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률 급락에 재시험·문제 2번씩 인쇄 전원 정답... 국가자격시험 사고史 [그때 그 뉴스]
세무사시험, 2005년 영어 인쇄 실수로 11문제 전원 정답
변별력 상실, 이후 토익·토플로 대체... 산업인력공단이 대행
2021년 일부 과목 면제 세무공무원 합격 급증 '불공정 논란'
공인중개사시험, 2004년 합격률 1%대 급락에 민원 3만여건
정부 홈피 다운, 이례적 사과... 이듬해 추가시험 실시
지난 23일 정말 황당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지난달 23일 치러진 '2023년 정기 기사·산업기사 제1회 실기시험'에 응시한 수험생 609명의 필답형 답안지가 채점도 하지 않은 채 파쇄되는 초유의 사고가 발생한 겁니다. 어수봉 산업인력관리공단 이사장은 "16개 시험장에서 나온 총 18개 포대의 답안지 중 직원 실수로 한 포대는 창고로 옮겨지고, 나머지 17개 포대만 채점실로 옮겨졌다"며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나고 최근 채점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한 포대가 누락됐다는 사실을 인지했는데, 불과 며칠 전 창고에 있던 모든 폐문서를 파기한 상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공단은 피해 응시자 609명 전원에게 재시험 기회를 마련하고, 추가 보상안도 검토 중이라고 했지만 형평성 논란과 손해배상 청구 소송으로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옵니다. 어 이사장은 "국가자격시험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담보해야 할 공공기관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점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공단이 자격검정관리에 소홀해 시험 응시자 여러분께 피해를 입힌 점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국가자격시험을 주관하는 공공기관의 소홀한 관리감독이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이어진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100%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인쇄가 잘못돼 시험의 변별력을 상실한 황당한 실수나 난도 조절에 실패해 재시험을 치른 적도 있네요.
"세무사시험, 2021년 세무경력자 면제 과목서 일반인 82% 과락 '불공정 논란'"
2년 전인 2021년 제58회 세무사자격시험에서는 세무공무원 출신 합격자가 대폭 늘어나면서 '난도 조작'과 '불공정 논란'이 제기됐습니다. 세무사자격시험은 1·2차로 나뉘고, 2차 시험은 4개(회계학 1·2부, 세법학 1·2부) 과목 중 한 과목이라도 40점을 넘지 못하면 과락으로 탈락하고, 평균 점수가 높은 순으로 합격자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일반 응시생 3,962명 중 82.1%(3,254명)가 세법학 1부 과목에서 40점 미만을 받아 과락으로 탈락했습니다. 직전 5년(2016~2020년)간 해당 과목 평균 과락률이 38.66%였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였죠.
특히 세무공무원 출신 응시생 상당수가 세법학 1부 과목을 면제받아 문제가 커졌습니다. 세무공무원 경력 10년 이상이면 1차 시험이 면제되고, 세무공무원 경력 20년 이상이거나 경력 10년 이상자 중 5급 이상으로 5년 이상 재직자는 2차 시험 중 세법학 2과목을 면제받습니다. 이로 인해 전체 합격자(706명) 중 세무공무원 출신(151명) 비중이 21.4%를 기록, 2020년(2.4%) 2019년(4.8%) 2018년(1.8%)에 비해 이례적으로 폭증했죠.
탈락한 수험생들이 집단 반발했고, 당시 안철수 대선 후보가 "세무공무원 출신들이 면제받는 과목에서 일반 응시자의 82.3%가 과락을 받고, 51.1%가 0점을 받았다고 한다. 충격적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뭐 이런 시험이 다 있습니까?"라며 수험생들과 함께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했죠.
화들짝 놀란 고용부가 먼저 4주간 자체적으로 '특정 감사'를 실시한 결과, 채점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법학 1부 문제 중 채점 위원이 같은 답에 다른 점수를 매기기도 했고, 채점 담당자가 이를 제대로 확인·검토하지 않았습니다. 또 출제위원을 전산 선정 시스템에 따라 부여된 우선순위대로 선정하지도 않았고, 시험 난도도 2차 시험 과목 전체 16개 문항 중 10개 문항에서 예상 난도와 실질 난도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 등을 발견했죠. 고용부는 시험을 주관한 산업인력관리공단에 '기관 경고'를, 관련자 등 6명에게는 징계 조처를 하도록 했습니다. 다만 '난도 조작' '불공정 논란'에 대해서는 "모든 출제위원들이 공모해야 한다는 얘긴데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후 감사원 감사에서도 "채점 결과의 편차가 크고 일관성이 심각하게 결여된 것으로 파악됐다"며 재채점을 요구했습니다.
"2005년 인쇄 잘못돼 영어 1문제 누락·5문제 2번씩 중복 출제"
이보다 앞선 2006년 제43회 세무사자격시험에서는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1차 시험 영어(총 40문제) 과목의 B형 문제지 2쪽이 잘못 인쇄돼 1문제는 누락되고, 5문제는 2번씩 중복돼 나오는 사고가 발생한 겁니다.
당시 시험을 주관한 국세공무원교육원은 "영어과목 인쇄판 일부가 손상돼 다시 제작하는 과정에서 A형 문제 일부가 잘못 편집돼 오류가 발생했다"고 해명하고, 해당 6문제만 재시험을 치르기로 했다가 "최종 인쇄 점검을 소홀히 해 사회적 비용 낭비를 초래한 것은 물론 재시험으로 수험생 간 형평성 침해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쇄도했습니다.
그러자 영어과목을 다시 시험 보는 대신 오류 문항 전체를 정답으로 인정하기로 결정을 번복합니다. 즉 A·B형 응시자 전원은 영어과목 40문항 가운데 중복되거나 누락된 11개 문항을 제외한 29개 문항만 채점하게 됐고, 수험생들은 29개 문항 중 5개 문항만 맞히면 과락(40점)을 면했습니다. 시험으로서의 변별력을 사실상 포기한 셈입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국가자격시험으로서의 신뢰와 변별력을 상실해버려, 합격자 발표 후 불합격한 753명이 '불합격결정처분 취소청구' 소송을 냈는데요. 법원은 "중대한 과실로 인쇄사고를 막지 못하고 대응과정에서 수험생들에게 혼란을 초래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불합격 처분을 전부 무효화할 정도였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고 기각했습니다.
이후 수험생 883명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는 법원도 "국세청의 주의 소홀로 수험생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고 정신적인 피해를 줘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며 1인당 30만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고 발생 직후 김경원 국세공무원교육원장은 사표를 내고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듬해인 2007년부터는 세무사시험 영어과목을 토익 토플 텝스 등 민간어학시험으로 대체했습니다. 또 2009년부터 산업인력관리공단이 세무사자격시험 업무를 위탁받아 실시하기 시작한 겁니다.
요즘 인기가 높은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은 문제가 커져 재시험을 실시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연은 1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4년 11월 14일 15만1,000여 명이 응시한 제15회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이 지나치게 어렵게 출제돼, 항의가 빗발친 것이 발단입니다. 예년에 15% 안팎이었던 합격률이 가채점 결과 1~2%에 불과했던 겁니다. (이후 실제 채점 결과 합격률이 1%대였습니다.)
"2004년 합격률 1% '사법고시급 고난도' 공인중개사 시험, 응시자 항의 빗발"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응시자들은 시험 다음 날인 15일 오전부터 "난도가 터무니없이 높았다", "민법 등 모든 과목이 사법시험처럼 어려웠다", "전 과목 평균 60점 이상인 합격 기준과 과락(40점) 기준을 낮춰라" 등의 민원 글을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홈페이지에 올리기 시작했고, 접속량 폭주로 홈페이지가 3일 동안 마비됐었네요. 건교부 관계자가 "그동안 암기식 위주로 출제됐던 문제가 분석 위주로 바뀌면서 시험이 어려워졌다"며 "시험과 관련한 민원성 글이 3일 동안 6,000여 건이나 올라왔다"고 말했습니다. (추후 감사원 감사 결과 실제 제기된 민원은 3만3,000건.)
결국 건교부는 이례적으로 17일 홈페이지를 통해 "난이도 문제 등으로 심려를 끼쳐드린 데 죄송합니다"라고 사과까지 했지만, 성난 응시자들의 원성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응시 가능한 공인중개사 시험이 치를 때마다 오답 시비 등이 불거져 2002년부터는 시험주관기관을 건교부에서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 바꾸었는데도 논란을 더 키웠던 것이죠.
수험생들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평소 모의고사에서는 90점 이상을 받았었지만 가채점 결과 탈락한 것으로 나왔다. 20대인 제가 이 정도라면 50대 이상 중장년층 수험생은 아예 시험을 포기하라는 것과 진배없다", "시험문제가 너무 어려워 고사장마다 중간에 포기하고 나가는 수험생이 적지 않았고, 심지어 어떤 교실에서는20 절반 이상이 도중에 퇴실한 경우도 있었다"고 토로할 정도였으니까요. 응시자들 5,000여 명이 서울 여의도에서 시험 무효화와 재시험 실시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항의 집회도 열었습니다.
"정부 이례적 사과... 34억 원 들여 추가 시험 실시"
이해찬 국무총리도 나서 "개선방안을 마련하라"(2004년 11월 23일 국무회의)고 지시합니다. 이 총리는 "공인중개사 시험을 쉽게 출제토록 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대선 공약사항"이라며 "이번 15회 공인중개사 시험이 매우 어렵게 출제돼 집단민원을 일으킨 것은 대통령 공약에 배치되는 일"이라고 지적했네요. 또 "공인중개사 시험은 정부가 민간에 위탁한 업무로, 대통령 공약과 관련한 정책을 집행하거나 민간에 위탁할 때는 그만큼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며 "모든 국무위원들은 정책을 집행할 때 국정과제나 대통령 공약 등 국민에 대한 약속을 잘 숙지해 기본방침에 배치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달라"고 당부합니다.
건교부도 "재시험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합니다. 그래서 매년 한 차례 실시됐던 공인중개사 시험이 2005년에는 5월과 10월 두 차례 치러졌죠. 재시험에는 국민 세금 34억 원이 추가로 쓰였네요.
2005년 11월 발표된 감사원의 감사 결과, 시험 출제위원 48명 중 15명이 선정·검토위원까지 맡아 자신들이 출제한 문제의 상당수를 시험문제로 선정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공인중개사시험은 출제위원이 시험에 나오는 문제 수보다 5배 많은 문제를 만들면 선정·검토위원이 실제로 시험에 낼 문제를 정하는 방식으로 출제됐는데, 출제위원과 선정·검토위원을 중복 위촉해서는 안 된다는 관련 규정은 없으나 출제위원이 선정·검토위원까지 맡아 공정성과 난이도 조절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 겁니다.
박민식 기자 bemyself@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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