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번 폰팅 후, 여성이 집세 대신 내달라고…“변태야, 소문나고 싶니”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3. 5. 28.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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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80]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

앞으로 ‘씨네프레소’에서는 감독을 중심으로 영화를 리뷰합니다. 한 창작자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봤을 때, 더욱 풍성한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감독을 중심으로 보는 리뷰’ 시리즈에서 다룰 첫 연출자로 폴 토마스 앤더슨을 선정했습니다. 물론 OTT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작품들만 다룹니다.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인생의 위기는 ‘딱 한 번’에서 찾아올 때가 많다. 딱 한 번 ‘잡코인’에 투자했는데 거금을 물리거나, 딱 한 번 한눈을 팔았는데 배우자에게 들키는 것이다. 그전까진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항변하는 우리에게 인생은 말을 거는 것 같다. “어쨌든 한 번은 했잖아?”

‘펀치 드렁크 러브’(2003) 주인공 배리 이건(아담 샌들러)이 겪는 고통도 ‘딱 한 번’에서 비롯됐다. 이건은 사업체를 운영하며 당당히 자기 몫을 해내는 남자이지만 외로웠다. 어느 날 밤, 전단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성인 폰팅 번호로 전화를 걸고, 신용카드 번호 등 상대방이 요구하는 사적 정보를 몽땅 알려주게 된다.

주인공 배리 이건은 ‘노(no)’라고 쉽게 얘기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악인들은 그의 약점을 알아보고 등쳐 먹으려고 한다. [사진 제공=콜럼비아트라이스타]
악인은 약자를 알아본다
평균 수준의 분별력을 지닌 인물이라면 전화기 너머 정체 불명의 인간에게 세세한 개인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남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 역시 상대방을 한 두 차례 찔러보다가 통하지 않으면 물러서기 마련이다. 그러나 폰팅 업체는 배리 이건에게 민감 정보를 당연한 듯 물어본다. 그가 약한 심성의 소유자란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아담 샌들러는 주인공 배리 이건의 나약한 내면을 떨리는 목소리와 불안정한 시선 처리를 통해 성공적으로 표현했다. [사진 제공=콜럼비아트라이스타]
초원 위의 맹수가 바들바들 떠는 초식동물을 보고 먹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듯 남을 등쳐 먹는 것을 업으로 삼는 악인은 약자를 한눈에 가려낼 수 있다. 이건은 검찰을 사칭하는 전화 사기에 정보를 술술 털어놓는 피해자처럼,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상대방의 당당한 기세에 눌려 무장 해제돼버린다.

다음 날 아침 그는 폰팅 상대로부터 집세를 낼 돈이 없으니 대신 지불해달라는 전화를 받게 된다. 한화로 백만원 가까이 되는 돈이다. 정중히 거절하는 이건에게 상대는 발톱을 드러낸다. “당신 여자친구랑 얘기해야겠군요. 당신 정보도 다 있으니 더 쉽겠네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폰팅 공갈 협박단’의 우두머리 격으로 등장한다. 짧은 출연에도 존재감이 묵직하다. [사진 제공=콜럼비아트라이스타]
7명의 여자 형제들, 억눌렸던 그의 내면
쉽게 ‘아니’라고 얘기하지 못하는 이건의 성격은 어디서 형성됐을까. 영화는 그의 가족 관계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것 같다. 7명이나 되는 여자 형제들은 모두 이건을 좋아하는 듯하지만 만만하게 여기는 것도 사실이다. 가족 모임이 있는 어느 날 여자 형제들이 번갈아가면서 직장으로 전화를 건다. 참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숫기 없어서 자주 내빼는 이건을 꼭 참석시키기 위한 의도지만, 형제가 지금 한창 바쁘다는 사실은 배려하지 않는다.

이건이 자리에 나타나면 여자 형제들은 그의 어린 시절 실수를 언급하며 유쾌해한다. 정작 이건의 얼굴은 굳는다. 이건은 여자 형제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 곤란을 겪었던 일을 떠올리기 때문에 그들의 무례에 쉽게 화내지 못한다. 여자 형제들은 악의가 없다. 본인들이 놀리고 이건은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관계의 패턴이 고착화해버린 것이다. 이런 관계 속에선 상대방 감정을 기민하게 읽기 어렵다.

그의 여동생(왼쪽)은 약속 조율도 하지 않고 사업장으로 불쑥 찾아온다. 오빠에게 직장 동료(가운데)를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의 여자 형제들은 이건을 아끼는 것 같지만, 섬세한 배려가 부족하다. [사진 제공=콜럼비아트라이스타]
모두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었던 그는 집에서나 밖에서나 꾹꾹 억누르기만 하고, 이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이 그를 호구로 여기는 일도 많아진다. 응축된 분노는 이상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는 얌전히 있다가 유리창을 깨고, 레스토랑 화장실을 부순다. 유리창과 화장실은 자기가 불편하게 한다고 해서 항의하지 않는 존재라는 공통점이 있다.

식품 회사 쿠폰을 모으면 항공 마일리지를 주는 프로모션을 보고, 그는 가장 저렴한 푸딩을 3000달러어치 사서 100만 마일을 모으려고 시도한다. 이 에피소드 역할은 단순히 그의 편집증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선다. 늘 호구 잡히는 그가 남의 호구를 잡아보려는 것이다. 자신이 식품 회사 프로모션의 허점을 이용해서 큰 이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기쁨을 느낀다. 늘 이용만 당하는 자신이 누군가의 약점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푸딩 3000달러 어치를 구매해 항공 마일리지를 100만 마일이나 채울 생각에 들뜬 이건이 스텝을 밟고 있다. [사진 제공=콜럼비아트라이스타]
모든 이의 기분을 신경 쓰던 남자, 단 한 사람의 감정에 집중하다
이건이 겪는 어려움은 다층적이고 복잡하지만, 하나의 원인으로 엮인다. 7명의 드센 여자 형제들과 좌충우돌 지내는 동안 그는 가급적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으려는 성향을 갖게 됐다. 불편한 상황을 만들기 싫어서 남의 부당한 요구에도 좀체 ‘노(no)’를 외치지 않는다. 성인 폰팅 업체는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급급한 이건의 약점을 알아보고, 떼거리로 그의 동네를 찾아와 ‘변태’라고 놀리며 금품을 갈취한다.
아담 샌들러는 유독 불안정한 내면의 소유자를 자주 연기했다. ‘언컷 젬스’ ‘클릭’ ‘성질 죽이기’ 등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사진 제공=콜럼비아트라이스타]
이 영화 연출자 폴 토마스 앤더슨은 어린 시절의 결핍이 한 사람의 성격을 어떻게 피폐하게 하는지 집요하게 파헤쳐온 감독이다. 유년기에 행복하지 못했던 등장인물들에게 연민을 갖는 그는 대부분 서사에서 한 번은 구원의 빛을 비춘다. 어떤 인물은 아집에 빠져 그 빛을 외면하기도 하지만, 몇몇은 이를 알아보고 자신의 안전지대에서 빠져나온다.
‘씨네프레소’에서는 앞서 ‘데어 윌 비 블러드’와 ‘팬텀 스레드’를 통해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을 소개한 바 있다. 두 영화에서는 무한한 성취를 얻으려는 사람은 사랑에 성공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했다면, ‘펀치 드렁크 러브’에선 모든 이의 감정을 만족시키려는 태도로는 단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사진은 ‘팬텀 스레드’ 중 한 장면. [사진 제공=유니버설픽처스]
‘펀치 드렁크 러브’ 배리 이건은 후자다. 동생이 소개해준 레나(에밀리 왓슨)는 그를 존중하며 조금씩 다가온다. 이건을 찾아갔다가 분주해 보이니 다른 날을 기약하고, 이건이 자기 질문을 불편해할 땐 한 발짝 물러난다. 그녀는 이건의 전화번호를 묻는 대신 자기 번호를 남기고 떠나는 사람이다. 관계의 발전을 제안하고, 선택권은 늘 이건에게 준다. 자기들이 편한 시간에 연락해 늘 원하는 대답을 듣고야 마는 형제들과는 다르다.
이건은 자기 앞에 선물처럼 다가온 관계를 놓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사랑이 풋풋하게 그려진다. [사진 제공=콜럼비아트라이스타]
이건은 제목처럼 ‘펀치 드렁크 러브’(Punch-drunk love)에 빠진다. 경기 도중 머리에 펀치를 강하게 맞은 복서들이 혼란과 혼돈을 느끼듯, 사랑의 강력한 펀치를 맞은 그는 주변 세상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에게 푹 빠진다. 그래서 만사를 제쳐두고 그녀가 있는 하와이로 떠난다. 그녀 호텔방 번호를 알려달라는 이건의 요청에 자꾸 딴소리를 하며 시간만 죽이는 여동생에겐 버럭 화를 낸다. 이는 기존에 그가 여자 형제들과 맺던 관계 패턴을 벗어나는 것이다.

모든 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과도한 에너지를 쓰던 이건은 자신을 존중해주는 단 한 사람의 마음만 신경 쓰기로 한다. 성인 폰팅 업체에도 더 이상 당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주변에 폭로하겠다는 협박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맞아 죽기 싫으면 이제 끝났다고 해. 나한텐 당신이 모르는 힘이 있어. 내가 가진 사랑, 당신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몰라.”

전작 ‘매그놀리아’를 무려 188분짜리 영화로 만들었던 폴 토마스 앤더슨은 ‘펀치 드렁크 러브’를 95분의 러닝타임으로 완성해냈다. 짧은 상영 시간 동안 연인의 사랑이 발전하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관객 시선을 두 사람에게만 집중시키는 여러 아이디어를 썼다. [사진 제공=콜럼비아트라이스타]
모든 이와 평화롭게 지내려다간, 한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감각적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배경과 두 연인을 대비시키는 여러 시각적 아이디어가 관객 시선을 두 연인에게 집중시킨다. 존 브라이언의 음악은 영상의 리듬과 완벽히 조화하며 주인공 심리를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인간관계를 대하는 배리 이건의 변화를 통해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도 뚜렷하다. 그가 모든 관계에서 평화를 추구할 때, 정작 어느 관계도 평화롭지 못했다. 이제 그는 소중한 관계를 지키기 위해선 때로 싸움과 소란도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소음으로 가득하던 그의 내면엔 사랑의 멜로디가 흐른다.
‘펀치 드렁크 러브’ 포스터. [사진 제공=콜럼비아트라이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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