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축으로 ‘기후정의 희망’ 제시할 지도자는 없는가

한겨레 2023. 5. 2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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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정욱식의 찐안보][한겨레S] 정욱식의 찐안보 - 군축과 기후정의
지난해 세계군사비 사상 최대
‘인류 공동의 적’은 기후위기
군비 줄여 탄소 감소·평화 정착
케네디·고르비 같은 선구자 갈망
지난 19일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찾은 주요 7개국(G7) 정상들이 원폭 사망자 위령비에 헌화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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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중순 중국 베이징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누군가는 올해 유엔 총회에서 이러한 취지로 연설해주길 바라며 글을 써봤다.

외계인보다 무서운 인류의 적

“62년 전 존 에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바로 이곳에서 ‘핵무기가 인류를 끝장내기 전에 인류가 핵무기를 없애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이제는 기후위기가 인류를 끝장내기 전에 인류가 기후재앙을 막아야 합니다. 35년 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이곳에서 ‘어떤 나라가 불안하다고 느끼면 다른 나라도 결코 안전해질 수 없다’는 취지로 연설하면서 이를 ‘신사고’라고 불렀습니다. 이제는 기후환경이 안전해지지 않으면 인류도 결코 안전해질 수 없는 시대입니다. 모든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기후변화를 그 중심에 둘 수 있는 지구적 차원의 신사고가 절박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사고는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을 비롯한 지구촌의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지도자들에게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저는 특히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군비경쟁과 기후위기의 관계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사 활동은 막대한 탄소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세계 군사비는 기후위기 대처에 필요한 소중한 자원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강대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서로를 적이나 위협으로 간주하면서 기후위기 대처를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국제협력도 뒷전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지구에 있는 나라들이 서로 다투다가도 외계인이 침공하면 지구를 구하기 위해 모든 나라가 힘을 합쳐 외계인에 맞서 싸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류의 ‘공동의 적’은 무엇일까요? 누구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기후위기라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여 이 시대에 절박하게 요구되는 신사고는 군비경쟁과 기후위기의 악순환을 끊고 군비 축소를 통해 평화 증진과 기후정의 실현의 선순환을 만들어내는 데 두어야 합니다. 갈수록 거주 불능의 땅이 되어가고 있는 지구를 둘러싼 허망하고도 위험한 경쟁을 멈추고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살리는 데에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들부터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미국·중국·영국·프랑스·러시아로 구성된 상임이사국들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라 공식적인 핵보유국이라는 특권을 누려왔습니다. 동시에 상임이사국들은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해야 할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러한 특권과 책임이야말로 상임이사국들이 군비 축소를 통해 평화와 기후정의 실현에 솔선수범할 수 있는 현실적·도덕적 기반이 되어야 하고, 또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출발 테이프를 끊겠습니다. 먼저 점차적으로 군사 훈련을 줄여 탄소 배출을 감축할 것입니다. 또 군수 산업체를 신재생에너지를 비롯한 민수 산업체로 전환하면서도 더 좋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정의로운 전환’을 추진할 것입니다. 국방비 감축을 통해 절약한 자원을 탄소 중립과 기후변화 적응에 사용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발도상국들의 탄소 중립화 노력을 적극 지원할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도 이에 적극 동참해 지구적 차원의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혹자는 군축이 기후위기 대처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저 역시 군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군축이 탄소 배출 저감, 기후위기 대응 재원 증대, 국제협력의 본격화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기여는 바로 ‘희망 만들기’에 있습니다. 냉전 시대에 그나마 불안한 평화라도 지켰던 여러 군축 조약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졌습니다. 또 거의 모든 나라가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군축은 불가능하다고들 합니다. 심지어 군축을 제안하거나 추진하는 지도자는 자국에서 여론의 지지도 받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군축의 종말’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동시에 우리는 ‘절망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후재앙을 막을 수 없다는 비관론이 지구촌을 배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가능해 보인다는 군축을 통해 희망의 근거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미국, 전세계 군사비 39% 차지

베이징에 가면서 미국과 전략 경쟁에 여념이 없는 중국의 전문가들과 무슨 얘기를 나눌까 고민해봤다. 최근 전해진 두 가지 뉴스는 그들을 상대로 ‘탐색적 대화’에 나서보겠다는 결심을 굳게 만들어줬다.

하나는 2022년 세계 군사비가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는 소식이다. 스웨덴의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올해 4월23일에 공개한 ‘2022년 세계 군비 지출 동향’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전세계 군비 지출 규모는 전년도보다 실질 증가율로 3.7% 늘어난 2조2400억달러(약 2982조원)를 기록했다. 2022년 화폐가치 기준으로 환산해도 냉전 시대 군비경쟁이 절정에 달했던 1980년대 중반보다도 약 6500억달러 늘어난 수치다. 이 가운데 미국은 작년에 무려 8770억달러를 군사비로 써 세계 군사비의 39%를 차지했다.

또 하나는 향후 5년 안에 지구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이상 상승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소식이다. 세계기상기구(WMO)가 지난 17일 보고서에서 이럴 가능성이 66%라고 밝혔다. 앞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지구 온도 상승이 1.5도를 초과하면 50년 빈도의 극한 폭염은 과거보다 8.6배, 폭우는 1.5배, 가뭄은 2배 잦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세계 도처의 이상기후 뉴스로도 경고는 이미 입증되고 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함께 봐야 한다는 게 필자의 지론이다. 베이징에서 만난 전문가들에게 “세계 시민과 많은 나라들은 중국이든 미국이든 그 어떤 나라든 군비 축소를 통해 세계 평화와 기후정의 실현을 주창하고 주도하는 나라에 베팅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 시민도 최근 역대급 황사와 폭염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탓일까? 중국의 전문가들도 의외로 관심을 보였고 앞으로도 계속 소통하자고 화답했다.

매년 9월에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각국 정상들이 참석하는 총회가 열린다. 62년 전 케네디는 핵무기를 ‘다모클레스의 칼’(권좌의 천장에 매달려 있는 칼)에 비유하면서 핵군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35년 전 고르바초프는 소련부터 군축에 나서겠다고 선언해 냉전 종식을 향한 대문을 활짝 열었다. 올해는 누가 나설까? ‘흑묘백묘’의 심정으로 물어본다.

한겨레평화연구소장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평화다’라는 믿음으로 평화 활동과 연구를 해오고 있다.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핵과 인간>,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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