관리자는 사장이나 매니저로 불리는데, 본사에 보증금을 내고 매장을 맡아 월매출의 15~20%를 수수료로 받는다. 그는 백화점과 본사의 관리·감독을 받고, 직원은 이 매니저에게 고용돼 관리·감독을 받는다. 매니저는 인건비나 부자재값(택배비·택배상자·쇼핑백)을 줄이면 그만큼 자기 몫이 커지니, 근로기준법이 단 1명의 직원에게도 적용하라고 한 규정과 사회보험제도 규정도 어긴다. 가을씨 월급을 일하는 시간으로 계산해보니, 최저시급에도 못 미쳐 최저임금법을 위반하고 있다. 그런데 가을씨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거 하나하나 다 따지고 걸고넘어지면 백화점에서 일 못 해요. 의류 쪽이나 구두에서 일했던 언니·오빠들한테 듣기로 개인 매장은 다들 근로계약서 안 쓰는 걸로 알아요. 4대 보험, 퇴직금도 그렇고요. 본사들이 직영하지 않고 개인사업자에게 중간관리를 맡기는 건, 그게 이득이 되니까 그러겠죠? 인력 관리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요.”
“너 밥값 해야지, 밥 축내러 나왔어?”
가을씨는 평일엔 저녁 8시에, 금·토·일요일엔 연장근무로 저녁 8시30분에 퇴근한다. 백화점 영업시간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하니, 점심시간을 빼고 꼬박 9시간30분~10시간을 서서 일한다. 더군다나 중간관리자가 매출 압박을 심하게 해서 잠시도 못 앉고 “안녕하세요. ○○입니다. 안쪽에서 신어보세요. 세일입니다. 가격 저렴하게 해드릴게요”라며 호객 행위를 해야 한다.
“매장이 넓으면 동선을 크게 왔다 갔다 해서 좀 나을 텐데 그러지 못하니 더 힘들죠. 아, 맞다! 제일 중요한 거! 매니저는 앉아 있어요. 노트북 하거나 휴대폰 보면서. 나만 그렇게 앞에 나가서 호객 행위를 하고, 아무튼 그런 거예요. 종일 서 있어야 하는 거예요.”
가을씨는 예전 직영매장에서 일할 때처럼 지금도 판매뿐만 아니라, 전산등록·재고관리 등 매니저가 하는 일도 거의 다 한다.
“봄여름, 가을겨울 계절 바뀔 때 반품 치는 것도 매니저 대신 하거든요. 지금 월매출도 사실 적잖은데 매니저가 매출 욕심이 엄청나서 자신이 생각하는 일매출이 안 나오면 대놓고 뭐라 해요.”
매출 절반은 가을씨가 해내는데도 중간관리자는, 지금의 매장·직원 규모, 직원 처우로는 낼 수 없는 매출 목표를 세워 가을씨를 닦달한다. 사람을 부릴 줄 모르는지 날마다 하는 말이 이렇다고 한다. “야! 너 나왔으면 월급값을 해야지. 밥값을 해야지. 너 돈 벌러 나온 거 아니야? 너 오늘 몇개 팔았어? 너 이거 돈값을 해야지. 너 밥 축내러 나왔어?”
“기분 나쁘잖아요. 말을 예쁘게 하면 좋을 텐데, 사람 자존심 상하게. 이런 점이 스트레스예요. 구두 쪽은 매니저 대부분이 남자예요. 여자는 열명 중에 한두명 정도밖에 안 돼요. 아무래도 이렇게 말을 대놓고 세게 하니까 못 버티고 빨리빨리 나가거든요. 남자 직원도 못 버티고 나가기도 해요.”
저녁 퇴근길. 가을씨는 아침보다 역 하나를 미리 내린다. 이어폰을 꽂고 좋아하는 힙합 노래를 켠다. 지금은 30대지만 더 어릴 땐 “엄청 시끄러운” 록 음악을 좋아했다.
“집까지 50분 걸리는데, 운동 겸 스트레스 풀 겸 노래 들으면서 걸어요. 조금 신나는 걸로요. 일을 그만두고 싶다가도, 솔직히 백화점에서 손님 만나는 게 힘든 게 아니고 같이 일하는 매니저가 힘든 거라, 좀만 더 해봐야지 하죠. 매니저 말에 열받는다고 친구 붙잡고 만날 얘기할 수도 없고, 옆 매장 사람들한테 말해봤자 뒷담화밖에 안 되니까 혼자 풀어요. 내가 직원이고 월급 받는 처지지만, 사람을 기분 나쁘지 않게 고려해주면 안 되나? 도대체 우리 매니저는 말을 왜 그렇게 밉게 할까? 생각하면서, 화 삭이면서 걸어요. 집에 와서는 되도록 매장에서 있었던 일 생각 안 하게요.”
<여자, 노동을 말하다>(2013) 저자. 여성노동자가 머물고 움직이는 장소, 일하는 시간에서 이야기를 찾아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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