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의 세계화’ 디즈니…‘흑인 인어공주’ 승부수

한겨레 2023. 5. 2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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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인어공주
‘부르주아 문화’ 유럽 동화 가져와
미국식 인종주의 학습시켰지만
남성보다 여성 순수해야 한다는
‘백인 공주’ 고착된 이미지 전복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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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가 흑인이라고?” 실사판 <인어공주>(2023)의 흑인 배우 캐스팅에 대해 논하는 한 칼럼의 제목이다. 이 칼럼은 흥미로운 논점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이상한 질문이고 맞지 않는 비교다. ‘인어공주’는 ‘춘향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어공주’ 하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빨간 머리에 초록 지느러미를 가진 수집가 인어 ‘에리얼’을 떠올리게 된다. 이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의 원작에는 인어공주의 머리카락이나 지느러미 색에 대한 묘사가 없다. 심지어 언니들이 인간의 물건을 수집할 때에도 그는 대리석 조각 외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는 이름 없이 ‘막내 공주’라고 불렸다. 우리가 떠올리는 ‘에리얼’은 디즈니가 부여한 고유명이다.

‘미국식 성역할 고정관념’ 학습

이렇게 ‘인어공주=에리얼’이 된 건 디즈니가 지난 100년간 누려온 힘과 영향력 때문이다. 디즈니 설립자인 월트 디즈니는 19세기 유럽의 엘리트 기독교인이 부르주아 계급을 재생산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읽혔던 동화를 미국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거기에 미국식 이데올로기라는 재료를 골고루 섞어 미국화시켰다. 그렇게 기독교인의 선함과 성실함을 내면화한 개인의 매력이 성공의 조건이라는 신화로 포장돼, 잘 팔리는 이야기 상품이 된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미국의 위대함’을 설파하겠노라 공공연히 떠들곤 했던 월트 디즈니는, 위대한 미국의 미래인 아이들을 온순한 국민으로 훈육하는 ‘훌륭한 교훈’들로 가득 찬 성장담을 상당히 좋아했다. 그가 유럽의 아동 출판시장에서 인기를 누리던 동화를 끊임없이 애니메이션으로 옮겼던 이유다. <동화의 정체>에서 저자 잭 자이프스는 이 과정을 통해 “디즈니의 이름은 동화 장르와 사실상 동의어가 됐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20세기를 지나면서 유럽 동화는 디즈니의 손을 거쳐 미국화되었고, 이는 곧 동화의 ‘세계화’를 의미했다. 유럽의 부르주아 문화였던 동화가 이제 전 세계인이 즐길 수 있는 대중문화가 된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다채로운 상상력을 향유할 수 있었다. 동시에 미국식 능력주의와 외모지상주의, 성역할 고정관념, 그리고 인종주의 등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학습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동화 향유층의 지역과 계급만 확장된 것도 아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심지어 시간을 초월한다. 내가 10대 초반에 정신없이 매료돼 셀 수 없이 돌려 보았던 <인어공주>(1989)를, 나와 서른살 차이가 나는 조카도 보고 자랐다. 조카가 한동안 가장 좋아했던 공주는 오로라였는데, 그는 1950년대 디즈니에서 제작한 <잠자는 숲속의 공주>(1959)의 주인공이다.

인어공주가 춘향이가 아니라는 말은 이런 의미다. 디즈니의 공주는 한 지역의 전통을 보여주는 특수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이미 그 전통의 뿌리에서 뽑혀 나와 미국이 문화적 헤게모니를 잡은 이 세계에서 보편의 지위를 획득했다. 우리가 아는 인어공주는 인간의 영혼을 꿈꾸는 막내 공주가 아니다. 그는 디즈니가 창조한 에리얼이고, 그 에리얼이 행사해온 영향력에 대해 디즈니는 이제 자기들의 방식으로 (그리고 자기들이 돈을 버는 방식으로) 책임을 지려고 하고 있다. 이게 핼리 베일리의 에리얼이 등장한 배경이다.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그러므로 <인어공주> 실사가 백인을 흑인으로만 바꿨을 뿐 흑인성을 충분히 탐구하고 있지 않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곱씹어 보게 된다. 우선은 보편의 얼굴에 백인이 아닌 다른 얼굴을 넣었다는 것 자체가 역사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흑인이 지속적으로 지워지고 비인간화된 역사를 생각한다면, 흑인 에리얼이라는 설정 자체가 이미 전복적이다. <인어공주>는 마치 피부색이란 없다는 듯 온갖 인종을 스크린 안에 모아놓는 탈역사적 재현을 통해 오히려 역사성을 다루는 기묘한 전략을 세운 셈이다.

‘백인 에리얼’ 여성혐오적 강박

물론 실사 <인어공주>의 도전이 충분하지는 않다. 이 작품이 실제로 백인 특권을 문제 삼고 흑인성을 제대로 다루려고 했다면, 가장 급진적으로 뒤집어엎어야 했던 건 두 왕국 후계자들이 만나 이성애 결혼을 해서 왕국의 미래를 위해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결말일지도 모른다. 이제 두 사람은 세계의 지식을 수집해 왕국을 재건함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하고, 이 결혼의 정상성과 정당성을 확정해야 한다. 이만큼 ‘위대한 백인’스러운 건 없다.

다만 영화는 이성애 결혼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아도 이성애 결혼에 갇혀 있던 성역할 고정관념을 뒤집어 보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월트 디즈니가 백인 중심적으로 ‘미국의 위대함’을 주장할 때 성역할 분업과 그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집착했던 걸 돌이켜 보면, 에리얼에게 탐험가의 자질을 부여하고 흑인 여왕을 세운 건, 대단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젠더와 인종을 교차적으로 고려한 결과다.

영국의 영화학자 리처드 다이어가 <화이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피부로서의 흰색은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범주다. 피부색은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누가 (보편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고 제외될 것인가를 통치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기독교도의 관점에서 유대인은 흑인이었고, 영국인의 관점에서는 아일랜드인이 흑인이었다. 예외적으로 백인 여자는 언제나 백인 남자보다 더 하얀 존재여야 했는데, 백인 여자에겐 순수와 순결, 소극적인 태도가 강요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리얼이 백인이어야만 ‘진짜’라는 주장에 들어 있는 건 인종차별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여성을 ‘순백’의 자리에 놓으려는 여성혐오적 강박도 함께한다. ‘바다 마녀’인 어슐라를 흑인으로 캐스팅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렇게까지 시끄러웠을 리 없다.

그래서, 춘향이가 흑인이라면 어떨까? <춘향전>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되어서 한 30년쯤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뒤에 리메이크되는 것이라면 그게 대체 무슨 문제이겠는가? 어차피 그 춘향이는 애초에 조선시대 말로 판소리를 부르는 게 아니라 영어로 팝을 노래하고 있을 테니까. 모든 건 맥락 안에서 사유돼야 한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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