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 위주의 아카이빙을 시작합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 같은 장소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그 꿈의 거리에 서면 나는 낭만으로 가득찰거야 많은 연인들이 꿈을 나누고 리듬 속에 춤추는 거리 나는 그 거리 거리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고 싶어.
마로니에의 <동숭로에서>(1989)라는 곡의 가사입니다. 연인들이 꿈을 나누는 낭만의 거리, 오늘은 노래의 배경이 되는 그 길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전국 수백여 개의 대학교 앞, 카페나 주점, 음식점이 즐비한 거리에는 으레 ‘대학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중에서도 ‘대학로’라고 하면 가장 먼저 종로5가부터 혜화동로터리 까지 길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그 길이 ‘대학로’의 원조 격이기 때문 아닐까요. 대학로는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식 고등교육기관인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이 자리했던 길이었습니다. 즉,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교 앞 길(또는 상권)’이 만들어진 곳입니다.
조선시대 대학가, 반촌 이야기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대학로 일대는 조선시대에도 대학가였다는 점을 아시나요.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과 인접한 이곳은 ‘반촌’으로 불렸습니다. 반촌은 성균관의 실무 사역자들인 ‘반인’들이 터를 잡고 살던 동네였습니다. 이들은 성균관의 비용과 재정, 유생들의 기숙과 식사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반촌은 반인 뿐 아니라 유생들과 중인, 노비까지 온갖 신분이 뒤섞인 동네였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그 모습이 지금의 대학가와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상상됩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반촌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며 여가를 보내고, 삼삼오오 모여 공부를 했다 전해집니다. 반인들은 지방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숙을 받기도 하고, 소고기를 도살해 판매하는 현방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서울대학교와 함께 걸어온 대학로의 역사
대학로의 과거는 서울대학교의 역사와 떼어놓고 볼 수 없습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0년대 일본은 경성에 여섯 번째 제국대학을 설립합니다. 한국사 최초의 근대식 대학이자 서울대학교의 모태인 경성제국대학입니다. 1924년 청량리에 예과 개교를 시작으로 1926년 의학부와 법문학부, 1941년 이공학부가 세워집니다. 이중 의학부와 법문학부가 현재 대학로에 나란히 마주보고 들어섭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경성제국대학 이름에서 ‘제국’은 지워집니다. 1945년 경성대학은 여러 전문학교를 통합해 서울대학으로 개편, 새로 태어납니다. 일제 강점기에 교육기능이 중단되었던 성균관도 해방과 동시에 성균관대학교로 부활합니다. 대학 진학이 흔치 않았던 시대에 대학로는 베레모를 쓰고 교복을 입은 대학생들이 오가는, 젊음과 지성이 빛나는 거리였습니다.
1975년 박정희 정부는 서울대 종합화 계획에 따라 관악골프장을 개발해 새로운 캠퍼스를 조성합니다. 대학로의 서울대 문리대·법대도 이때 대학로를 떠나 관악캠퍼스로 옮겨갑니다. 의과대학은 그대로 남겨졌고, 지금도 이곳에 의과·간호대학(서울대 연건캠퍼스)과 서울대병원이 자리해 있습니다.
한편 서울대 문리대·법대 캠퍼스가 있던 자리는 공원으로 탈바꿈하는데,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심어져 있던 마로니에 나무에서 착안해 ‘마로니에 공원’으로 이름 지어집니다. 공원의 중앙 광장에는 ‘서울대학교 유지기념비’라는 작은 표지석이 남아 있습니다. 표지석의 적힌 일부를 전합니다.
1975년 1월 17일 오전 9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과학관 407호 강의실에서 동숭동 캠퍼스에서의 마지막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다 낡아 삐걱거리는 강의실이었지만 그 소리는 어쩜 그렇게도 맑았던지! 우리는 더 이상 이곳 운동장에서 뛰지 않지만, 언젠가 더 높이 뛰도록 언제나 이곳을 생각할 것입니다. 남겨두고 온 캠퍼스에 부끄럽지 않게. <1975.3.24. 대학신문>
교문을 나선 학생들
서슬 퍼런 독재 시대에 대학로는 정권에 저항하는 젊음이 파도처럼 일던 길이었습니다. 물론 그 시절 그렇지 않았던 대학교 앞은 없었지만요. 1960년 4월 19일, 전일 고려대 학생들의 진압에 반발한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교문을 나섭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동대문, 혜화동 일대에 모여 있는 대광고, 강문고(현재 용문고), 덕수상고 (현재 덕수고), 휘문고, 동성고 등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합세해 대오를 이루며 자유당 독재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입니다. 시민과 학생들은 대학로에서 종로를 거쳐 당시 국회의사당이 있던 태평로까지 행진합니다.
마로니에 공원 맞은편에는 서울대 동숭캠퍼스 시절부터 존재해온 찻집 하나가 있습니다. ‘학림다방’이라는 곳인데요. 이곳은 ‘문리대학 제25강의실’이라고 불릴 정도로 학생들이 아지트처럼 드나들던 곳입니다. 1980년대 군사정권 당시 신군부는 ‘학생단체가 사회주의 폭력혁명으로 정권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골자의 공안사건을 조작해 학생들을 잡아들였습니다. 이때 전민학련 소속 학생들이 첫 모임을 가졌던 곳이 학림다방이었다는 점과, 숲(林)처럼 무성한 학(學)생운동 조직을 뿌리 뽑았다고 해서 학림사건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문화예술이 꽃피는 거리
1980년대부터 정부는 대학로 일대의 분위기를 전환해 ‘문화예술의 거리’로 조성하기 위한 정책을 펼칩니다. 각종 문화단체와 극장, 공연장이 동숭동 대학로 일대에 생겨납니다. 대학로 소극장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파랑새극장과 문화예술회관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대학로가 연극과 뮤지컬의 성지가 된 기원은 이때로부터 시작됩니다. 서울시는 1985년 매주 토요일·일요일 대학로 일대에 차 없는 거리를 선포했습니다. 길을 따라 다양한 예술 공연이 펼쳐졌고, 구경을 나온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늘어난 유동인구로 골목골목의 소극장은 언제나 만석이었습니다. 대학로의 연극과 뮤지컬이 대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대학생들의 거리의 대명사는 신촌이나 홍대로 넘어갔고, 발길이 뜸해진 대학로 상권은 활기를 잃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으로 이곳을 떠나갔고, 최근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공연업계는 줄줄이 폐업해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학로, 이름만 들어도 청춘의 활기가 연상되는 길입니다. 푸름 가득한 마로니에 공원 가운데서 펼쳐지는 이름 없는 마술사의 공연과 이를 빙 둘러싼 관객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반가운 소식은 다음달부터 30여년 만에 대학로 차 없는 거리와 공연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대학로를 따라 걸으며 마로니에의 <동숭로에서>가 기억하고 있는, 그 시절의 추억과 낭만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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